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09화 (109/366)
  • 109화

    새하얀 구체가 최민 헌터 앞에 섰다.

    콰드득.

    그러더니 꾸물거리며 몸을 키우기 시작했다. 밑으로 네 개의 다리가 튀어나오고 위쪽으론 머리 같은 것이 동그랗게 솟아났다. 머리의 양옆엔 둘둘 말린 뿔까지 생겨났다.

    ‘익숙해.’

    빛이 어떤 동물의 형체에 가까워질수록 불쾌한 감각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균형과 질서를 담당하는 존재.”

    파아앗.

    형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을 질끈 감고 잠시 고개를 돌리자 빛은 금방 사라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새하얗다 못해 투명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털을 가진 양이 서있었다.

    “조율자입니다.”

    쿵.

    그의 말을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조율자를 바라보았다.

    ‘저 자식에 관한 건 잊을 수가 없지.’

    회귀 횟수가 50번을 넘어간 이후, 각성 때처럼 정체불명의 던전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몬스터들을 해치운 후 협회에 구조 요청을 하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낸 순간.

    커다란 뿔이 내 몸을 꿰뚫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그대로 쓰러졌고, ‘말의 힘’ 상태창을 보자마자 내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곤 상태창 너머로 새하얀 눈동자를 가진 양과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엔 숨어있던 몬스터인가 했지만 ‘당신 때문에 제 사도가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서 곤란합니다.’라는 말을 해서 녀석이 조율자임을 확신했다.

    ‘최민 헌터가 자기 뜻대로 안 움직여주니까 내게 화풀이를 한 거겠지.’

    까득.

    이가 마찰돼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녀석에 대한 분노는 잠시 접어두고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조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절대자의 존재를 의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조율자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최민 헌터의 시선을 받아주다, 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

    “제 존재가 낯설겠죠. 그냥 이 세상의 신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신……?”

    “네.”

    “드디어 죽었나 보네. 날 데리러 온 건가?”

    최민 헌터의 입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에서 기묘한 해방감이 느껴져 가슴 한켠이 저렸다.

    “아니요. 당신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그 미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조율자는 발굽으로 땅을 고르더니 그 자리에 다리를 접고 엎드렸다.

    “네가 진짜 신이라면 하나만 물어보자.”

    “물어보시죠.”

    “왜 하필 날 그때 각성시킨 거냐?”

    최민 헌터가 눈을 부릅뜨고 조율자를 노려보았다. 눈꺼풀을 드는 것도 힘들어 보였지만 그는 어떻게든 눈에 힘을 주어 버텼다.

    “당신을 각성시킨 건 제가 아니라 당신입니다. 이미 당신에게 잠재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하. 이런…….”

    최민 헌터는 낮게 욕을 지껄이더니 눈을 감았다. 조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목숨의 위협을 받아 생존 욕구가 극에 달했을 때 각성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난 그 와중에도 혼자 살고 싶었던 거였네.”

    죄책감, 후회, 절망. 그 모든 것들이 최민 헌터의 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넌 나한테 왜 온 거냐?”

    “시간의 흐름을 거스른 인간이 있어 찾아와 봤습니다.”

    조율자가 접었던 다리를 펴고 다시 똑바로 섰다.

    “매듭이 끊긴 인간이라……. 역시 흥미롭군요.”

    “구경거리로 삼을 생각이면 얼른 꺼져.”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조율자의 몸에서 새하얀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최민 헌터를 감쌌다. 뼈밖에 없던 몸에 천천히 살이 붙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했던 숨이 고르게 변했다.

    최민 헌터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켰고 자신의 몸과 조율자를 번갈아 보았다.

    “당신을 제 사도로 삼겠습니다.”

    “…뭐?”

    “제 사도가 되어 세상의 유지를 위해 힘써 주세요.”

    난데없는 요구에 최민 헌터가 얼굴을 찌푸렸다.

    퍼버벙.

    그러고는 조율자를 향해 불꽃을 날렸다. 하지만 불꽃은 그를 그대로 통과해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게이트의 등장과 함께 세상은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조자라고 하는 다른 절대자 때문에 그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죠.”

    조율자는 최민 헌터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창조자도 사도를 이용해서 세상을 멸망시킬 계획을…….”

    “난 세상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어. 아니, 오히려 망하길 바라고 있어.”

    최민 헌터는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했다. 둘 사이에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그건 곤란합니다. 세상의 유지가 제 존재 이유의 전부니까요.”

    “내 존재 이유는 아니지.”

