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12화 (112/366)

112화

[괴식가]

[식사 예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교양 없는 존재]

“괴식가……?”

아까까지 미식가였던 글자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사실 미식가든 괴식가든, 우리에게 절대 우호적인 존재는 아닐 것이다.

“테이블 위군요.”

차도윤 헌터가 유리 기둥을 손으로 툭 건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다시 보니 유리 기둥이 아니라 와인잔의 손잡이 부분이었다. 발밑에 있는 붉은 카펫은 식탁보,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은색 날붙이는 식사용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숟가락이었다.

접시 위에 올라가지 않았을 뿐이지 테이블에 올라온 건 마찬가지다.

<현■ 상태>

<애■타이■로 수프를 골■다.>

<남은 체■ : 1,00■,■■■>

그때 모두의 앞에 똑같은 상태창이 떴다. 깨진 글씨 탓에 눈에 잘 들어오진 않았지만 마지막 줄만큼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체력이 백만……?”

“백만이요?!”

한진우 헌터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백만, 현실감 없는 수치이긴 했다.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네요.”

세빈이는 그 말과 함께 영을 꺼냈고,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녹두야, 너도 다른 사람들 도와서 공격 좀 넣어줘.”

‘당연하지!’

녹두도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제법 매서운 눈으로 괴식가를 바라보았다. 난 자아를 손에 쥐고 유리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괴식가가 커다란 입으로 숨을 내쉴 때마다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달큼한 향기가 났고 꽃잎들이 팔랑거리며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덜그럭.

꽃잎 중 하나가 테이블에 닿자마자 갑자기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노란색 수프가 담긴 접시가 되었다. 방금 만들었는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주방장이 괴식가에게 단호박수프를 가져다줍니다.]

[15분 후 샐러드를 가져오겠다고 말을 덧붙입니다.]

[괴식가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립니다.]

괴식가는 고개를 숙여 단호박수프를 빤히 바라보았고 한 손으론 숟가락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식사 예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교양 없는 존재]

녀석의 머리 위에 떠있는 글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접시에 코를 박고 짐승처럼 먹을 것 같았다.

누구 하나 괴식가를 섣불리 공격하지 못할 때쯤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높이 쳐들었다.

쾅!!

그러곤 수프 그릇에 머리를 박았다.

후드득.

끈적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기 시작했다. 실드를 펼치자마자 수프가 내 위로 쏟아졌고 새하얀 방패가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녹아갔다.

“윽, 모두 조심해요!”

실드를 버리고 재빨리 위쪽으로 도약했다. 수프로 젖은 식탁보가 새까맣게 타들어갔지만 괴식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머리를 박아댔다.

퍼버벙!!

시뻘건 불길이 꽃다발을 집어삼켰다. 불기둥이 회오리치며 하늘로 치솟자 괴식가의 머리는 어느새 거대한 횃불이 되었다.

[‘그■지, ■시 ■식은 ■맛이지.’]

[괴■■가 불■ 찾습니■.]

괴식가기 활활 타는 자신의 머리를 수프에 담갔다.

투쾅!!

그러자 수프가 용암처럼 부글거리더니 이내 화산이 폭발하듯 그릇에서 뿜어져 나왔다.

‘젠장, 틈이 안 생겨……!’

공격을 피하는 게 고작이었다. 수프 기둥을 피해도 안개비처럼 튀는 액체 때문에 피부 전체가 타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차도윤 헌터!”

“알겠어요!”

쾅!!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그는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챘다. 차도윤 헌터는 ‘천재지변’을 시전해 폭풍으로 수프의 잔해를 전부 밀어버린 후 괴식가의 머리에 벼락을 꽂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콰직!

작살총으로 바꾼 자아를 녀석의 어깨에 박았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 녀석과 거리를 좁혔다.

‘구원자의 무기 창고.’

파아앗.

인벤토리와 비슷한 형태의 창고가 눈앞에 떴다. 내가 그동안 썼던 무기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지금은 이걸로 한 방 먹여볼까.’

박격포보다는 파괴력이 약하지만 휴대성이 좋은 형태, 바주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팔에서 느껴졌다.

괴식가의 어깨에 박았던 작살은 사라졌지만 내 몸은 반동 때문에 계속해서 앞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빠르게 바뀌는 풍경 속, 녀석의 뒤통수에 달린 붉은 리본을 정확히 조준했다.

펑!!

그리고 굵직한 포탄이 녀석의 머리를 관통했다.

“큿……!”

이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공격이었다. 아군에게는 영향이 없는 스킬이지만 공기의 떨림까지는 제어할 수 없어서 모두의 움직임이 살짝 둔해졌다.

파사삭.

붉은 리본이 힘없이 부스러지고 흰 포장지 밑으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하지만 녀석은 계속해서 수프 그릇에 얼굴을 박은 채 미친 듯이 먹기만 할 뿐이었다.

<■재 상태>

<■프를 맛■게 먹고 ■는 ■이다.>

<남은 ■력 : 7■■,■36>

“30만이나 깎았어요!”

한진우 헌터가 외쳤다. 아예 방어 의지가 없는 녀석이라 이대로 굵직한 공격만 꽂아 넣으면 쉽게 해결될 것 같기도 하다.

쾅, 쾅, 쾅!

그때였다. 괴식가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숟가락을 쥐고는 자신이 테이블 위에 흘렸던 수프를 미친 듯이 내려찍기 시작했다.

‘교양 없는 존재라더니 정말로 이름값 하네.’

