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17화 (117/366)
  • 117화

    쿵!

    ‘싸늘하네.’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생각보다 더 차가웠다. 보일러도 안 켜고 거의 한 달을 비웠다 보니 한겨울이 아닌데도 찬기가 돌았다.

    “사도고 뭐고 일단 집안일부터 해야겠…….”

    우웅―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K은행 입금 알림]

    은행 어플 알림이었다. 그동안의 수입을 최소한의 생활비만 제외하고 전부 지유 병원비 대출금이랑 부모님 새 집 빚으로 돌린 터라 자동 이체 문자는 많이 봤어도 입금 알림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잠깐 쉴 틈이 생긴 김에 은행 어플을 눌렀다.

    ‘던전을 많이 돌긴 했지만 지출도 많았으니까……. 세금이랑 이것저것 떼면 3천 정도 있으려나.’

    로딩 화면이 계속 이어지다 이내 내 통장 잔고를 띄웠다.

    “…어, 어어?”

    눈이 잘못됐나. 그게 아니면 어플 오류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 숫자가 나올 리가 없을 텐데.

    탁.

    새로 고침 버튼을 다시 눌렀지만 숫자는 그대로였다.

    “십만, 천만, 억, 십억, 백…….”

    털그럭.

    결국 손에서 핸드폰이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말이 되는 잔고야?!’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물론 이전 생에도 S급 헌터였기 때문에 통장에 억대의 숫자가 찍혀 있는 건 자주 봤다. 하지만 지금 내 통장엔 그거의 수십, 아니 수백 배의 돈이 들어있었다.

    배정된 파견 일정을 전부 소화하기도 했고 미국에서 게이트 수습도 도와줘서 그런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딩동.

    정신없는 와중에 초인종이 울렸다. 핸드폰을 주운 후 허둥지둥 현관 앞으로 발을 옮겼다.

    ‘택배 올 거 없는데.’

    문 외시경을 통해 밖을 보자 검은 옷을 입은 장신의 인물이 서있었다.

    끼익.

    조금 꺼림칙했지만 일단 문을 열었다. 그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얼굴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오셨죠?”

    거의 하미준 헌터 정도 될 법한 장신이라 고개를 꽤 들어야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기만 했다.

    바스락.

    섬뜩한 기분과 함께 조심스럽게 문을 닫을 때쯤 그의 등 뒤로 살랑거리는 핑크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저 머리카락……!’

    텁.

    “한진우 헌……. 왁!”

    뒤에서 나타난 한진우 헌터가 갑자기 내 오른팔을, 정체불명의 장신 인간이 내 왼팔을 단단히 잡았다.

    “아니, 뭐예요. 지금?”

    “헤헤… 오늘 저희랑 시간 좀 보내요!”

    “네?”

    헤실헤실 웃는 한진우 헌터에게서 눈을 떼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한 손으로 마스크를 벗어 바지 주머니 안에 쑤셔 박더니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선글라스 너머로 뱀처럼 날렵하게 올라간 눈매가 보였다.

    “하미준 헌터?!”

    “아하하, 많이 놀랐어?”

    연행되는 범죄자같이 그들에게 붙들린 채 어느새 빌라 입구까지 내려왔다. 좁은 골목을 떡하니 차지한 SUV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덜컥.

    그들은 나를 뒷좌석으로 밀어 넣었다. 푹신한 시트에 엎어지다시피 앉을 때쯤 한진우 헌터는 조수석에, 그리고 하미준 헌터는 운전석에 앉았다.

    “신지의 헌터, 안전벨트 해주겠어?”

    “아, 네…….”

    “출발~”

    한진우 헌터가 양손을 번쩍 들자 부드러운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였다. 그 좁은 골목을 능숙하게 빠져나온 차가 큰길에 도착하고 나서야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저희 어디 가는 거예요?”

    “마사지 받으러.”

    “…네?”

    안 그래도 퇴원한 지 얼마 안 돼서 정신없어 죽겠는데 난데없는 대답까지 들으니 사고가 멈췄다.

    “압구정에 있는 곳인데 사장님께서 C급 보조계 헌터 출신이세요!”

    “민숙 언니랑 비슷한 연배거든. 몇 년 전에 현역에선 은퇴하시고 이 숍을 열었지.”

    그때 한진우 헌터가 내게 핸드폰을 건넸다.

    [낙원의 숨결, 헌터들의 빠른 회복을 도와드립니다.]

    마사지 숍 홈페이지 화면이었다. 화면을 밑으로 내리자 마사지 코스들이 나타났다.

    낙원의 숨결 시그니처 코스

    ―120분

    ―오직 낙원의 숨결에서만 받을 수 있는 시그니처 코스입니다.

    ―파견 업무로 지쳤거나 장기 파견이 예정된 헌터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C급 보조계 스킬 ‘삼도천의 세 자매’가 직접 마사지를 진행합니다.

    ―체내 기력을 빠르게 회복하며 3주간 치유력이 증가합니다.

    ―회복 오일 12종 중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70,000,000원 (봉사료 포함)

    ‘가격이 왜 이래.’

    헌터 전용 숍이라서 그런지 가격의 단위부터 달랐다. 다음 페이지로 가는 버튼을 눌러 다른 코스도 살폈다.

