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와. 휘연 선배 또 진우 형 언급했네.”
“둘이 번호 교환은 했어?”
“대박. 큐앱에서도 우리 노래 듣는다고 하셨대.”
레벨파이브 멤버들이 핸드폰을 보며 신난 듯이 떠들었다. 매니저처럼 보이는 여자도 씩 웃으며 핸들을 돌렸다.
“한휘연이 너희 무대를 엄청 인상 깊게 봤나 봐. 뮤비 조회 수가 급증했더라고.”
“진우 형 직캠 조회 수도 완전 떡사…이 아니라 엄청 올랐더라고요!”
가장 어려 보이는 멤버가 단어를 정정하더니 빠르게 말을 마쳤다.
“근데 형. 왜 휘연 선배가 뮤톡 찍자는 거 거절했어?”
“헐. 그랬어? 왜? 같이 찍지!”
멤버 중 하나가 뒤를 돌아 가장 뒷자리에 있던 한진우 헌터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다른 멤버도 입을 쩍 벌리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냥 부담스러워서.”
“와~ 이 형, 복에 겨웠네.”
맨 뒷자리에 앉은 한진우 헌터의 얼굴은 잿빛이 됐다. 멤버들에겐 악의가 없었지만 그는 이미 상처를 받을 대로 받은 상태처럼 보였다.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 사람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위이이잉―
그때였다. 모두의 핸드폰에서 범상치 않은 사이렌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도 메시지가 떴다.
[여의도 S급 게이트 폭발 사고 발생. 인근에 계신 모든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신속히 대피해 주십시오. 현재 헌터들이 현장으로 가는 중입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헌터들의 안내에 따라 대피해 주십시오.]
내비게이션을 보자마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맞아, 이 사람에겐 한휘연보다 더 악몽 같은 일이 있었지.’
이런 미친……!”
시커먼 형체가 차를 향해 다가오자 매니저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콰아앙!!
몸이 붕 떴고 커다란 파열음이 귀를 찔렀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아아악!!”
“살려주세요!”
“엄마! 아빠!”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뜨자 나는 엉망진창인 도로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국내 게이트 폭발 참사 중 하나였던 여의도 S급 게이트 폭발 사고였다.
여의도 S급 게이트 폭발, 가평 폭발 사고 이후 국내에서 벌어진 두 번째 S급 게이트 폭발이었다. 김강희의 천명이 이를 감지하긴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폭발한 바람에 여의도 한복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쩌면 방관한 걸 수도 있겠어.’
“이쪽으로 오세요!”
“생존자는 저희가 찾겠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신속히 대피 부탁드립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긴 그나마 안전지대인가 보다. 부상을 입은 헌터들과 일반인들이 한쪽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앰뷸런스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사람들을 싣고 떠났다.
쾅!
그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누군가 바닥에 착지했다.
“강세빈 헌터! 보스 몬스터가 한강 공원 쪽으로 도주했습니다!”
“알겠어요. 하늬바람으로 광역 치료 및 캠프 보호 부탁드립니다.”
세빈이와 차도윤 헌터였다. 한쪽 팔에 붕대를 친친 감은 세빈이는 말을 마친 후 공중으로 높이 도약했고 이내 모습을 감췄다. 차도윤 헌터가 팔을 휘두르며 ‘하늬바람’을 시전하자 쓰러져 있던 회사원들의 상처가 아주 조금씩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찌푸린 채 숨만 겨우 쉬고 있었다.
키이잉.
미식가의 포크가 다시 내 손에서 빠져나와 도로를 가로질렀다.
‘이제 진짜 한진우 헌터와 만날 수 있는 건가?’
‘낮말을 듣는 새’로 몬스터들의 잔해와 사람들의 시체를 넘어 대로변 쪽으로 발을 들이자 더욱 끔찍한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금방 구조해 드리겠습니다!”
“어, 엄마! 안 돼!”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놈들은 거리에 있는 모든 것들을 때려 부수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끔찍하군.’
대비하지 못한 S급 게이트 폭발은 지옥도가 나타났을 때의 모습과 비슷했다. 불타고 있는 건물들에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보도블록을 따라 누군가의 피가 흘러가고 있었다.
끼긱, 끼익.
편집 괴수처럼 보이는 몬스터가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람의 몸통에 사자 머리가 붙은 녀석이었다. 녀석은 자신의 기계 다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질질 끌면서 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파괴했다.
콰앙!
“민지호 헌터! 이쪽 보조 좀!”
