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5화 (95/366)

95화

쿵.

“컥, 커헉! 으, 우읍.”

이 지독한 악몽이 나를 99번째 회귀까지 겪게 만들고 나서야 난 내 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채 호흡을 골랐지만 숨을 토하는 게 전부였다. 제대로 된 산소가 들어오진 않아 머리가 핑 돌았다.

그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내가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해일처럼 몰려와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차라리 죽고 싶어.’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마주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진실은 무지보다 잔인했다.

바스락.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엎드려 있다간 진실의 무게에 눌려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악몽에서 나가는 길은 알 수 없었지만 무작정 걸었다. 걸을 때마다 속이 뒤집어져서 뭐라도 게워내고 싶었다.

‘일단, 일단 생각하자.’

늘 그랬듯이.

이번이 나의 100번째 회귀다. 98번째에서 종말을 막는 데 거의 성공했지만 지옥도의 완전 소멸을 위해선 내 희생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걸 안 세빈이가 폭주해서 동료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98번 회귀한 나는 세빈이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다음 회귀부터 기억을 초기화시키는 페널티를 넣었다. 이번 회귀를 시작할 때 내게 기억이 없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고.

“…아.”

세빈이와 관련된 텅 빈 기억 조각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내가 세빈이의 검에 찔린 걸 기억하는 건 걔가 배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빈이가 날 찌른 게 아니라 회귀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배를 찌른 것이었다.

세빈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시간선은 그의 은신계 스킬 부작용 때문이었다. 그 스킬을 왜 오랫동안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가 배신자이기 때문에 사라진 것은 아니다.

후드득.

‘다행이다.’

바보같이 눈물이 떨어졌다. 자꾸만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울렁거렸다.

세빈이가 그 시간선에서 나 때문에 동료들을 베고 벙커의 존재를 숨긴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게도 난 내 하나뿐인 소꿉친구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

아이테르의 로브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자 눈물은 씻은 듯이 없어지고 붉게 부은 눈이 원래의 상태를 되찾았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컨디션으로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달그락.

그때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고개를 내리자 새하얀 파편 같은 게 떨어져있었다.

“내가 왜 네 기억을 지웠는지, 이젠 알겠지?”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파편을 따라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 끝엔 만신창이가 된 내가 있었다.

정확히는 98번 회귀한 내가.

“역시 너였구나.”

98번째의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리고 내가 결정적인 걸 기억해 낼수록 98번째의 나는 집요하게 내 기억을 삭제했다.

‘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던 거겠지.’

98번째의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지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도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 바로 구원자 인과율이라는 이상한 수치 때문에 언젠가는 내가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기억해 냈을 것이라는 점.

텁.

난 98번째의 나를 끌어안았다. 스스로 찌른 상처 때문에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지만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수고했어.”

“…….”

“내가 좌절할까 봐 그랬던 거잖아.”

98번째의 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몸을 뒤로 빼 그의 얼굴을 보니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쿵.

그때 큰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흔들렸다. 지금 보니 98번째의 나는 웬 새빨간 문에 기대어 앉은 채였다. 문밖으로 무언가 나오려는 걸 막고 있는 건지 엉망이 된 다리에 힘을 주어 문을 더욱 세게 눌렀다.

“문 안쪽에 뭐 있어?”

“…너.”

“어?”

“너와 나를 제외한 모든 시간선의 네가 있다고.”

콰직.

문틈으로 여러 개의 손이 튀어나왔다. 손의 주인들은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나올 것처럼 위협적인 모양새였다.

“그럼 그동안 돌발 지령이니 사명이니 하는 것들은 쟤네들이 준 거겠네.”

98번째의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사명은 우리가 준 게 아니야.”

“맞아. 우리는 보상을 조금 추가해 준 것뿐이지.”

“아, 돌발 지령은 우리가 준 게 맞아! 그래야 네가 빨리 성장하고 세상을 지킬 수 있잖아.”

문 너머로 내 목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수십 명이 한꺼번에 이야기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지의 너한테만 사명이 있는 게 아니야. 최민 헌터에겐 최민 헌터만의 사명이, 세빈이에겐 세빈이만의 사명이 있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거야?”

“우린 이 세상의 일부니까.”

콰직.

문틈으로 손 몇 개가 더 튀어나왔다. 98번째의 내가 힘겹게 문을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손들은 내게 닿고 싶은 건지 팔을 쭉 뻗어 내 쪽으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회귀자의 업이 청산이 안 됐거든.”

“그래서 우린 사라지지도 못하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시스템을 떠돌고 있어.”

“마치 귀신처럼.”

“그래도 덕분에 네 능력과 던전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 존재가 됐지.”

“그건 참 다행이야.”

지난 시간선의 ‘나’들이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회귀자의 업이 청산되지 않으면 완전한 안식이란 없는 건가.’

그 업이 세상이 내게 강제로 씌워버린 족쇄처럼 느껴졌다. 지난 시간선은 물론이고, 이번 시간선에서도 내 발목을 잡을 게 분명하다.

“우리가 밉지.”

“미울 거야.”

“맞아. 그냥 아무것도 빌지 말고 세상이 망하게 둘걸.”

‘나’들이 자책했다. 있어서는 안 될 시간선을 만든 자신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텁.

난 ‘나’들의 손을 잡았다. 석고상처럼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

“지금까지 있던 너희들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야.”