    낙원의 숨결 회복 코스

    ―90분

    ―회복 속도를 상승시키는 코스입니다.

    ―재활 치료 중인 헌터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C급 보조계 스킬 ‘삼도천의 세 자매’가 만든 회복 오일 12종 중 세 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 상처의 회복 속도를 상승시키며 체내 기력을 회복합니다.

    ―20,000,000원 (봉사료 포함)

    낙원의 숨결 실속 코스

    ―60분

    ―체내 기력을 회복하는 코스입니다.

    ―C급 보조계 스킬 ‘삼도천의 세 자매’가 만든 회복 오일 3종이 사용됩니다. (종류 선택 불가)

    ―체내 기력을 회복합니다.

    ―10,000,000원 (봉사료 포함)

    시그니처 코스에 비해 저렴할 뿐이지, 나머지 코스들의 금액도 살벌했다.

    “일반적인 마사지 숍보다 좀 비싸긴 하지?”

    “좀 비싼 정도가 아닌데요…….”

    “아하하. SS급 헌터가 이렇게 새가슴이어서야.”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섰다. 하미준 헌터가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신지의 헌터, 이번 사고 이후 병원에 유독 오래 있었다면서.”

    “한 일주일 정도 있었죠. 부상은 없었어요.”

    “그게 바로 체내 밸런스가 완~전히 깨진 증거예요!”

    한진우 헌터가 내게서 핸드폰을 받아 들며 재잘거렸다.

    “각성자가 비각성자에 비해 신체 능력이 발달한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넘치는 힘을 사용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몸이 따라오지 않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 상태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하면 당연히 체내 균형이 깨지죠. 그걸 막기 위해서 기력 회복제를 먹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신지의 헌터를 여기 데려가려는 것도 비슷한 이유지.”

    부우웅―

    차는 다시 큰길을 따라 빌딩 숲 사이를 달렸다.

    ‘두 사람 모두 날 걱정했구나.’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에서 날 걱정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익.

    차가 어느 골목에서 멈춰 섰다. 어디선가 나타난 정장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더니 문을 열어주었다.

    “와…….”

    평범한 가정집들 사이에 마당이 딸린 커다란 저택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서울 한복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풍스러운 저택이었다. 철문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저택은 해외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페인트칠을 다시 했나?”

    “네. 그래서 지난주에는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미준 헌터에게서 차 키를 건네받으며 직원이 대답했다.

    마당에는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 있었고 나무도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꿈꾸는 기분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저택 현관으로 가자 나무로 된 문이 스스로 열렸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헌터 전용 마사지 숍 낙원의 숨결입니다. 하미준 님 외 두 분 맞으십니까?”

    “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우리의 짐을 받아주었다. 다들 가방이나 선글라스 같은 걸 맡길 동안 난 숍 내부를 둘러보았다.

    벽과 가구들이 전부 어두운 색의 나무라서 그런지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은은한 꽃 냄새와 잔잔히 흐르는 클래식도 이곳의 분위기를 살렸다.

    “하미준 님, 신지의 님은 저를 따라오세요.”

    “한진우 님은 이쪽으로 와주세요.”

    카운터 뒤쪽에 있던 양쪽 복도에서 직원들이 걸어 나왔다.

    “그럼 이따 봐요~”

    한진우 헌터가 손을 흔들며 오른쪽 복도로 사라졌다.

    ‘어떤 곳이려나.’

    나와 하미준 헌터는 직원을 따라 왼쪽 복도로 들어갔고 가장 안쪽에 있는 문에 다다랐다.

    “하미준 님은 왼쪽 방으로, 신지의 님은 오른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좋은 시간 보내, 지의 양.”

    하미준 헌터가 윙크를 날리곤 왼쪽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이 방들만 문 색깔이 다르네.’

    쿵.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발을 들이자 방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붉은 실크 가운이 걸린 행거와 명품 브랜드의 스킨 제품으로 도배가 된 화장대만 있을 뿐이었다.

    “음?”

    침대 위에 흰색 메모지가 있었다.

    [가운으로 갈아입으시고 침대에 엎드려 주세요.]

    침대에 놓인 쪽지를 집어 화장대 위에 올려놓은 후 일단 시키는 대로 가운을 집었다.

    사라락.

    피부에 닿는 감촉이 너무 부드럽고 가벼워서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아이테르의 로브를 인벤토리에 넣고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가자마자 꽃잎을 잔뜩 실은 바람이 불었다.

    꽃잎들은 이리저리 뭉치더니 이내 인간의 형체가 되어 내 옆에 섰다.

    “반가워요, 빛의 각성자님.”

    “오…….”

    “삼도천의 세 자매 중 둘째, 안이라고 해요. 당신의 기력을 회복시켜 드리겠습니다.”

    소환계 스킬이 아닌데 인격을 갖고 있는 존재가 등장하다니. 안의 존재가 신기해서 손을 뻗자 홀로그램을 만지는 것처럼 그의 형체가 살짝 흐트러졌다.

    “각성자님?”

    “아, 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에게 대답해 준 후 침대에 엎드렸다. 구멍이 난 곳에 얼굴을 댔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가볍게 근육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향기로운 꽃 내음과 함께 제법 사람 같은 손이 내 어깨에 닿았고, 동시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