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6화 (96/366)

96화

【오늘의 알 라 카르트(a la carte)는 악몽 코스입니다】

철컹.

“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고 몇 번이고 흔들어봤지만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 하나만 겨우 들어갈 만큼만 열렸다. ‘미식가의 포크’를 손잡이에 대보고 찔러보고 당겨봐도 상황은 그대로였다.

‘이렇게 된 이상…….’

난 오른쪽 눈을 감고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 문을 내려다보았다. 손잡이의 한가운데에 무언가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다 뜨고 허리를 숙였다. 손잡이 옆에 작은 열쇠 구멍이 있었다.

아까까지 했던 내 바보짓을 누군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네.

철컥.

미식가의 포크를 열쇠 구멍에 집어넣고 옆으로 돌리자 문이 스르르 열렸다.

활짝 열린 문 안쪽으로는 평범한 건물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부터 한진우 헌터의 악몽이겠지?’

누군가의 악몽을 이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다.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은 헌터들은 전부 미식가의 식탁에 올라갈 테니까.

“한진우 헌터, 미안해요!”

마음을 굳게 먹으며 한진우 헌터의 악몽 안으로 발을 들였다.

둥, 둥, 둥.

한진우 헌터의 악몽은 웬 새하얀 복도에서 시작되었다.

‘방송국? 아니면 소속사 건물?’

복도를 따라 빠르게 걷자 사람들의 말소리와 쿵쿵대는 비트가 크게 들려왔다.

“레벨파이브, 스탠바이 할게요~”

“네!”

“네~”

“아, 대박. 완전 긴장돼.”

젊은 남자의 목소리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노랫소리가 은근히 들리는 걸 보니 음악 방송 촬영장 같았다. 부지런히 발을 옮겨 복도의 코너를 돌자 교복과 사복 사이에 묘한 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우 형! 아까 멀미난다고 했던 거 괜찮아?”

“아, 응. 좀 나아졌어.”

“한진우 헌터!”

한진우 헌터였다.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긴커녕 모습조차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한진우 헌……!”

후웅―

그의 팔을 잡으려 뻗은 내 손이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키이잉.

그때 미식가의 포크가 진동했다. 그것은 내 손에서 빠져나와 무대 쪽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식재료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했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한진우 헌터의 환상인 것 같았다.

진짜 한진우 헌터는 아마 악몽의 중반이나 후반에 도착해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이돌들의 아이돌! 파피용의 무대까지 잘 보았습니다! 그럼 다음 무대는 누구죠, 하린 씨?”

“누나들의 마음을 훔치러 온 다섯 남자! 레벨파이브의 무대가 기다리고 있죠!”

“와! 정말 기대되는데요? 그럼 지금 바로 만나볼까요?”

한껏 상기된 MC들의 목소리가 무대 계단을 통해 들려왔다. 한진우 헌터와 레벨파이브 멤버들은 거울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하는 걸 멈추고 무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진우 헌터가 메인 보컬로 있는 레벨파이브는 나름 팬층이 있었지만 활동한 기간에 비해 크게 뜨지 못한 그룹이었다. 그룹 인지도를 높이려고 예능이며 드라마며 온갖 프로그램을 다 나갔지만 그때만 잠깐 이슈가 되고 다시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고 들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 그래~ 무대 잘 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때 계단에서 파피용이 내려왔다. 그들은 나처럼 아이돌에 관심 없는 사람도 이름이랑 히트곡 몇 개 정도는 알 정도로 유명한 그룹이었다.

한진우 헌터를 비롯한 레벨파이브 멤버들이 파피용을 향해 깍듯이 인사했고, 그들도 대충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어?”

그런데 파피용의 멤버 중 한 사람의 얼굴에 검은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데…….’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순간 파피용의 멤버 하나가 그 옆으로 다가왔다.

“휘연이 형! 수건!”

“아, 고마워.”

“아!”

한휘연이었다. 파피용의 리더이자 그룹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멤버. 잘생긴 외모 덕에 드라마에도 주연급으로 나온 적이 있었다.

‘근데 왜 저 사람에게만 먼지가 붙어있는 거지?’

내가 한휘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동안 한진우 헌터는 이미 무대 위로 올라갔다. 팬들의 미약한 함성 소리 사이로 발랄한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쟤네 이번에도 귀여운 콘셉트로 가네.”

“근데 저기 메보가 나이 좀 있지 않아?”

“아, 진우?”

파피용의 멤버들이 복도에 붙은 TV 화면을 보며 한마디씩 얹었다. 마침 화면에 한진우 헌터가 잡혔다.

“스물넷에 저런 콘셉트 하는 것도 힘들겠다.”

“그니까. 쟤네 데뷔한 지도 꽤 됐는데.”

스물넷이면 아이돌 하기엔 많은 나이인가?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뒤로한 채 미식가의 포크가 가리키는 대로 무대를 향해 발을 돌렸다.

“쟤만 빠져도 그룹 그림이 좀 살 텐데.”

‘뭐?’

그때 한휘연이 입을 열었다. 다른 멤버들이 그의 말에 입을 뚝 다물었다. 마이크 정리를 도와주던 스태프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한휘연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정적에 멤버 중 한 명이 웃음을 터트리며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아, 아이고. 우리 형, 또 대표님 성대모사 하네~”

“아하하! 맞, 맞아. 그때 대표님이 너 놀린다고 데뷔 직전에 그런 소리하셨잖아.”