98번째의 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 때문에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를 향해 손을 뻗자 그가 내 팔을 잡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탁.

그리고 난 그의 손도 ‘나’들의 손을 잡게 했다. 처음 손을 잡을 땐 너무 차가워서 지금도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손을 맞잡으니 미지근한 열이 피어올랐다.

“너희들이 실수했다면 지금의 내가 바로잡으면 돼.”

“너…….”

“너희들이 쌓은 업은 지금의 내가 한꺼번에 청산하면 돼.”

쾅!!

발로 문을 걷어찼다. 붉은 문이 산산조각 나자 문 너머에 있던 ‘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섬뜩하지 않았다.

100번의 회귀를 통해 전에 없던 힘과 기회가 생겼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부 과거의 내가 존재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세상과 ‘나’를 구할 수 있어.’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 있게 도와줘.”

“…….”

“내가 반드시 이번 시간선에서 모든 걸 마무리 지을 테니까.”

파아앗.

순식간에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에 둘러싸인 것처럼 눈이 부셨다. 오직 손을 통해서만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의 나는 정말로 구원자 같네.”

내 목소리가 수십 개로 겹쳐 들렸다.

“도와줄게. 네 말대로 이번 시간선이 마지막이 될 수 있도록.”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 획득]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 획득]

[‘카르마의 탄환’ 획득]

그때 눈앞에 상태창이 연달아 나타났다. 초기화됐던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가 순식간에 달성 완료됐고,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를 제외한 처음 보는 보상들도 내게 안겨주었다.

“아, 이건 방해되니까 없애야겠다.”

[권능 ‘창조자의 눈동자’가 파괴되었습니다.]

창조자에게서 빌렸던 권능이 녹아내렸다.

이제 녀석의 흔적은 완전히 없애는 게 좋겠지.

<사명>

[사상 최강의 무기를 다루는 자]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귀속 무기 특이 사항 ‘구원자의 무기 창고’ 해금]

“우리가 그동안 써왔던 자아의 모든 형태들을 넣었어.”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을 거야.”

“지금도 잘 바꿔 쓰긴 했지만 아직 안 쓴 무기들도 많거든. 너도 기억하지?”

‘나’들이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자 상태창이 사라지는 동시에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도 없어졌다.

“기억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끔찍했겠지만 이렇게라도 너와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서 내 말을 듣고 있을 과거의 나를 향해 대답했다. 창조자의 파편 안에서 과거의 ‘나’들과 마주칠 수 있던 것도, 내가 한때 이 파편의 주인이었기 때문일 테니까.

사락.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우린 온 힘을 다해 널 도와줄 거야.”

“그러니까 넌 지금처럼 최선을 다해 줘.”

키이잉―

“우리들의 작은 구원자야.”

타닥.

목소리와 함께 새하얀 공간에 순식간에 색이 입혀졌다.

* * *

“어… 여긴?”

주위를 둘러보니 호텔 라운지에서 볼 법한 카펫이 깔린 방이었다. 벽에 나있는 커다란 창문엔 카펫과 똑같이 붉은색 커튼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라는 걸 받았지.’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는 지난 시간선의 기록이 보였다. 그럼 구원자의 왼쪽 눈동자로는 뭐가 보이는 거지?

오른쪽 눈을 감자 황금색 글자들이 일렁거리며 떠올랐다.

[창조자의 파편―미식가]

[창조자의 다섯 파편 중 하나]

[미식가 사망 시 파편 소멸]

[악몽에 갇힌 식재료를 구해야 함]

[악몽은 미식가의 포크로 파괴 가능]

[미식가의 포크는 미식가의 라운지에 가장 먼저 입장한 사람만이 획득할 수 있음]

“헉.”

나도 모르게 숨을 훅 들이켰다. 이 지나치게 상세한 정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눈동자가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공략법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구원 매뉴얼이겠네.’

눈을 다시 제대로 뜨고 내부를 살폈다. 정면 벽에 서로 다르게 생긴 문 네 개가 둥둥 떠 있었다.

탱그랑.

그때 내 발 앞에 은색 포크가 떨어졌다. 손잡이에 화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것을 빼고는 평범한 포크였다.

‘이게 아까 말한 미식가의 포크인가?’

허리를 숙여 포크를 손에 쥐자 상태창이 떴다.

[아이템 획득]

[미식가의 포크]

[특이 사항 : 다른 식재료들의 악몽에 들어갈 수 있다. 악몽 속에서 식재료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식재료가 꾸고 있는 악몽의 근원을 쉽게 해치울 수 있다.]

상태창을 보자마자 과거의 기억이 흘러들어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문구가 생각났다.

[입장한 식재료 5개]

[편집된 시간선에 입장합니다.]

[미식가의 테이블에 올라가기까지 남은 시간 : 24시간]

주방장이라고 하는 존재가 우릴 식재료로 설정했다. 나는 식재료에서 제외됐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쯤 각자의 악몽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겠지.

포크를 든 채 네 개의 문 쪽으로 발을 옮겼다.

[한진우] [강세빈] [차도윤] [최민]

역시, 여기에 갇혀 있었다.

마음 같아선 세빈이를 가장 먼저 악몽에서 꺼내주고 싶지만 생존을 위해선 치료계 헌터를 제일 먼저 구해야 한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문손잡이를 잡았고 그대로 앞으로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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