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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115화 (115/366)

115화

【인터미션】

신체의 밸런스가 많이 깨진 탓에 일주일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외상이 없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리를 한 모양이었다.

입원하자마자 이틀을 꼬박 앓아누운 터라 치유계 스킬을 가진 헌터들까지 병실을 오가면서 내 치료를 도왔다고 한다. 같이 들어간 다른 사람들에 비해 회복은 늦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멀쩡하다.

‘낮잠을 하도 잤더니 잠이 안 오네.’

차라락.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으니 예쁜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별은 잘 안 보였지만 초승달이 밝게 떠있었다.

‘지의야.’

“아.”

그때 자아가 튀어나왔다.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기가 눌린 느낌이었다. 미식가의 파편 안에서 대화를 한마디도 안 나눠서 그런가, 자아를 쳐다보는 게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자아에게 가장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 너도 전부 기억났어?’

자아는 몸을 흠칫 떨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악몽 같았던 회귀였지.’

자아가 중얼거리며 같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기인데 갈라진 목소리 때문에 꼭 사람처럼 느껴졌다.

‘우리 이번엔 살 수 있을까.’

‘당연하지.’

자아의 불안 섞인 발언에 단번에 대답했다. 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빈말을 한 게 아니었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무조건 살아남게 할 거니까.’

텁.

자아의 손을 잡았다. 새하얀 빛가루가 그의 주위를 떠다녔다.

‘철들었네.’

자아는 내 손을 놓더니 병실을 둥둥 떠다니며 괜히 여기저기를 건드렸다.

‘어쩌다 보니 매번 병실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 같긴 한데.’

‘응.’

‘바로 잡으러 갈 거지?’

난 자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뭘 잡으러 가자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턴 정말로 사도를 찾아야 한다.

모든 시간선의 기억이 돌아온 덕에 사도가 누구인지 전부 알고 있다.

‘가면’ 조슈아, ‘탕자’ 레일리, ‘영능’ 센, 그리고 ‘쿠마리’ 비스.

‘잠깐, 그럼 조슈아는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건가?’

내가 창조자를 거절했으니 그가 조슈아를 통해 나를 해치우라고 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는 이전 시간선에도 강한 사람들을 자신의 길드로 데려오긴 했지만, 이젠 안일하게 생각할 수 없다.

‘대신 방법은 바꿔야 할 거야.’

‘당연하지.’

98번째의 내가 보여주었다. 사도를 전부 죽이는 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두근, 두근.

시체가 되어 내 앞에 떨어졌던 사도들의 모습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 심장이 쿵쿵댔다.

‘우리가 왜 걔네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더라?’

‘스스로 파편을 파괴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그게 사라지면 창조자랑 계약하고 받은 힘이나 소원이 없던 걸로 돌아가거든.’

창조자가 쓰레기라는 걸 알면서도 계약을 파기할 수 없던 건 바로 그 소원 때문이다. 세상을 망하게 둘지언정 자신이 손에 넣은 것을 포기하진 않겠다는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럼 걔네들이 빈 소원을 내가 들어주면?”

‘말이 되냐, 그게?’

입 밖으로 낸 소리에 자아가 바로 딴지를 걸었다. 자아의 어깨를 잡아 내 쪽을 보게 했다.

‘아니, 다들 터무니없는 소원을 빈 게 아닌 것 같아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네가 들어줄 수 있겠어?’

‘완벽하게 들어줄 순 없어도 협상이 가능한 선에서는 가능할 거야!’

‘철들었다고 했던 거 취소다, 인마.’

‘아, 좀!’

똑똑똑.

자아와 한창 실랑이를 벌일 무렵,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나 입 밖으로 소리 냈어?’

‘아니.’

대화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닐 텐데.

자아는 나와 문을 바라보다 이내 다시 피어싱 형태로 돌아갔다.

면회 시간은 이미 지났다. 그럼에도 내 병실로 안내를 해줬다는 건 그만한 대우를 받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거다.

‘설마 김강희인가?’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조용히 문고리를 잡았다.

쿵.

“아.”

“어, 어……!”

문이 무언가에 부딪혀 한 뼘밖에 열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충돌에 깜짝 놀라 복도 쪽으로 고개를 쭉 빼자 붉은 정수리가 보였다.

“최, 최민 헌터?”

“…역시 안 주무셨군요.”

그는 문에 부딪힌 머리를 손으로 만진 후 허리를 쭉 펴 나와 눈을 맞췄다.

탈그락.

지금 보니 문 앞에 웬 바구니가 있었다.

‘이걸 놓다가 머리 박은 건가.’

바구니와 최민 헌터를 번갈아 보자 그가 그것을 주워 내게 내밀었다.

“회복이 더디다고 들어서 몇 개 담았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바구니를 받아 안을 보자 과일이랑 쿠키 몇 개, 그리고 부산물 연구소 마크가 찍힌 영양제가 들어있었다.

