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완전 치유는 나도 있는데, 아쉽게 됐네.”
<■재 상태>
<죽■ 것 같■. 당장 눈앞의 음■을 먹■치■■ 싶■.>
<남■ ■력 : 47■,1■■>
괘씸한 녀석을 향해 한 번 비아냥거려 준 후 다른 헌터들의 얼굴을 살폈다.
‘아, 다들 엄청 놀랐나 보네.’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다간 그대로 목숨을 뺏길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괴식가가 주방장을 재촉합니다.]
[주방장이 달군 팬 위에 아스파라거스를 황급히 올립니다.]
상태창이 뜨자 놀랐던 모두의 얼굴이 다시 진지하게 바뀌었다. 금세 전투태세로 돌아온 것이다.
쾅!!
괴식가의 머리 위에 서있던 세빈이가 맹렬한 속도로 녀석의 손목을 향해 돌진해 그것을 가로로 베었다.
[‘내 손, 내 손!!’]
[괴식가는 오른손잡이입니다.]
[괴식가가 나이프질을 제대로 할 수 없음에 통탄스러워합니다.]
퍼버벙!!
그 후엔 시퍼런 불길이 왼쪽 손과 팔을 불태웠고, 연둣빛 화살비가 녀석의 몸 전체에 바람구멍을 냈다.
<■재 상태>
<내장■ 텅 ■어버려 예■해진 ■태다.>
<남은 ■■ : 361,■■1>
[주방장이 연어스테이크를 갖고 나옵니다.]
“메인 요리가 결국 나왔네요.”
차도윤 헌터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우리도 서서히 체력이 떨어지고 있으니 빨리 해치우는 게 좋긴 했다.
“그래도 지금처럼 최민 헌터가 음식을 봉쇄하면…….”
[주방장이 괴식가의 모습을 보며 경악합니다.]
[주방장은 괴식가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음?’
그런데 예상과 다른 상태창이 떴다.
[주방장이 다시 음식을 갖고 들어갑니다.]
[‘…내 음식은?’]
괴식가는 테이블 위에 얼굴을 비비는 동시에 팔로 자신의 텅 빈 배를 더듬었다.
[‘내음식은내음식은내음식은내음식은!!’]
콰과광!!
“큿!”
“다들 조심하세요오!”
괴식가가 테이블을 뒤집어엎자 굉음과 함께 테이블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식가가 폭주하여 레스토랑 안을 마구 뛰어다닙니다.]
쿠구궁.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네.’
앉아있을 때도 내 키의 수십 배는 되어 보였는데 일어서니까 거의 3층짜리 건물만 했다. 괴식가는 엉망이 된 제 얼굴을 옷소매로 가린 채 주방과 연결된 바 테이블을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주방장이 주방을 걸어 잠급니다.]
[주방장과 그의 직원들이 두려워합니다.]
덜컹, 덜컹.
아무리 괴식가가 머리를 박아대도 주방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손님을 내쳐버린 게 어이없지만 괴식가의 지금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녀석은 너덜거리는 팔로 문고리를 잡아 흔들기 시작했다.
쾅!!
괴식가의 커다란 그림자에서 굵직한 손이 튀어나와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녀석이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새하얀 손등 위로 도드라진 뼈가 당장이라도 피부를 뚫고 나올 것처럼 불룩거렸다.
“갑시다!”
탕!
녀석의 손목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뒤쪽에서도 바람 화살이 날아왔다. 두 발사체가 동시에 녀석의 손목을 끊어놓았다.
‘행운의 토끼발에 탔군.’
괴식가가 테이블을 뒤엎는 바람에 차도윤 헌터의 공격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다행히 ‘행운의 토끼발’에 올라타 안정적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쿠웅.
녀석의 몸이 결국 바닥에 박혔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녀석의 몸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처음에 미식가라는 이름을 가졌던 게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한 모습이었다.
<■■ 상■>
<죽■ 싶■ 않다.>
<남■ 체력 : 32■, ■■■>
투쾅!!
괴식가는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듯 자신의 얼굴을 메꾸는 데 썼던 줄기들을 사방으로 뿜어냈다.
“후웁……!”
