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4화 (94/366)

94화

쾅!!

공간을 찢을 정도의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민의 방공호가 헌터들을 감쌌다.

“커헉!”

“허억, 헉, 우웨엑.”

그림자 손이 사라지자 헌터들은 바닥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강세빈, 저 미친…….”

미준이 욕을 읊조리며 목을 매만졌다. 지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민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된 사고가 되지 않아서 그저 제일 믿을 만한 사람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것이었다.

민이 이를 아득 물곤 지의 쪽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지옥도에 죽을지언정 여기서 다른 헌터들에게 살해당하는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콰드득.

“윽!”

그때 커다란 나무줄기가 지의를 옭아맸다. 그리고 미준이 손도끼를 들고 지의의 바로 앞으로 다가왔다.

“미안해, 지의 양. 악감정은 없어.”

“…….”

“지의 양도 희생을 각오하고 회귀자라는 걸 말한 거잖아, 그치?”

미준이 도끼를 높게 들었다. 지의가 눈을 감을 새도 없이 도끼가 무서운 속도로 머리 위쪽으로 떨어졌지만.

키이잉!!

갑자기 나타난 세빈 때문에 그의 공격은 물거품이 되었다.

“뭐, 뭐야!”

“아아악!!”

헌터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미준이 인상을 찡그리며 세빈의 검을 밀어냈다.

“방공호 안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네.”

“제 스킬 다 아시잖아요.”

“알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그 또라이 같은 스킬.”

쾅!!

“그거 오래 쓰면 정말로 존재가 사라진다며.”

“…….”

“기왕 쓰는 거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네.”

미준과 세빈이 한 번 더 충돌했다. 그 틈에 방공호를 해제한 민이 지의를 낚아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큿!”

“최민 헌터!”

그때 세빈의 그림자가 솟구쳐 민의 다리를 끌어내렸다. 지의와 민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지의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빈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의 검이 이미 미준의 가슴을 꿰뚫은 후였다.

후드득.

세빈이 검을 털자 검붉은 피가 땅 위로 떨어졌다.

“다들 이렇게 죽는 걸 싫어하면서.”

세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 지의가 희생하는 건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세빈의 시선이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쿵!

헌터들은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세빈의 정신계 스킬, ‘공포’의 영향이었다. 그를 바라본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할 뿐.

‘안 돼.’

지의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세빈이 누군가를 더 죽이게 할 수 없었다.

‘내가 빨리 죽어야 해.’

지의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자신을 노렸던 헌터의 단검이 땅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타닥!

단검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간 지의는 땅으로 손을 뻗어 단검을 낚아채자마자 자기 목으로 가져왔다.

우득.

“아아악!!”

그 순간 지의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이 튀어나와 그의 손목을 부러트렸다. 지의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의 그림자에서 나온 손들이 팔다리를 강하게 옭아맸다. 단검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잠깐이면 돼. 알겠지?”

“당장 이거 놔!”

우우웅―

공기가 진동하고 지의의 몸을 누르던 그림자 손들이 찢겨 나갔다. 세빈이 머리를 잡고 크게 휘청거리자 공포 상태에 빠진 헌터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최민 헌터! 차도윤 헌터!”

지의의 외침에 두 사람이 움찔했다. 그들은 잔뜩 성이 난 밤색 눈동자를 보자마자 그가 자신들을 부른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날 빨리 죽여.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민이 망설이는 동안 도윤은 이미 활의 시위를 잡아당겼다.

서걱.

바람 화살이 그의 손에서 채 떠나기도 전에 새카만 검이 그의 몸을 벴다.

“차도윤 헌터!”

“차도윤 헌터!”

진우와 지의가 동시에 소리쳤다. 진우가 약손을 날려 치료를 시도했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그리고 그런 진우의 목을 향해 검은 손들이 달려들었다.

“컥!”

지의가 진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전에 그림자 손이 그의 몸을 다시 옭아매 땅으로 끌어내렸다. 머리를 부딪쳐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한 지의는 입을 살짝 열어 혀를 콱 물었다.

으득.

“읍!”

하지만 그림자 손이 그의 턱을 움켜쥐는 바람에 혀에 잇자국이 살짝 남은 것에서 그쳤다.

“금방 끝날 거야.”

세빈이 지의의 머리 위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향해 살풋 웃은 후 코트를 얼굴 위로 덮어주었다.

피비린내가 밴 코트가 지의를 감싸자 그의 시야는 완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 그리고 그들이 시체가 되어 땅 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지의의 귀를 파고들었다. 자신을 방해하는 그림자 손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지의는 그 자리에 누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민의 질문이 지의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만약 민이 지금의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지의는 다른 대답을 했을 것이다.

바스락.