‘근데 방금 민이가 ‘역시’라고 하지 않았냐.’

‘아.’

갑작스러운 만남에 정신이 없던 와중에 자아가 중요한 지점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악몽 속에서 만났던 수많은 ‘나’들도 사람에겐 각자의 사명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은 최민 헌터의 팔자가 나를 구하는 건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의 사명이 나와 관련된 걸지도 모른다. 그 사명 때문에 내 상태가 어떤지 아는 걸 수도 있고.

“할 얘기 있어서 오신 거죠?”

내 말에 최민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를 들고 병실 소파 쪽으로 먼저 들어가자 그가 내 뒤를 따랐다.

달칵.

문을 닫은 후 그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불을 켜지 않았지만 창밖의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제법 잘 들어와서 크게 어둡진 않았다.

“혹시 제 악몽 속에서 있던 일을 전부 기억하십니까?”

“네.”

“제게 했던 말도, 전부 진심이셨습니까?”

달빛을 받은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날렵한 얼굴선을 따라 그림자가 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를 개화시킬 때부터 카르마의 탄환을 쏠 때까지, 그에게 했던 모든 말은 진심이었다.

“당연하죠.”

“…하아.”

그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더니 손가락 틈새로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이상하게 안 들을게요.”

“전 신지의 헌터를 구하기 위해 각성한 것 같습니다.”

‘진짠가 보네.’

최민 헌터의 사명이 나와 관련돼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 상태창에서 사명이라는 글자를 보신 적 있습니까?”

“…….”

“불편하시다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당신을 신뢰하는 것뿐이니…….”

“있어요.”

내 대답에 최민 헌터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조율자와의 계약까지 강제로 파기한 마당에 언제까지 발뺌할 수는 없다.’

회귀 사실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힘에 대해선 공유할 수밖에 없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

“구원…….”

“그게 제 사명이에요.”

최민 헌터가 양 무릎에 팔꿈치를 댄 채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래서 그런 거였군…….”

“최민 헌터 사명은 뭔데요?”

“…구원자를 구할 자입니다.”

노골적인 사명이다. 그가 첫 번째 시간선에서 나를 구한 건 우연이었지만, 그 우연이 반복되다 보니 이번 시간선에선 아예 사명으로 굳었나 보다.

최민 헌터는 상태창을 보는지 허공을 바라본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구원자를 구하라. 늘 그래왔듯.”

“늘……. 네?”

“제 사명의 설명입니다.”

‘회귀를 했다고 대놓고 말해 주는구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난 아무런 말 없이 혀로 입술만 축였다.

“당신은 제가 본 것들이 꿈이라고 했지요.”

“…….”

“전 당신을 믿으니까, 그 말도 믿겠습니다.”

그가 아주 옅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신지의 헌터의 마음이 편해졌을 때 말씀해 주세요.”

“최민 헌터…….”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에게조차 모든 것을 말하기 어려운 이 상황이 야속했다. 마음 같아선 회귀까지 전부 털어놓고, 지난 시간선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충동적인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르기 때문에 그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많은 건 못 말해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세상의 종말에 대한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회귀한 시간선 속에서 쌓은 종말에 대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었다. 지옥도의 존재, 창조자의 파편, 그리고 사도와 배신자의 정체까지.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내 말을 듣더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창조자의 사람…….”

“사도 계약을 맺은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김강희는 파편을 갖고 있지 않은 걸로 기억한다. 모든 던전을 열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뿐.

‘어쩌면 사도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사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때 최민 헌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와 조율자가 맺은 계약은 어떻게 파괴하신 겁니까?”

회귀 말고도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 나왔다. 카르마의 탄환을 설명하려면 내 연계 패시브 스킬인 ‘말이 씨가 된다’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이 신뢰하는 상대가 알고 보니 스킬을 쓴 거란 걸 알게 되면 분명히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실망할 거야. 날 안 믿을 거라고.’

“신지의 헌터?”

“…사명을 통해 받은 거예요. 절대자의 계약을 파괴할 수 있는 탄환을요.”

“정말 구원자시군요.”

최민 헌터의 부드러운 음성이 귀에 꽂힐 때마다 가슴엔 칼이 꽂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했던 세빈이의 마음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전부 털어놓을 거야.’

지금은 그때를 미루는 것뿐이다.

끼기긱.

그때 갑자기 쇠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에 나뭇가지라도 닿았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아까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뭔가 온다.’

자아를 손에 쥔 채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기 있었군요.”

“헉……!”

낮고 맑은 목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병실 풍경이 사라지더니 사방이 새하얀 공간으로 바뀌었다. 최민 헌터를 바라보자 그는 미간을 구기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파지직.

허공에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커다란 양이 나타났다. 최민 헌터의 악몽에서 본 바로 그 양이었다.

“이 세상의 균형과 유지를 담당하는 존재, 조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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