    “흠. 그럼 조건을 하나 걸죠.”

    조율자의 뒤쪽으로 동그란 후광이 생겼다. 그의 눈은 아까보다 더욱 새하얗게 빛났고 윤기 나는 털도 별을 박아 넣은 양 은근히 반짝였다. 최민 헌터는 그 모습을 따분한 듯이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제 사도가 된다면 전 당신의 소원 하나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소원?”

    “네.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건 불가능하지만요.”

    ‘계약 장면이다.’

    최민 헌터는 조율자의 말을 듣고 턱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눈을 내리깔고 한참 고민했다.

    ―가족들을 살릴 수 없다면 난 뭘 빌 수 있을까.

    혼란스러워하는 최민 헌터의 내면이 귀에 흘러들어 왔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죽여달라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 소원은 안 들어주겠지.

    “최민 헌터…….”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지만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깊이 팬 미간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아, 그래. 그걸로 빌면 되겠네.

    최민 헌터의 눈이 단번에 떠졌다. 검은 눈동자엔 전에 보지 못했던 총기가 깃들어 있었고 고통과 고뇌에 억눌렸던 내면의 소리도 한결 후련하게 들렸다.

    최민 헌터가 고개를 들어 조율자를 바라보았다. 조율자는 그의 얼굴을 보고 약간 놀랐는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소원을 정했나 보군요.”

    “어. 무조건 지켜.”

    “알겠습니다.”

    최민 헌터가 길게 심호흡을 한 후 입을 뗐다.

    “내가 죽는 그날까지,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뭐……?”

    대답을 한 건 조율자가 아닌 나였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길 바랐다. 최민 헌터가 말실수를 한 거라고, 말이 헛 나온 것이길 바랐다.

    하지만 의지로 가득 찬 최민 헌터의 얼굴을 보고 그건 내 무의미한 바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죄책감이라는 족쇄를 채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죄책감? 계속해서 트라우마를 갖게 만들라는 겁니까?”

    “어. 그 어떤 행복도, 만족도, 기쁨도 전혀 못 느끼게 해.”

    ―가족을 죽게 한 인간에겐 살아있는 것도 죄니까.

    빌어선 안 되는 소원을 빌었다. 스스로를 갉아먹고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소원을 말했다.

    최민 헌터가 자기 자신을 ‘애초에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도, 내가 자기를 대신해서 공격을 맞았을 때 자신을 비하했던 것도 전부 이 미친 소원의 영향이었던 것이다.

    “참 이상하군요.”

    조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최민 헌터의 바로 앞에 섰다.

    “뭐, 알겠습니다. 당신의 그 소원,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안 돼!”

    휘이잉―

    엄청난 바람이 방공호 안을 휘저었다. 새하얀 빛줄기가 최민 헌터의 몸을 관통했고, 그는 피를 뱉으며 휘청거렸다. 조율자가 발을 들어 빛줄기를 쭉 밀자 최민 헌터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시간의 이탈자 최민, 당신은 지금부터 제 사도입니다. 절대자인 제게는 당신의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있으며, 사도인 당신에겐 제 명령을 따를 의무가 있습니다.”

    “컥……! 윽, 허억……!”

    “저는 당신의 소원에 따라 행복과 관련된 모든 감정을 차단하겠습니다. 당신은 제 명령에 따라 창조자의 사도를 찾아내 없애십시오.”

    악몽 속의 조율자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숨겼고, 방공호 안엔 고통에 몸부림치는 최민 헌터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만이 남았다.

    쿵!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 버티던 그가 결국 무릎을 꿇으며 땅에 머리를 박았고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커, 흑, 어윽……!”

    “최민 헌터, 정신 차려요!”

    방공호가 사라질 것처럼 크게 흔들렸고,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최민 헌터의 어깨를 움켜쥐려 손을 뻗었다.

    “윽!”

    뜨거운 쇳덩이를 만진 양 또다시 손바닥이 빨갛게 익었다. 하지만 고작 손바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최민 헌터를 이 악몽 속에서 끌어내지 않으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치이익―

    아이테르의 로브를 믿고 최민 헌터의 몸을 끌어 그의 머리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여긴 최민 헌터의 악몽 속이에요!”

    “너, 넌 아까부터… 자꾸…….”

    “정신을 차리고 최민 헌터가 누구인지 생각해 봐요!”

    최민 헌터의 초점이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지 못한 듯 그는 결국 눈을 감아버렸다.

    짝.

    “그럼 제가 누구인지라도 기억해 내봐요! 제가 던전에 빠졌을 때 당신이 절 구하러 왔어요!”

