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16화 (116/366)
  • 116화

    “이 세상의 균형과 유지를 담당하는 존재, 조율자입니다.”

    조율자였다.

    눈동자까지 새하얀 양의 모습을 한 그는 악몽에서 본 것보다 훨씬 위압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새하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을 때마다 온몸이 찌릿했다.

    콰과광!!

    “윽?!”

    갑자기 내가 서있던 곳에 온갖 무기들이 떨어졌다. 옆으로 굴러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커다란 창이 또다시 내 심장을 노렸다.

    쾅!

    그것을 실드로 튕겨낸 후 몸을 일으키자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았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최민 헌터가 ‘방공호’로 나를 살짝 감싼 채 조율자 앞에 섰다. 그의 손엔 푸른 불꽃이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일렁였다.

    “사도 최민, 당신이 화를 내야 할 상대는 제가 아니라 저 각성자입니다.”

    조율자의 고개가 다시 나를 향했다.

    “평생 죄책감을 갖고, 행복과 기쁨도 모르는 몸으로 살겠다고 하던 당신의 다짐이 저 각성자에 의해 강제로 파괴되었습니다.”

    “…….”

    “당신은 그래도 상관없는 겁니까?”

    최민 헌터가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에서 불씨가 떨어졌다.

    “우리 가족은 나 혼자 잘 산다고 해서 원망할 사람들이 아니야.”

    화르륵.

    날 감싼 방공호가 더욱 견고하게 벽을 세웠다.

    “저 사람 덕분에 그걸 다시 생각해 낸 것이고.”

    “…인간들은 정말 비합리적이군요.”

    “넌 그런 인간을 네 장기말로 삼은 거야.”

    콰과광!!

    이번엔 최민 헌터의 머리 위로 커다란 창이 떨어졌다. 그는 가볍게 피한 후 내 옆으로 날아왔다.

    후웅―

    “각성자 신지의. 당신은 도대체 뭘 할 속셈입니까?”

    ‘빠르다……!’

    조율자가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양의 두 눈이 나를 응시했다. 불투명하고 새하얀 눈엔 그 어떤 것도 비치지 않았다.

    “…창조자의 기운을 지웠군요. 그것도 당신의 능력의 일부입니까?”

    “창조, 아…….”

    ‘창조자의 눈동자가 사라져서 그렇군.’

    내가 창조자의 사도라는 오해는 풀렸지만 그것만으로 나에 대한 평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나는 자신의 도구를 뺏어간 존재이자 눈엣가시다. 지난 시간선처럼 내 몸은 그에 의해 언제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다.

    텁.

    나와 조율자 사이를 가로막은 최민 헌터를 옆으로 살짝 민 후 조율자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도 세상의 종말을 막는 쪽이야.”

    “사도 계약은 어떻게 깬 겁니까? 그리고 도대체 왜 깬 겁니까?”

    “종말을 막는 데 도움이 안 되니까.”

    조율자의 형체가 순간 크게 흔들리다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틀림없이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종말을 막기 위해 동료들이 필요해. 그리고 이 계약은 내 동료에게 하등 쓸모없는 것이었지.”

    “그 계약은 사도 최민 스스로가 빈 소원으로 성립된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사람을 살려놓고 소원을 빌라고 강요한 건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최민 헌터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창조자의 사도를 죽이면 종말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

    “넌 틀렸어.”

    탱그랑.

    새하얀 도끼들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불꽃이 그것을 전부 튕겨냈다.

    “애초에 넌 접근부터가 틀려먹었다고.”

    “당신은 꼭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군요.”

    “적어도 너보단 많이 알고 있을걸.”

    조율자는 어떻게든 세상을 유지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목숨은 벌레만도 못한 것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비합리’도 다 그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다.

    “인간은 비합리적이야. 그리고 이 세상은 그런 인간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말을 막으려면 세상에서 가장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가야 돼.”

    탕!!

    자아를 들어 녀석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뿔을 스쳤다.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쏜 게 아니기 때문에 아쉽지도 않았다.

    절대자라는 놈이 인간한테 화풀이나 하고 있으니까 나도 좀 되돌려 줬을 뿐이다.

    “방법은 내가 아니까 넌 방해나 하지 말고 빠져있어.”

    쩌적.

    새하얀 공간에 금이 갔다. 조율자의 형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이 공간 전체가 무너져 내렸다.

    ‘낮말을 듣는 새’로 허공을 디디려 했지만 몸이 물속을 떠다니듯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흘러갈 뿐이었다.

    “당신이 도대체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켜보겠습니다.”

    “끝까지 자존심은 세네.”

    “하지만 그럼에도 종말을 막을 수 없다면 전 당신을 죽일 겁니다.”

    타닥.

    “왓.”

    갑자기 발이 땅에 닿아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최민 헌터가 잡아준 덕분에 뒤로 넘어가진 않았지만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시 돌아왔다.

    ‘어차피 종말이면 다 죽는데 무슨.’

    조율자는 내 기억보다도 더 구질구질했다. 그가 했던 말들을 조용히 곱씹다 보니 한 번 구겨진 미간이 잘 펴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혹시라도 조율자가 또 위협을 한다면 제가 다시 사도가 되어도 되니…….”

    “그건 절대 안 돼요.”

    아무리 다른 소원을 빌더라도 그게 나중에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이전 시간선과 동일하다면 회귀자의 업을 가진 내가 희생해야 지옥도를 닫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시간선은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다른 업을 가진 사람이 희생양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카르마의 탄환으로 전부 파괴하고 가야 해.’

    “신지의 헌터.”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시겠습니까?”

    최민 헌터가 정중하게 물어왔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가 의지로 타오르고 있었다.

    “푸흐.”