내 쪽으로 날아온 줄기를 자아로 터트려버린 후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사실상 저 녀석은 지금 버티는 게 전부다. 줄기 공격만 피하면 크게 위험할 건 없다.
달칵.
[주방장이 레스토랑의 방범 장치를 가동합니다.]
“뭐?”
상태창이 사라지자마자 갑자기 테이블과 진열장들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쨍그랑!
“다들 조심하세요! 사물들이 날아옵니, 윽……!”
“차도윤 헌터!”
커다란 티스푼이 행운의 토끼발을 향해 날아왔다. 한진우 헌터가 빠르게 지면을 향해 하강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두 사람이 크게 부상을 입을 뻔했다.
‘괴식가보다 레스토랑이 더 난리네!’
타앙!!
식기들이 잔뜩 든 진열장들의 다리부터 부쉈다. 저 거대한 나이프와 포크들이 날아다니면 난도가 엄청 올라갈 테니까.
쿵, 쿵, 쿵.
진열장들이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엎어졌다.
아우우!
파바박.
진열장에서 빠져나온 몇 개의 나이프는 녹두의 하울링으로 전부 밀어버렸다. 힘을 잃은 나이프가 방향을 바꾸어 괴식가의 몸 쪽으로 떨어졌다.
“지의야!”
“읏?!”
콰그작!
잠깐 방심한 사이 누군가 내 몸을 낚아챘다. 흔들리는 시야 속 초록색 줄기에 묶인 테이블이 세빈이의 검에 의해 파괴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가, 감사합니다.”
최민 헌터는 내 허리를 놓아준 후 다시 괴식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시뻘건 불이 되어 운석처럼 녀석을 향해 하강했다.
쾅!
최민 헌터의 무릎이 녀석의 가슴을 뚫어놓았다.
<현■ ■■>
<아■다.>
<남■ ■력 : 2■1,■■9>
‘이번 공격으로 전부 끝낸다……!’
구원자의 무기 창고를 열어 박격포를 잡았다.
쿵!
박격포의 무게 때문에 괴식가 바로 앞에 착지했다.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꽃다발이 나를 응시했다.
“다들 공격 준비하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용]
콱!
괴식가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검은 손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녀석의 몸을 더욱 강하게 옥죄었고 땅속으로 묻어버릴 것처럼 끌어당겼다.
<현■ ■■>
<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
<남■ ■력 : 20■,■■2>
파바박.
이번엔 바람 화살이었다. 녀석의 몸을 과녁 삼아 수십 개의 화살이 그 거대한 몸에 박혔다.
<현■ ■■>
<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
<남■ ■력 : 17■,7■4>
펑!!
모든 생명체를 태워버릴 듯한 지옥불이 녀석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현■ ■■>
<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죽고■지■아>
<남■ ■력 : 15■,9■2>
고통스러운 듯 몸을 움찔거렸지만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끝내자.’
철컥.
박격포 형태의 자아에 손을 댔다.
“발사.”
퍼엉!!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진동했다. 새하얀 포탄이 괴식가의 몸을 찢었다. 그러자 사방으로 꽃잎들이 날아다녔다. 우리를 집어삼키려던, 우리의 악몽을 맛보려던 교양 없는 존재의 죽음이라 하기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괴식가가 더 이상 맛있는 걸 먹을 수 없음에 통탄스러워합니다.]
[괴식가가 자신의 신세에 대해 생각합니다.]
<현재 상태>
<죽었다.>
<남은 체력 : 0>
“하아, 하아, 후욱…….”
숨을 몰아쉬며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상태창은 녀석이 죽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해, 해냈어요!!”
한진우 헌터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상황이 파악됐다.
‘정말로 이겼어……!’
“와아아악!”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소리를 질렀다. 한진우 헌터와 손을 맞잡고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세빈이도 밝게 미소 지으며 내게 다가왔고, 차도윤 헌터와 최민 헌터도 먼발치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니이!’
“녹두야!”
녹두도 내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파묻고 승리의 기쁨을 즐겼다.
후드득.
‘어, 언니. 울어?’
결국 꾹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그 누구도 죽지 않고 창조자의 파편을 파괴했다. 악몽 속을 헤매고 트라우마에 질식했어도, 우린 지금 살아남았다. 이 악몽을 만든 창조자에게 보란 듯이 승리했다.