    “내…가?”

    그의 양 볼에 손을 올리고 나를 보게 만들었다. 누군가 손바닥을 수천 개의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브의 효과로 어느 정도 치료가 되곤 있었지만 그의 몸이 내 손을 태워버리는 게 더 빨랐다.

    최민 헌터는 겨우 눈을 떠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얼굴을 구겼다.

    “내가 누군가를 구했을 리가 없잖아……!”

    “구했어요! 한 번도 아니고 백 번을!”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숨을 턱 막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최대한 버텨내며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었다.

    “당신은 동료를 위해 몸을 내던질 줄 아는 사람이에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그러니까 제발 정신을……!”

    콰과광!

    마지막으로 본 건 시퍼런 불길이 나를 집어삼키는 풍경이었다. 열기가 폐부에 가득 들어차 숨을 막고, 온몸은 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쓰렸다. 목에선 제대로 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거라곤 일렁거리는 파란 불꽃뿐이었다.

    ‘젠장, 이러다 진짜로 죽거나 악몽 속에서 내쫓기거나, 둘 중 하나야.’

    ―내가 어떤 사람이냐니. 가족도 못 구하고,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친 죄인이잖아. 그런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을 자격이 있나? 이 세상에서 행복해질 자격이 있나?

    [발언 결과 : 절망]

    최민 헌터는 여전히 스스로를 향해 난도질을 하고 있었다.

    놀이터 앞에서 지유의 죽음을 알게 된 어린 나와 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죄책감에 짓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그 모습이.

    야속하게도 죄책감은 언젠가 무뎌지기 마련이다. 결국 그 감정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게 되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지유에 대한 죄책감을 이겨내려고 한 것처럼.’

    “최, 민 헌터의… 잘못이 아니란 걸, 컥, 알잖아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입가에 자아를 가져와 불길 저 너머에 있는 최민 헌터를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내 목소리가 그에게 닿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고, 입을 열 때마다 폐를 태워버릴 듯한 공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말하는 걸 멈출 순 없었다.

    “무뎌져도 괜, 찮아요! 남은 사람들은, 윽, 남은 사람의 인생, 을 살아도… 돼요……!”

    [발언 결과 : 혼란]

    이제 눈도 뜨기 힘들었다. 눈을 감은 채로 목과 자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엔 제가, 최민 헌터를, 구해줄게요……!”

    ―구해줘? 나를……? 도대체 왜?

    “당신은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니까!!”

    [각성자 ‘최민’의 ‘절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의 씨앗 개화]

    [각성자 ‘최민’은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사명>

    [사령탑]

    [‘말의 씨앗’을 개화시켜 동료로 만들어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68%]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88%]

    ‘됐다……!’

    말의 씨앗이 개화했다는 건 자각의 탄환을 쓸 수 있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 탄환으로 이게 악몽인 걸 자각하게 만들면……!

    치지직.

    [파괴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카르마 : 죄인(罪人)]

    [절대자 ‘조율자’가 각성자 ‘최민’에게 씌운 죄인의 업]

    [카르마의 탄환으로 파괴 가능]

    그때 황금색 톱니바퀴 세 개와 함께 처음 보는 상태창이 떴다.

    ‘이 업이 혹시 조율자와의 계약인가?’

    평생 죄책감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최민 헌터의 바람대로, 그에겐 죄인의 업이 있었다.

    [카르마의 탄환]

    [각성자에게 씌워진 업을 파괴할 수 있다.]

    [파괴 시 업으로 인한 모든 효과가 사라진다.]

    [*말의 씨앗이 개화한 상대에게만 사용 가능]

    새로운 상태창이 떴다.

    ‘카르마의 탄환’, 모든 기억을 되찾은 후 수십 명의 ‘나’에게 받은 탄환이었다. 네 줄뿐인 설명이었지만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철컥.

    ‘카르마의 탄환으로 최민 헌터의 업을 파괴시키는 것.’

    삐이이이이―

    그의 불 속에 너무 오래 있어서일까. 귀를 찢을 듯한 이명이 들리고 몸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민 헌터가 있을 방향을 향해 자아를 들었고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그 죄책감은 내려놓으세요.”

    탕!!

    손에서 엄청난 진동이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시퍼런 불꽃을 뚫고 앞으로 날아가는 탄환이 보였다.

    [카르마 : 죄인(罪人)이 파괴되었습니다.]

    [각성자 ‘최민’이 절대자 ‘조율자’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내 의식은 그대로 멀리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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