    차분한 얼굴과 말투는 변함이 없는데 눈에 도는 생기가 낯설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샜다. 그는 내 반응에 당황한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죄송해요. 최민 헌터도 확실히 많이 바뀌었다 싶어서요.”

    “…그런가요.”

    최민 헌터의 양쪽 볼에 얕은 보조개가 생겼다. 웃는 게 조금씩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든 채 입을 열었다.

    “제 계획은 단순해요. 사도들을 전부 만나서 그들이 스스로 창조자의 파편을 파괴하게 만들 거예요.”

    “아까 말씀하셨던 사도들이 전부 거물급 인사이긴 하지만 신지의 헌터 정도라면 그들도 기꺼이 만나주겠죠.”

    노블레스 길드장인 레일리, 불릿 길드장 조슈아, 그리고 일본 초대 헌터 협회장인 센.

    유랑 생활을 하는 비스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각국에서 꽤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파괴할 방법은 있습니까?”

    “구체적인 건 아직 말하기 힘들지만, 협상할 거예요. 협상 대가로 파편을 부수고 나면 함께 파편 던전을 해결할 거고요.”

    최민 헌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계획에 제가 필요하다면 망설임 없이 절 부르세요.”

    “최민 헌터…….”

    “어떻게든 당신을 돕겠습니다.”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절망으로 녹아내렸던 그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불이 되어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할 수 있어.’

    텁.

    그의 손을 맞잡았다. 이번 시간선에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다들 오랜만이야아아앙.”

    바다 위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창조자가 모래사장 쪽을 향해 짧은 다리를 흔들었다. 그는 새하얀 파도를 타고 나와 모래사장 위에 발을 디뎠다.

    그의 등장에 모래사장에 있던 사물들이 반응했다.

    “별일이네요. 당신이 저희를 모두 모이게 하다니.”

    웃는 얼굴의 가면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엔 처불러도 대답도 없는 놈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같잖은 얘기할 거면 난 가겠다.”

    “아직 모인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네. 조금 기다리지, 탕자.”

    “영능, 두 번은 말 안 한다. 내 말에 토 달지 마.”

    커다란 방패가 새하얀 비단뱀을 향해 화를 냈지만 뱀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창조자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래서 왜 부른 건데?”

    새빨간 옷을 입은 아기 인형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의 말에 창조자가 입을 열었다.

    “지금 보니까아 다들 똑같은 현상을 겪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아~”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물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창조자는 샐쭉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아아~ 계약의 대가로 준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그것 때문에 난 최초로 패배라는 걸 겪었다. 이건 엄연한 계약 위반이야, 창조자.”

    “그건 나도 미안해애애~”

    창조자가 방패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다 아기 인형 쪽으로 눈을 굴렸다.

    “우웅~ 쿠마리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며어.”

    “사람들의 꿈이 통제가 안 돼.”

    아기 인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었다. 텅 빈 나무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원인은 알아봤나? 그저 자네의 힘이 약해진 거라면 이해하겠다만.”

    “나는 이해 못 한다. 원인이 있다면 당장 해결하고, 네 힘이 약해진 거라면 난 이 파편을 부술 것이야.”

    “그건 안 돼애애애~!”

    창조자가 모래사장 위에 엎드렸다. 그는 한참 우는 소리를 내다 다시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자신의 사도들을 바라보았다.

    “한 가지 의심 가는 원인은 있어어.”

    “그게 뭐죠?”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SS급.”

    사도들이 몸을 흠칫 떨었다. 기묘한 빛이 든 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몸이 굳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언급이 잦네요. 저한텐 그와 친해지라고 하질 않나, 동료가 되라고 하질 않나.”

    “어떤 존재인지 더 알고 싶었거드으은~”

    “빨리 본론부터 말해라. 그 애송이가 왜 의심이 가지?”

    “그 아이에게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느낌이 나.”

    쩌적.

    창조자의 공간에 금이 갔다. 그가 강하게 동요하거나 감정의 변화가 있을 때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사도들은 익숙하다는 듯 깨질 것 같은 하늘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게 뭐지? 그가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걸 의미하는 겐가?”

    “그것보다느은 뭐랄까아…….”

    툭.

    창조자의 손에서 형형색색의 실로 만들어진 공이 떨어졌다.

    “여러 세상이 합쳐진 것 같달까아?”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처음에는 그냥 내 착각인가 했어어.”

    실공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사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근데에 며칠 전의 사건으로 확실해졌지이.”

    퍽.

    공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모래사장에 처박힌 공이 여러 가닥의 실로 분해되더니 그 속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아이는 여러 세상을 살다 온 아이야아.”

    “…도저히 일반인의 상식으론 이해되지 않는다.”

    “절대자의 상식으로도 이해가 안 되지롱~”

    쿠마리의 말에 창조자가 까르륵 웃으며 바닥을 굴렀다. 실은 어느새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아무튼 그 SS급 애송이를 죽이면 내 시나리오도 다시 제 기능을 한다는 건가?”

    “높은 확률로 그럴 거야아.”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쿵.

    탕자의 뒤로 고풍스러운 나무문이 떨어졌다.

    “다들 애송이에게 손대지 말고 기다려. 내가 그를 죽이고 다시 능력을 되찾을 테니까.”

    커다란 방패가 그대로 문을 통해 사라졌다. 남은 사도와 창조자만이 바닷가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여간 성미하곤.”

    가면이 고개를 저었다. 창조자도 곤란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다 이내 모든 사도들의 뒤에 문을 소환했다. 원래 그들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문이었다.

    “뭐, 할 말은 이게 다야아~ 나머지는 너희들에게 맡길게에.”

    사도들은 저마다 문을 열고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쏴아아―

    파도가 부서지는 해안가, 창조자만이 가만히 서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예술가의 삶이란 정말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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