[레스토랑 폐점 시간까지 5초]
쨍그랑.
레스토랑 전체에 커다란 금이 갔다. 녹두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폐점 시간이 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0초]
[금일 영업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영업일은 없습니다.]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고, 검푸른 글자만이 일렁거렸다.
[뒤틀린 존재들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평온해집니다.]
[무너졌던 질서가 올바르게 돌아갑니다.]
[편집된 시간선이 영원히 소멸합니다.]
[감지된 생명체의 수 : 5]
파지직.
그때 우리의 앞에 검푸른 보석이 나타났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동그란 보석, 난 이걸 알고 있다.
‘창조자의 파편.’
녀석의 파편 주위로 스파크가 일었다. 모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고 그것을 노려볼 때쯤.
쨍그랑!
[미식가의 파편]
[누군가의 악몽을 맛보고 싶었던 미식가의 욕망이다.]
[미식가의 파편이 파괴되었습니다.]
파편이 파괴되었다는 상태창이 떴다. 그제야 모두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키이잉.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90%]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각성자의 업을 파괴해야 합니다.]
‘아직 내겐 과제가 남았지만 말야.’
탈그락.
“아.”
발이 땅에 닿는 동시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강물과 끝없이 뻗은 자갈밭, 그리고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어, 어어, 어어어……?!”
사람들 중 한 명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입을 쩍 벌리며 들고 있던 상자를 놓쳤다.
“도, 돌아왔어요!!”
그 사람의 외침과 함께 멍해졌던 내 정신도 같이 돌아왔다.
‘파편 밖으로 나왔구나.’
뒤를 도니 우리가 열고 들어온 게이트는 먼지가 되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다들 무사해?!”
“하미준 헌터!”
그때 하미준 헌터가 자갈밭을 가로질러 우리에게 단숨에 달려왔다. 늘 완벽하게 세팅되어 있던 머리도 헝클어지고 셔츠도 이리저리 구겨진 걸 보니, 아무래도 밖에서 고생깨나 한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를 천천히 살피며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아… 진짜 다행이다.”
“저희 얼마나 오래 있었어요?”
“2주 정도. 생각보다 너무 길었어.”
한진우 헌터의 물음에 하미준 헌터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파편 속은 시간 왜곡 현상이 더 큰가 보네.’
“그나저나 어떤 던전이었어? 경계?”
“말하자면 길어요. 나중에 공유 드릴게요.”
세빈이가 대답을 한 뒤 기력 회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꽤 지쳐 보이는 얼굴이다.
“아.”
하미준 헌터의 어깨 너머로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세상의 멸망을 부추긴 인물, 김강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은근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고 보석을 박은 듯한 푸른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욱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생존한 것에 대한 안도나 기쁨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흥미…….’
그는 이 상황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꼭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그 얼굴을 보고 있으니 여러 사건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하나의 그림을 만들기 시작했다.
창조자와 사도 계약을 맺었는지 알 수 없지만, 김강희는 확실하게 창조자의 사람이다. 던전을 마음대로 꺼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파편을 부수어 게이트를 바꿔치기한 것도 그였다. 그리고 그 파편 내부로 들어갈 파견 팀을 구성한 것도 그…….
‘아, 젠장…….’
결론은 금방 났다.
그는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을 일부러 파편 안으로 들여보낸 것이다.
‘파편 안에서 전부 죽일 셈이었나?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를 시험해 보려 한 건가?’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네.”
그때 김강희가 우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회장님……!”
차도윤 헌터가 수줍은 듯 미소를 띠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자네들이 살아 돌아올 거란 건 알 수 있었지만 솔직히 좀 불안했거든.”
“…….”
“요즘 천명의 정확도가 좀 떨어지는 것 같아서 말일세.”
그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각성 사실을 처음 알렸을 때, 그는 헌터 협회장으로서 순수하게 기뻐했다. 그리고 그건 지난 시간선에서 내가 각성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지금 나를 향한 그의 시선은 조금 달라졌다. 그가 파편 속에서의 내 행동을 지켜봤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 확실했다.
“이 던전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어. 도움을 줬으면 좋겠네.”
김강희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도 김강희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마지막에도 그 얼굴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