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108화 (108/366)

108화

삐이이이이―

“으으으…….”

이명이 일었다. 눈앞은 새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후끈한 기운이 피부에 닿았다.

‘수라의 무(舞)’가 개방된 이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손을 뻗어 앞을 휘저어 봐도 풀과 나무가 손끝에 닿는 느낌만 날 뿐이었다.

‘설마 최민 헌터도 이때의 기억이 없는 건가?’

지금까지 모든 상황이 선명하게 그려졌는데 이 부분만 이렇게 희미한 걸 보면, 최민 헌터의 이성이 끊어진 상태 같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릴 때마다 손 위로 뜨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쏟아졌다.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읏.”

순식간에 내 눈을 가렸던 빛은 사라졌고, 폐허가 된 가평 일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와 과열된 감정을 식혀주는 차가운 비였다. 최민 헌터는 내 앞에 서서 가만히 그 비를 맞고 있었다. 그의 주위엔 몬스터의 파편처럼 보이는 정체불명의 핏덩이들이 널려있었다. 그는 공허한 눈으로 그것들을 내려다보다 발로 짓눌렀다.

“각성…하신 것 같군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푸른 눈을 가진 여자가 한껏 경계하는 눈으로 최민 헌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눈매와 얇게 자리한 쌍꺼풀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아있었다.

‘…아, 그 인간이군.’

미등록 각성자들과의 전쟁을 정리한 후, 헌터 협회장이 된 젊은 김강희였다. 그는 상황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굴렸다.

피를 뒤집어쓴 최민 헌터의 얼굴에서 그의 발 언저리에 있는 몬스터의 시체로, 그리고 찌그러진 차와 중년 남자의 시체로. 김강희는 대충 상황 파악을 끝냈는지 눈을 꽤 길게 감았고, 이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구급차에 타시죠. 선생님껜 나중에 저희가 연락하겠습니다.”

“…그냥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 주세요.”

“네?”

최민 헌터는 고개를 돌려 산산조각 난 자동차를 바라보았다.

―엄마랑 혁이를 저 차 안에 두지 않았다면 목숨은 건졌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해 봐도 소용은 없지만.

이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최민 헌터는 고개를 내려 손에서 불꽃을 피워냈다. 김강희가 그것을 바라보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불 속성, S급 방어계 스킬입니다. 이름은 방공호.”

“S급이라고요?”

김강희의 음성에서 경이로움이 묻어 나왔지만 그는 금방 목소리를 낮추며 본인의 감정을 억눌렀다. 최민 헌터가 주먹을 쥐자 불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다시 김강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헌터로 등록을 하든 말든 상관은 없어요. 근데 그냥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 주세요.”

최민 헌터는 비척비척 어딘가로 걸어갔다. 김강희도 그를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점점 멀어져 가는 등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회장님, 대피 작업 및 시신 수습이 끝났습니다.”

“…알겠어요. 일단 상위 헌터들을 전부 불러서 게이트 탐색 작업을 진행시키죠.”

웅웅웅―

미식가의 포크가 최민 헌터 쪽으로 날아갔다. 그것의 뒤를 쫓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걷는 최민 헌터가 있었다. 그는 독 안개와 시커먼 연기를 뚫고 하염없이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계속 옮겼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새빨간 발자국이 남았다.

―죽자. 내 손으로 죽자. 속죄할 길은 이것뿐이야.

최민 헌터가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공터였다. 옆에 역겨운 폐수가 흐르는 그 장소는 누구 하나 죽어도 아무도 모를 만큼 외진 곳이었다.

파르륵.

새빨간 불길이 최민 헌터의 손을 집어삼키더니 이내 몸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던 최민 헌터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느새 최민 헌터는 거대한 불꽃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왜……?”

불꽃이 지면에 있던 나무 조각을 태우는 소리를 비집고 최민 헌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나는 불타지 않지? 그 큰 몬스터도 죽인 불인데?”

모든 것을 불태우는 지옥불이 최민 헌터만큼은 삼키지 못했다. 시뻘건 불길 속에서 온전히 자신의 형체를 유지하는 최민 헌터가, 오히려 불꽃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불에 대한 주도권은 온전히 최민 헌터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하하하!!”

웃음의 끝이 절규로 끝나지 않았다. 최민 헌터는 정말로 이 상황이 재밌다는 양 한참을 웃어댔다.

퍼엉!!

최민 헌터를 에워싸던 불꽃이 갑자기 영역을 넓히더니 방공호가 되었다.

―외부 공격을 막는 공간이라고 했지. 그럼 안에서 죽어가는 건 막을 수 없을 거야. 여기가 내가 죽을 곳이자, 관이다.

최민 헌터는 위를 보며 누웠고 그대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가 방공호를 관이라고 말해서인지, 정말로 이곳이 거대한 관처럼 느껴졌다. 난 잠들어 있는 최민 헌터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가 그의 몸 옆에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최민 헌터… 일어나 봐요.”

“…….”

“여기서 잠들면 정말로 악몽 속에 갇히게 돼요!”

최민 헌터의 몸을 흔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몸은 차갑게 식었고 팔과 다리는 야위어갔다.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늙지는 않았지만 몸은 착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최민 헌터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보려 그의 팔을 내 어깨에 둘렀다.

쩌적.

“어?”

