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업화(業火)】
[‘상실의 악몽’으로부터 ‘강세빈’이 탈출하였습니다.]
[남은 식재료 : 1개]
[미식가의 테이블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 5시간 28분]
‘다섯 시간 28분…….’
세빈이를 악몽으로부터 깨우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 이제 남은 건 최민 헌터뿐. 한진우 헌터랑 차도윤 헌터가 최민 헌터의 악몽을 얼마나 많이 진척시켰냐가 관건이다.
턱.
세빈이와 나는 최민 헌터의 악몽 앞에 섰다. 입구는 이리저리 찌그러진 철문이었다. 아까 한진우 헌터와 차도윤 헌터를 들여보내 줄 때도 느꼈지만 여러모로 께름칙했다.
열쇠 구멍에 포크를 집어넣은 후 돌리자 딸칵, 하고 문이 열렸다. 동그란 손잡이를 잡으려 손을 뻗었을 때였다.
“앗, 뜨거워!!”
“괜찮아?!”
손바닥에 퍼지는 화끈한 열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곧바로 손바닥을 쳐다보자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아있었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문손잡이와 내 손바닥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을 때쯤 상처 위로 새하얀 빛무리가 날아들었다. 아이테르의 로브가 갖고 있는 자가 치유력 상승 효과 덕에 화상 자국은 금방 사라졌다.
아이템의 성능에 감탄하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일단 최민 헌터의 악몽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세빈이가 그림자 손으로 문을 활짝 열었고 나를 돌아보았다.
“들어가자.”
“그래.”
숨통을 조여오는 열기와 함께 최민 헌터의 악몽으로 들어갔다.
퍼버버벙!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불덩어리, 지면을 집어삼키는 시퍼런 불길. 세빈이의 악몽이 시체가 떠다니는 거대한 우주 공간이었다면, 최민 헌터의 악몽은 ‘지옥’ 그 자체였다.
불길이 얼마나 거센지 하늘마저 태워버릴 것 같았다.
“이게 대체…….”
“지의야, 저기!”
세빈이가 가리킨 곳에 갈색 털 뭉치가 있었다. 한진우 헌터의 ‘행운의 토끼발’이었다.
콰과광!!
낙하하는 불꽃을 피해 그쪽으로 달려가자 매캐한 연기의 틈새로 싱그러운 풀 향이 코를 찔렀다. 이건 차도윤 헌터의 ‘하늬바람’의 영향일 것이다. 확신을 안고 달려가자 얼마 안 있어 재를 뒤집어쓴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차도윤 헌터!”
“신지의 헌터……! 아, 강세빈 헌터도 무사했군요.”
“지의 덕분에요. 그나저나 무슨 상황이죠?”
차도윤 헌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하늘 위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인영이 무자비하게 폭발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묘하게 낯이 익은 형체인데…….’
길게 쭉 뻗은 몸과 짧은 머리, 그리고 온몸에 두른 불. 그래, 난 저 사람을 알고 있다.
“악몽 속의 최민 헌터예요……. 그리고 저 먼지가 있는 걸 보면 아마 악몽의 근원일 거고요.”
행운의 토끼발 옆에 엎어져 있던 한진우 헌터가 내 머릿속을 엿본 양, 대신 답을 주었다. 그는 ‘약손’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목 주변에는 울긋불긋한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다.
“진짜 최민 헌터는 지금 방공호 안에 있어요. 저기 뒤에 보이시죠?”
“세상에…….”
“저희가 최민 헌터의 악몽을 전부 보고 나니까 바로 방공호 안쪽으로 이동됐거든요. 근데, 아야야…….”
한진우 헌터가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엎어졌다. 아직 다리의 상처가 다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차도윤 헌터가 한숨을 쉬더니 그 대신 말을 이었다.
“방공호에 들어갔을 때 이미 최민 헌터는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아무리 말을 걸어도 악몽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하더군요.”
“그 이후에 저희는 방공호에서 쫓겨났고, 나와보니까 저게 있던 거예요…….”
난 다시 고개를 들어 악몽의 근원을 바라보았다.
‘최민 헌터는 자기 자신을 악몽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악몽의 근원은 우리를 향한 공격을 멈추고 가만히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콰과광!!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나 싶었는데 악몽의 근원이 또다시 지면을 향해 불덩이를 던졌다. 운석처럼 떨어지던 불덩이는 땅에 닿자마자 위로 솟구쳤고, 불씨를 머금은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새카만 그림자가 우리를 잠깐 감싼 후 꾸물거리며 세빈이의 발밑으로 들어갔다.
더 늦어지면 안 돼.
빨리 저 방공호 안에서 최민 헌터를 꺼내야만 한다.
“악몽 입구가 어디죠?”
“방공호 옆이요. 악몽 자체는 길지 않았어요. 말이 안 통해서 문제지.”
차도윤 헌터가 입술을 씹으며 말을 덧붙였다. 난 미식가의 포크를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세빈이도 팔찌를 ‘영(影)’으로 바꾸며 내 옆에 섰다.
“지의가 최민 헌터를 만나는 동안 제가 저걸 상대할게요.”
“보조하겠습니다.”
세빈이의 말에 차도윤 헌터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어깨에 붙어있던 약손이 사르르 부스러졌다. 난 사람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바로 ‘낮말을 듣는 새’와 함께 방공호 쪽으로 튀어 나갔다.
퍼버벙!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해일 같은 불길이 내 앞으로 쏟아졌지만 그것을 가볍게 뛰어넘어 쉬지 않고 달렸다. 미식가의 포크를 던지자 그것이 방공호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고 그 뒤를 열심히 쫓았다.