눈으로 갑자기 많은 빛이 쏟아졌다. 지의는 인상을 찌푸리다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래 기다렸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세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지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함께 싸우던 동료들이 전부 시체가 되어 땅 위에 쓰러져있었다. 검붉은 피가 아스팔트 틈을 따라 흘렀다.

‘최민 헌터…….’

영원히 제 옆에 있을 것 같던 민마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지의가 있는 쪽으로 손을 뻗은 채로 쓰러져있었다.

[재창조까지 남은 시간 : 3시간 43분]

고작 몇 시간 만에 세빈은 지의를 제외한 모든 헌터들을 죽였다.

툭.

세빈이 지의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마르지 않은 피가 그의 얼굴에 묻었다.

“우리 집 지하에 벙커가 있어. 일단 거기로 가자.”

“…….”

“몬스터가 주변까지 오면 한 마리씩 처리하면 되고. 어때?”

세빈이 손으로 지의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혹시 몰라서 독립할 때부터 조금씩 만들어 둔 건데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

“손목 부러트려서 미안해. 가서 치료해 줄게.”

피비린내와 끔찍한 기분 때문에 속이 뒤집혔는데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세빈의 손은 지나치게 다정했다.

‘가는 길에 절벽 있으면 뛰어내려야지.’

98번째의 회귀, 이번 시간선도 실패였다. 지의는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세웠다.

세상은 종말을 막을 때까지 자신을 구원자로 삼을 것이다. 그럼 방법은 간단하다. 사망 후 말의 힘으로 시간을 돌려서 이번 시간선처럼 지옥도를 파괴하면 된다.

지의가 세빈을 살짝 밀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을 담은 것 같은 검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자 문장 하나가 그의 목을 졸랐다.

‘내가 얘를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이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신이 회귀했을 때, 세빈을 예전처럼 볼 자신이 없었다. 같잖은 동정이나 인간성은 전부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소꿉친구 앞에서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툭.

지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 시간선에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가 눈물을 쏟아냈다.

“응. 전부 다 내 잘못이야.”

“…….”

“미안해. 진짜 미안해.”

세빈은 지의의 등을 토닥였다. 지의는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네 탓 아니야.’라고 말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키잉.

그때 지의의 눈에 세빈의 장검, 영(影)이 들어왔다. 새까만 기운을 내뿜는 검은 땅에 박힌 채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의가 세빈의 품에 파고들었다. 세빈은 눈까지 감으며 제 소꿉친구의 등을 쓸었다. 그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지의의 손이 장검 쪽으로 향했다. 손가락 끝에 검 손잡이가 걸리자 그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탁.

지의가 세빈을 밀쳤다. 세빈이 뒤로 휘청거리며 눈을 크게 떴다.

“지의…….”

푸욱―

지의의 배에 영이 꽂혔다. 지의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갔다.

“지의야!!”

세빈이 소리를 지르며 무심코 검을 뽑자 새빨간 피가 그의 셔츠를 적셨다.

쿵.

지의의 몸이 땅에 떨어지자 세빈이 무릎을 꿇은 채로 그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왔다.

[세상이 당신을 원한다.]

[세상이 당신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삼는다.]

지의의 예상대로, 세상은 지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구원자의 권능]

[말의 힘]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구원자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순간]

[구원자의 말은 현실이 된다.]

“시간을…….”

지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세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세빈은 인벤토리에서 닥치는 대로 온갖 약품을 꺼냈지만 뻥 뚫린 지의의 배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툭.

세빈이 지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모든 감각이 멀어진 상태였지만 그가 떨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정이란 건 정말 우습고 무섭구나.’

자신의 모든 계획을 망쳐버린 인물인데 그를 증오하고 싶지 않았다.

지의는 상태창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회귀할 때마다 내 기억을 초기화시켜.”

[‘말의 힘’ 발동 시 구원자의 인과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의 힘’ 발동]

[범위 : 이 세상의 모든 시간선]

결국 그는 비이성적인 선택을 했다. 하나뿐인 소꿉친구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는 얄팍한 이유로 스스로를 다시 불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다.

[시간선 되감기]

[구원자의 인과율 증가]

[구원자 인과율 99% 달성]

[생태계 변화]

[시간선 초기화]

* * *

98번째 회귀자인 지의가 말한 대로 99번째 회귀자인 지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각성 직후 창조자의 사도가 되었고 지옥도를 막지 못했다.

‘지유야, 언니 300살까지 못 살겠다.’

지의는 온몸이 뒤틀린 채 거리의 한복판에 널브러졌다. 지옥도에서는 몬스터와 게이트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아수라장의 가운데 오직 배신자만이 멀쩡히 서있었다. 지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은백색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 그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수고했네.”

배신자는 그 말만 남기고 뒤를 돌아 지옥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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