“갑니다!”
엄청난 물줄기가 사자 머리를 관통했고 동시에 수룡을 탄 지호 언니가 무릎으로 녀석의 명치를 쳐 올렸다. 붕 뜬 사자 머리의 몸통을 굵직한 나무줄기가 옭아매자 그사이에 시뻘건 불길이 녀석을 집어삼켰다.
퍼벙!
불타는 잔해들이 바닥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뜨거운 연기가 폐부에 훅 들어차자 절로 잔 숨이 토해져 나왔다.
한참 기침을 하며 숨을 고를 동안 연기 틈새로 최민 헌터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완전히 이런 상황에 질렸는지, 검은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반쯤 감겨 있었다.
“누, 누나! 얘들아, 정신 좀 차려봐……! 지훈아, 민재야!”
‘한진우 헌터 목소리다!’
슬슬 악몽의 후반부인 것 같으니 진짜 한진우 헌터가 나올 때가 됐지.
불구덩이 속을 관통하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부서진 밴이 있었다. 아까까지 멀쩡히 살아있던 레벨파이브의 멤버들도 차에서 튕겨져 나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엎어져 있었다.
모두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 허억, 흐, 으윽……!”
한진우 헌터가 밴에 탄 사람들 중 유일하게 정신을 잃지 않았지만 그의 몸도 엉망이었다. 커다란 유리 조각이 옆구리에 박힌 데다가 다리도 영 좋지 않은 방향으로 꺾인 상태였다.
“한진우 헌터! 정신 차려요!”
“살려, 살려주세요……!”
키이잉.
미식가의 포크가 한진우 헌터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틀림없이 이 사람이 진짜 한진우 헌터일 것이다. 아까 내가 봤던 그 모든 악몽을 겪고 이 장면에 발이 묶인, 진짜 한진우 헌터.
그는 날 보자마자 내 팔을 잡으며 빌었다.
“한진우 헌터, 여긴 악몽이에요. 미식가가 만든 악몽이라고요.”
“빨리 제 동생들, 매, 매니저 누나도 어…….”
“한진우 헌터! 얼른 일어나요!”
우우웅―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아예 자아를 꺼내 얼굴에 대고 이야기하자 그의 형체가 잠깐 흔들렸다.
“으흑…….”
[발언 결과 : 절망]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하지 못하는지 그가 눈물을 쏟았다.
“내가, 다 내 잘못이에요…….”
후드득.
한진우 헌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내가 한휘연이랑 뮤톡만 찍었어도… 이 시간에 여길 안 지나갔을 텐데.”
“…한진우 헌터 잘못 아니에요.”
“다, 다아 내가 괜한 자, 존심을 부려서…….”
그는 부러진 다리를 질질 끌며 멤버들 쪽으로 기어갔다. 유리 조각이 박힌 옆구리에선 계속해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텁.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는 힘없이 내 쪽으로 끌려왔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든 그가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한다.
‘괜찮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래 씨가 다쳤어요!”
“…네?”
한진우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갑자기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한진우’가 동요한다.]
반응이 확실히 오고 있다. 미래 씨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대로 몰아붙이면 분명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해 낼 것이다.
“미래 씨가 지금 다쳤다고요! 한진우 헌터 아니면 치료 못 해요!”
“제가, 제가? 치료, 어?”
흐릿했던 초점이 서서히 돌아왔다. 텅 빈 눈동자에 빛이 들고, 이리저리 부르튼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더니 이내 크게 열렸다.
“시, 신지의 헌터? 윽!”
“우왓!”
[발언 결과 : 자각]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몸에서 고통을 느꼈는지 한진우 헌터가 내 쪽으로 고꾸라졌다. 엎어질 뻔한 그의 몸을 받은 후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제 기억났어요? 여기, 미식가가 만든 악몽이에요.”
“아으윽, 으…….”
“하아, 일단 치료부터 빨리 하세요.”
사라락.
자신이 누구인지 떠올리자 한진우 헌터의 주위로 ‘약손’이 날아들었다. 초록빛 나뭇잎이 그의 다리와 옆구리를 치료했다. 몸이 원 상태로 돌아온 그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얼굴과 귀가 붉게 익어있었다.
“…제가 미래 씨 좋아하는 거, 비밀이에요.”
“아, 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악몽인 걸 깨달은 후에 뱉은 첫마디가 저런 말이라니. 조금 웃겼지만 어금니를 꽉 물고 참았다.