“지의야, 다치지 마!”
“너도!”
씩 웃으며 높이 도약한 세빈이가 영으로 공간을 크게 베었다. 세빈이가 악몽의 근원을 상대하는 동안 나는 방공호 옆에 있는 철문을 향해 달렸다. 미식가의 포크는 나를 재촉하듯 문을 미친 듯이 긁어댔고 내가 땅에 착지하자마자 내 손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최민 헌터의 악몽 속으로 발을 들였다.
짹, 짹짹.
물 흐르는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자갈들은 서로 부딪혀 어딘가로 굴러떨어졌다. 피부 위로 시원한 바람이 닿을 때마다 낙엽이 한가득 쌓인 곳에 얼굴을 파묻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새하얬던 시야가 금방 돌아왔다.
‘그나저나 여긴 좀 익숙한데…….’
강물이 시원하게 흘러가고 있었고 자갈밭을 따라 아기자기한 펜션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음식점과 노래방이 있는 건물들도 드문드문 있었고 꽤 큰 규모의 카페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남이섬 선착장’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보였다.
가평 S급 게이트 앞이었다.
최민 헌터의 악몽의 시작은 바로 그가 각성을 했던 가평 S급 게이트 앞에서 시작되었다. 그에게 있어 아마 가장 끔찍했던 순간일 테니까.
“최민~ 트렁크에서 숯 좀!”
“얘는. 누나한테 최민이 뭐야, 최민이!”
“악! 아빠!”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펜션 2층에서 내 또래의 남자가 차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팟.
미끄러운 자갈밭을 단숨에 뛰어올라 차 옆으로 달려가니, 지금 모습보다 어린 인상의 최민 헌터가 트렁크에서 숯을 내리고 있었다.
“진짜 최민 헌터네…….”
검은 머리카락과 지금보다는 조금 작은 키를 제외하곤, 내가 알고 있는 최민 헌터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커다란 숯 포대를 들고 2층 테라스를 흘끔 보았다. 아빠에게 호되게 혼나는 제 남동생을 보며 얼굴에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인데.’
늘 웃음을 숨기던 최민 헌터의 행동이 생각나 가슴 한켠이 아렸다.
우우웅―
“어?”
미식가의 포크가 강렬하게 진동하더니 어린 최민 헌터의 머리 위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이게 진짜 최민 헌터라고?’
펜션 안으로 들어가려는 최민 헌터의 앞을 막아서자 그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최민 헌터! 저 보이죠! 보이는 거 맞죠?”
“누구…시죠?”
“정신 차려요! 지금 여긴 최민 헌터 악몽이에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최민 헌터는 나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이 사람은 진짜 최민 헌터다. 그의 양팔을 잡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여긴 지금 미식가가 만든 악몽이에요. 다른 사람들도 다 악몽에서 깨고 최민 헌터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중이라고요!”
“민아~ 거기서 혼자 서서 뭐 해?”
여자의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렸다.
[발언 결과 : 불쾌]
최민 헌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한참 노려보다, 이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냐, 엄마. 올라갈게요.”
“자, 잠깐. 최민 헌터!”
“…요즘 피곤한가.”
최민 헌터는 마당에 날 덩그러니 두고 펜션 안으로 들어갔다.
“혁아, 고기 다 먹고 밥도 볶아 먹자.”
“누나가 설거지하면.”
“쩨쩨하게 구네.”
2층에선 단란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낮말을 듣는 새로 뛰어 올라가자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최민 헌터의 남동생이 한껏 우쭐대며 불판 위에 고기를 올리고 있었고 최민 헌터와 부모님은 그런 그를 귀여워하며 한창 식사에 몰두 중이었다.
‘보조개가 있었구나.’
최민 헌터가 미소 지을 때마다 볼 양쪽에 얕은 보조개가 파이는 사실을 오늘이 돼서야 알게 됐다.
“우리 딸 많이 먹어.”
“맞아. 간만에 받은 휴가인데 푹 쉬었다 가자. 내일은 남이섬 가서 자전거도 타고 오고.”
최민 헌터의 부모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녁의 어스름한 햇살을 받아 강물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풍경은 너무나도 평화로웠고, 동시에 아슬아슬했다.
이 평화의 끝이 피와 절망으로 가득할 것을 알기에 그런 걸까.
“흐음…….”
“거기 뭐 있냐? 왜 자꾸 저길 본대?”
최민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빨리 일어나요.
입 모양으로 이야기하자 최민 헌터의 미간은 더욱 깊어졌다. 최민 헌터의 동생도 나를 쳐다봤지만 내 뒤의 산밖에 보이지 않는지, 오히려 제 누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최민 헌터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컵에 담긴 콜라를 들이켰다.
“아냐.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봐.”
“최혁, 아빠가 누나한테 예쁜 말 쓰라고 했지.”
“히잉. 막내아들한테 너무 박한 거 아니에요?”
손을 대면 당장이라도 깨져버릴 것 같은 평화로움이었다. 난 그 애틋한 풍경에서 눈을 떼고 게이트가 있는 컨테이너 박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웅우웅―
미식가의 포크가 비명을 질러댔다. 조만간 이곳에서 굉장히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고와도 같았다. 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점점 빨라지는 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포크를 꽉 쥐었다.
우우웅―
포크가 또다시 울었고, 일순간 주변의 모든 소리가 잠시 멈췄다.
콰과광!!
공간을 찢는 굉음과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느껴졌다. 난 조심스럽게 눈을 떠 최민 헌터가 있던 펜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누군가의 행복을 도려낸 자국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