그때 방공호 구석에서 어딘가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최민 헌터를 다시 내려놓고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시커먼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우웅, 우웅―

미식가의 포크도 균열을 향해 맹렬하게 반응했다. 진짜 최민 헌터가 저기 안에 갇혀 있다는 소리다.

곧바로 균열 앞으로 달려갔다.

[잠재된 악몽]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와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자격 확인]

[잠재된 악몽을 재생합니다.]

타닥.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균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도 ‘방공호’ 안이네.”

하늘을 쳐다보자 새빨간 불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이 공간은 나밖에 들어올 수 없다. 차도윤 헌터랑 한진우 헌터가 실패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럼 정말로 여기서 최민 헌터를 데리고 나가야 해.’

타닥.

넓게 펼쳐진 방공호의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그러자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누워있는 최민 헌터가 보였다.

웅, 웅, 웅―

미식가의 포크까지 맹렬하게 우는 걸 보니 이 사람이 진짜 최민 헌터일 것이다. 그를 향해 달려가는 다리에 힘을 더했다.

“최민 헌…터?”

쨍그랑.

그때 갑자기 방공호의 천장에 금이 갔다. 그러더니 엄청난 빛줄기가 그 틈새로 쏟아졌다.

‘물리적인 공격은 안 통할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새하얀 빛이 최민 헌터를 집요하게 비추자 결국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도 안 죽은 건가?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눈부셔…….

최민 헌터의 생각이 귀로 흘러들어 왔다. 난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최민 헌터와 정체불명의 빛줄기를 지켜보았다. 새하얀 빛이 커다란 구체가 되어 방공호 안을 유유히 날아다녔다. 그러곤 최민 헌터의 머리 옆으로 조용히 내려왔다.

“시간을 이탈한 인간이라……. 목숨만 겨우 붙어있는 것도 신기하네요.”

새하얀 구체는 최민 헌터를 살핀 후 다시 그의 머리 옆에 앉았다.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곤 한참을 눈을 깜박이며 제 옆의 빛을 바라보았다.

“…뭐야?”

“정신이 좀 드시나요?”

차분하고 깔끔한 미성이었지만 그 목소리에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최민 헌터는 미간을 구기며 빛을 노려보았다. 빛은 살짝 뒤로 물러나더니 말을 덧붙였다.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균형과 질서를 담당하는 존재, 조율자입니다.”

* * *

“와…….”

진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지금껏 자신이 보아온 그 모든 전투들 중 가장 파괴적이고 거칠었다.

악몽의 근원이 시퍼런 불길과 함께 지면을 박차고 나오기 무섭게 그림자 손이 튀어나와 그것을 다시 메다꽂았다. 그리고 곧바로 새카만 도신(刀身)이 튀어나와 그것을 수십 토막으로 베어냈다.

평범한 인간이나 몬스터였으면 이미 목숨을 잃었을 공격이겠지만, 악몽의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것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악몽의 근원은 사방으로 불꽃을 뿜어대며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고, 세빈은 한 수 접고 뒤로 물러났다.

“방해될까 봐 섣불리 보조도 못 하겠네요.”

도윤이 ‘나팔꽃’을 내리며 진우 옆에 섰고, 진우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쉴 새 없이 서로 공격을 퍼붓는 탓에 바람 화살이 파고들 틈이 없었다.

악몽의 근원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싶으면 곧바로 달그림자가 그것을 낚아채 지면으로 끌어내렸다. 두 인영이 겹친 순간 얇고 긴 검날과 불꽃이 부딪혀 뜨거운 불씨가 정신없이 튀었다. 눈으로 좇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콰과광!!

그때 붉은 불덩이가 세빈이 딛고 서있던 땅을 향해 떨어졌고 화산처럼 터져 나와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

“강세빈 헌터!”

“콜록, 콜록! 컥…….”

순간 존재를 숨겼던 세빈이 진우 옆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세빈은 마른기침을 하더니 인벤토리에 있던 물을 꺼내 그대로 제 얼굴에 부었다. 팔 한쪽이 완전히 새카맣게 타있었다.

“잠깐만 참으세요!”

사라락―

‘약손’이 세빈의 팔에 차곡차곡 내려앉고 새살을 피워낼 때마다 부스러졌다. 상처가 깊었는지 나뭇잎은 세빈의 상처 위에 앉자마자 바로 녹아 없어졌다. 진우는 이를 악물고 치료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세빈은 고통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눈으로는 악몽의 근원을 놓치지 않았다.

“진짜 최민 헌터랑 붙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저 악몽의 근원은 최민 헌터보다 약할 거예요.”

“흠… 그런가요? 폭발력은 비슷해 보이는데요.”

“폭발력만요.”

투쾅!!

달그림자가 또다시 악몽의 근원을 잡아 땅에 처박았다. 악몽의 근원이 제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며 그림자를 털어냈지만 곧바로 다른 그림자 손이 튀어나와 그것의 목을 졸랐다. 도윤은 눈을 크게 뜨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세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봐요. 기본적인 회피도 못 하잖아요.”

여전히 한쪽 팔을 치료받고 있는 세빈은 전투에 딱히 집중하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림자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며 악몽의 근원을 제압했고, 태연하게 기력 회복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공포 자체를 모르는 얼굴이군.’

도윤이 눈을 피하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마침 세빈의 팔이 원 상태로 돌아왔다. 세빈은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잡았다.

“지의가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나요?”

“이제 세 시간 정도 지났을 거예요.”

세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악몽의 근원을 향해 영을 다시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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