“근데 신지의 헌터는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아, 일단 가면서 얘기해요. 한진우 헌터가 해치워야 할 게 있어서.”
“제가요?”
한휘연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이 악몽을 끝까지 진행시켜야 해.
“한진우 헌터, 전에 했던 것처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치료해 주세요. 이 악몽을 일단 끝내야 돼요.”
“네, 네!”
한진우 헌터는 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바스락.
우리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걸렸다. 고개를 들자 거대한 나뭇잎이 나비처럼 천천히 날아와 한진우 헌터의 뒤에 섰다. 꼭 거대한 후광을 등에 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꼭 모았던 손을 바깥쪽으로 천천히 펼치자 그 나뭇잎이 수백 장의 작은 나뭇잎으로 쪼개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다. 꼭 기적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웅―
악몽도 서서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려는 듯 우리를 둘러싼 참상이 일렁거렸다. 한진우 헌터가 스킬에 박차를 가하며 약손을 다시 한번 뿌렸다.
‘그러고 보니 구원자의 눈동자로 각성자를 보면 뭐가 보일까.’
오른쪽 눈을 살짝 감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각성자 한진우]
[대지 속성]
[고유 스킬 S등급]
[S급 치유계 스킬 ‘약손’]
[A급 함정계 스킬 ‘진흙’]
[A급 함정계 스킬 ‘모래성’]
[귀속 무기 : S급 부메랑 ‘행운의 토끼발’]
[무기 비문 :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예술입니다.]
[업 해당사항 없음]
[사명 해당사항 없음]
[*지옥도 개방 전까지 생존*]
스킬 부분에 손을 대니 상세한 설명이 나왔다. 이 부분은 창조자의 권능과 유사하지만 밑의 세 줄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보이는 것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다.
‘즉, 한진우 헌터는 지옥도 개방 전까지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해.’
“신지의 헌터?”
“앗.”
그때 한진우 헌터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화들짝 놀라며 눈을 다 뜨자 글자는 전부 사라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의도 게이트 폭발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웬 어두운 병원 복도였다.
“이제 어떻게 들어온 건지 물어봐도 돼요?”
한진우 헌터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빤히 보았다.
“제가 제일 먼저 악몽에서 나왔거든요. 그랬더니 이 포크를 주더라고요.”
‘엄밀히 따지자면 악몽에서 나온 건 아니지만.’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은 악몽 그 자체였으니까 대충 비슷한 거라고 치지, 뭐.
“아무튼 이 포크 덕분에 다른 사람의 악몽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거예요.”
“아… 그럼 혹시 저도…….”
“…미안해요.”
한진우 헌터가 멍하니 나를 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픽 웃곤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쩔 수 없었잖아요. 신지의 헌터가 사과할 일도 아니에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아이~ 당연히 걱정 안 하죠. 신지의 헌터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아요!”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나를 이렇게 믿어주니 다행이네.
“그래서 이 악몽은 어떻게 해야 깰 수 있어요?”
“아, 이 포크로 악몽의 근원을…….”
“진우야!”
그때 갑자기 검은 먼지를 뒤집어쓴 한휘연이 나타났다.
텁.
“각성했다면서! 어디 다친 곳은 없어?”
그는 한진우 헌터의 손을 잡더니 한껏 울상을 지으며 다정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진우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잡힌 제 손과 한휘연을 번갈아 보았다.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한휘연은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듯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더욱 집요한 눈으로 한진우 헌터를 응시했다.
“그 포크로 제 악몽의 근원을 찌르면 된다는 말씀이죠?”
“아, 네.”
“후…….”
한진우 헌터에게 포크를 건네자 그가 한휘연에게 잡힌 손을 꺼내 그것을 잡았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제 악몽의 근원이 한휘연이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야.”
‘와우.’
한진우 헌터가 저런 말하는 거 처음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한휘연도 놀랐는지 그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푹.
이내 스테이크에 포크를 찔러 넣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검은 먼지 범벅이던 한휘연이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한진우 헌터가 포크를 다시 뽑아내자 그의 전신이 녹아내렸다. 검은 액체가 되어 복도 바닥에 찐득하게 눌어붙는 한휘연을 보며 한진우 헌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여린 숨을 내뱉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나한테 열등감 좀 그만 가져.”
[‘질투의 악몽’으로부터 ‘한진우’가 탈출하였습니다.]
[남은 식재료 : 3개]
[미식가의 테이블에 오르기까지 남은 시간 : 16시간 3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