멤버들이 한휘연과 스태프들의 눈치를 보며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었다.

‘분명히 한진우 헌터를 보면서 얘기했어.’

얼마 안 있어 파피용 전원이 그대로 복도를 돌아 대기실 쪽으로 사라졌다.

피잉―

미식가의 포크가 무대 쪽으로 날아갔다. 나도 그것을 쫓아 무대 위로 올라갔다.

“왁!”

발이 밑으로 훅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허공을 딛자 ‘낮말을 듣는 새’가 발동되었고, 덕분에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미식가의 포크는 어둠을 가르고 앞으로 쭉 날아갔다.

지금쯤 한진우 헌터는 악몽의 어디쯤에 있을까.

불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포크를 쫓아갔다.

어둠 속을 한참 헤매고 나서야 또 다른 문이 등장했다. 문에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미식가의 포크가 문을 두드렸다. 난 포크를 다시 손에 쥔 후 그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까 들어왔던 그 복도의 모습이 또 펼쳐졌다.

“쉬운 길이 있는데 넌 꼭~ 돌아가려 하더라?”

한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복도 안쪽으로 달려가니 한휘연과 한진우 헌터가 마주 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휘연은 한진우 헌터를 비웃듯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그냥 니가 내 사촌동생이라는 거 말하라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마. 그리고 입조심 좀 해.”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한진우 헌터가 인상을 쓰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엄청난 걸 들어버렸네.’

저 두 사람이 사촌지간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사이가 안 좋은 사촌일 줄이야.

“형은 도대체 뭐가 문제야?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 안달인 건데?”

“…….”

“설마 아직도 고모가 한 말을 마음에 담아둔 거야?”

한휘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검은 먼지로 전부 덮인 상태였다.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이네.”

“…….”

“5년 차에 1위 후보 한 번 못 올라가 본 X망돌 주제에.”

까득.

한진우 헌터가 이를 갈았다. 그 말을 들은 게 분한지 꽉 쥔 주먹이 덜덜 떨리기까지 했다. 한휘연은 한진우 헌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 대기실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한진우 헌터의 악몽의 근원은 100퍼센트, 아니 200퍼센트의 확률로 한휘연일 것이다.

텁.

미식가의 포크를 쥐고 유유히 복도를 빠져나가는 한휘연을 향해 달렸다. 그러고는 포크로 그의 목을 내리찍었다.

파지직.

[악몽의 근원은 악몽을 꾸는 식재료가 잡아야 합니다.]

“쳇.”

포크 한 번 쓰는 데 조건 한 번 더럽게 까다롭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다. 트라우마와 악몽은 스스로 깨지 않으면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미식가의 포크를 다시 거두고 한진우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잘 닦인 캔퍼스화 위로 눈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일단 악몽의 근원은 알았으니, 지금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건 그걸 직접 처리할 한진우 헌터다.

우우웅―

미식가의 포크를 하늘로 던지자 아까처럼 둥실 떠올라 한진우 헌터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똑같이 생긴 복도를 한참 달렸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문을 몇 번이고 열고 복도에 붙은 TV를 몇 번이고 보았다.

“아, 최근에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요? 어… 저는 레벨파이브의 우리 진우 후배님이요!”

그때 한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데없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붙은 TV 화면에서 한창 토크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휘연이 잘 만들어진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한진우 헌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MC들은 한휘연의 말이 꽤 흥미로웠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레벨파이브 진우 씨한테 한마디!”

“어… 진우 후배님! 전에 방송 보니까 피자 좋아한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꼭 같이 피자 먹으러 가요. 제가 살게요!”

“저 미친 새…….”

입 밖으로 험한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화면에 노이즈가 끼더니 다른 방송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음악 방송 MC를 보고 있는 한휘연의 모습이었다.

“다음 순서는 누구죠, 휘연 씨?”

“겨울 소년이 되어 돌아온 레벨파이브 멤버들이 대기 중입니다! 와아~”

“아까보다 신난 것 같은데, 진우 씨 때문인가요? 차별은 안 된다고요~?”

한휘연은 한진우 헌터를 교묘하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한진우 헌터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그와 자신을 은근하게 엮었다.

아마 한진우 헌터가 가장 피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빨리 여기서 꺼내줘야겠어.”

이 악몽의 어딘가에서 고통받고 있을 한진우 헌터를 위해 포크가 날아간 쪽으로 서둘러 발을 옮겼다. 포크는 이번에도 복도 끝에 있는 문의 손잡이를 열심히 긁었다. 끼기긱거리는 소리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얼른 포크를 낚아챘고, 문손잡이를 내 쪽으로 잡아당겼다.

딸칵.

“앗.”

문을 열자마자 푹신한 의자에 앉혔다.

―잠시 후 좌회전입니다.

웬 차의 조수석이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레벨파이브의 멤버들을 보고 나서야 여기가 그들의 밴 내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웅―

미식가의 포크도 차가 가는 방향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 밴의 도착지에 한진우 헌터가 있을 것이다.

‘제발 늦지 않았길.’

밴은 한강을 따라 쭉 나아가다 빌딩 숲 사이로 부드럽게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