테이블에 있던 세빈이가 후추통 뒤로 몸을 숨기더니 녀석의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손을 뽑아냈다.

“움직임을 봉쇄하겠습니다. 공격 준비해 주세요!”

콰드드득.

세빈이가 허공을 움켜쥐자 녀석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손들이 녀석의 머리를 잡아 테이블 쪽으로 끌어내렸다. 괴식가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테이블에 완전히 엎어졌다.

피잉―

이번엔 옅은 연둣빛을 띤 화살이 괴식가의 머리 위를 향해 힘차게 날아갔다. 화살은 순간 사라지더니 이내 수십 갈래로 찢어져 괴식가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타다다닥.

갈라진 화살들이 괴식가의 재킷 소매, 장갑 끝, 꽃다발 포장지의 끄트머리를 관통해 그대로 테이블 위로 박혔다. 덕분에 괴식가는 코르크보드에 꽂힌 메모지처럼 테이블에 완전히 박제되었다.

꽃다발 뒤통수를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힘차게 당겼다. 녀석의 머리만큼이나 큰 소리 탄환이 꽃들을 집어삼켰다.

퍼엉!

이 기괴한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형형색색의 꽃잎이 공중을 어지러이 날아다녔고 고소한 호박 냄새와 꽃향기가 섞인 기묘한 공기가 퍼져 나갔다.

푹.

떨어지는 꽃잎 사이로 연갈색의 트렌치코트 자락이 펄럭이더니, 얼마 안 있어 새카만 도신(刀身)이 괴식가의 척추를 꿰뚫었다.

“후.”

세빈이가 손목을 돌려 영을 빼내자 이번엔 투명한 액체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괴식가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녀석이 일어나 제 몸을 고정시킨 화살을 빼내려 했지만 커다란 모래성이 몸을 집어삼키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퍼버버벙!!

괴식가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가기 무섭게 벌어진 척추 틈으로 폭발이 일었다. 그것으론 모자랐는지 공중에 날아다니는 꽃잎까지 전부 태워버렸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녀석의 머리가 불길에 휩싸였고, 타닥거리며 꽃이 타는 소리만이 이 공간에 조용히 퍼졌다.

“체력이 얼마나 깎였는지 좀 기대되네요.”

차도윤 헌터가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감정에 솔직해졌다니까.’

잠깐 숨을 돌리며 녀석이 불에 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리저리 구겨지고 수프로 엉망이 된 식탁보보다 괴식가의 몸이 더 너덜너덜했다. 세빈이가 갈라놓은 등에선 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꽃다발 머리는 이미 검은 재가 되었다. 사실상 전투 불능 상태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치지직―

<현■ ■태>

<수■를 다 먹■다.>

<■은 체력 : 1,■■0, 000>

“회, 복됐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공격의 연속이었는데, 녀석은 보란 듯이 완전히 회복했다.

입으로 자아에 목소리를 집어넣으며 녀석의 몸을 살폈다.

콰드득.

괴식가의 갈라진 척추에서 초록색 줄기가 튀어나왔다. 줄기가 바늘에 끼운 실처럼 지그재그로 이동하며 괴식가의 척추를 연결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물이 줄줄 흐르던 녀석의 등이 말끔해졌다.

빈 수프 그릇과 회복된 체력. 직관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음식을 먹으면 회복하는 것 같아요.”

“저 수프 때문에 회복됐나 봅니다.”

최민 헌터와 내가 거의 동시에 말을 뱉었다. 그가 나를 슬쩍 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15분 후에 다음 요리를 가져다준다고 했죠?”

세빈이의 말에 모두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듣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세빈이가 손가락으로 영의 칼등을 두드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음식을 못 먹게 하면서 쟤를 공격해 보죠.”

“알겠습니다!”

투두둑.

한진우 헌터의 힘찬 대답과 함께 뼈가 맞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테이블에 처박혔던 괴식가가 허리를 곧게 폈다. 재가 됐던 머리도 어느새 싱그러운 꽃다발이 되었고 내가 끊어냈던 붉은 리본 장식도 얌전히 묶여 있었다.

[주방장이 카프레제샐러드를 갖고 나옵니다.]

다음 요리가 왔구나.

테이블 위의 수프 얼룩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커다란 접시가 되었고, 그 위로 동그랗게 썬 토마토와 치즈가 떨어졌다.

[주방장은 20분 후에 메인 요리를 갖고 올 거라고 말합니다.]

[주방장이 발사믹드레싱을 건넵니다.]

[괴식가는 고개를 저으며 딸기잼을 요청합니다.]

‘정말로 괴식가군.’

상상이 가지 않는 맛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달그락.

괴식가가 식사 준비를 마쳤는지 양손에 포크를 쥐었다.

쿵, 쿵, 쿵.

녀석이 포크를 든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소란을 피웠다.

‘아예 지금 접시를 엎어버려?’

하지만 테이블에 흘린 것도 핥아 먹는 녀석이기 때문에 떨어지거나 산산조각을 내도 어떻게든 입에 넣을 것이다.

괴식가가 커다란 입을 벌리며 포크를 높게 들었다.

콰과광!!

“윽……!”

그때였다. 귀를 찢는 폭발음과 함께 테이블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내 샐러드가 어딜 간 거야?’]

[괴식가가 당황합니다.]

괴식가의 말을 듣고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샐러드가 담긴 접시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불꽃에 감싸져 있었다.

샐러드 자체를 가둬버린 장본인인 최민 헌터가 유유히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입을 열었다.

“20분 안에 끝내 봅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