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2화 (92/366)

92화

【불우한 구원자의 100번째 회귀】

“언니, 내일도 올 거지?”

“응. 내일 4교시니까 끝나고 바로 올게.”

어느 오래된 대학 병원의 6인 병실 안. 지의, 지유 자매가 같은 침대에 누운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크게 떠들면 안 된다는 어른들의 꾸지람에 살짝 시무룩한 상태였지만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진 않았다.

“아. 맞다, 언니. 나 그 책 빌려다 줘!”

“어떤 거?”

“언니가 재밌다고 했던 소설책!”

지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자신이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그러더니 기억해 낸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알겠어. 도서관에 있으면 빌려 올게.”

“지의야, 이제 갈까?”

그때 자매의 엄마가 커튼을 걷으며 조용히 말을 걸었다. 지의는 아쉬운 듯 매우 느리게 몸을 일으키곤 침대 밑에 벗어놓은 운동화를 구겨 신은 후 몸을 돌려 자신의 동생을 쳐다보았다.

“내일 또 올게.”

“응! 꼭 와야 돼?”

지유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또래보다도 훨씬 작고 야윈 손가락이었다. 지의는 그 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걸며 엄지손가락을 꾹 눌렀다.

“알겠어. 꼭 갈게.”

사아아―

자매의 손가락이 떨어지자 지의를 둘러쌌던 병실 풍경이 물에 씻겨 나가듯 흐려지더니 순식간에 놀이터로 바뀌었다.

미끄럼틀과 그네 주변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다. 공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놀이터 전체를 울릴 정도로 컸다.

“야, 신지의 쟤를, 허억, 어떻게 잡아!”

“아하하!”

지의가 술래 역할을 맡은 아이를 따돌리며 크게 웃었다. 그 아이는 숨을 헐떡이며 땅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도 지의네 반이 계주 이기는 거 아니야?”

“너 솔~직히 말해. 스킬 있지?”

“계주 이기면 쌤한테 피자 사달라고 하자!”

칭찬 섞인 말에 우쭐한 마음이 든 지의가 실실 웃었다. 뻔뻔하게 대꾸하고 싶었지만 칭찬을 듣는 건 지의에게 있어 늘 낯선 일이었기에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앗.”

술래잡기를 하던 아이가 갑자기 가방을 챙겼다. 지의와 다른 아이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방을 챙긴 아이가 입을 열었다.

“나 피아노 학원 가야 돼. 내일 봐!”

“안녕~”

‘아, 나도 이제 지유 병원 가야 하는데.’

지의는 그제야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한쪽에 던져놓은 자신의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방엔 동생을 위해 빌린 소설과 급식으로 나온 초코바가 들어있었다.

“그럼 우린 한 판 더 하자!”

“어. 나도 어차피 이따 태권도 학원 가야 돼.”

“지의야, 너도 할 거지?”

숨을 고르던 아이가 지의를 향해 물었다. 지의는 가방과 아이들을 번갈아 보았다.

‘딱 한 판만 더 하고 갈까?’

놀이터에 있는 시계는 세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지유를 만나러 가기로 한 시간과는 좀 멀어졌지만 면회 가능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다. 지의는 가방에서 시선을 떼고 친구들 무리에 섞였다.

쨍그랑.

놀이터의 풍경이 반으로 쪼개졌다. 지의가 흠칫 몸을 떨며 주위를 둘러보자 얼마 안 있어 공간이 다시 원래의 상태를 찾았다. 놀이터의 정중앙에 있던 시계만이 네 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 지의야. 저기 너희 아빠 아니야?”

그때 친구가 놀이터 입구 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지의가 곧장 고개를 돌리자 놀이터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오는 자신의 부친이 보였다.

그가 지의의 손목을 잡고 놀이터 밖으로 질질 끌었다.

“나, 나 가방.”

그러나 지의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아이의 아빠는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결국 지의의 친구가 가방을 가져다주었다. 지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제 부친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강압적인 태도에 지의는 덜컥 겁을 먹었다. 적막한 분위기도 싫고 혼나는 것도 싫어서 변명을 늘어놓기로 했다.

“나 진짜 지금 가려고 했어! 오늘 종례도 늦게 끝났고…….”

“…….”

“지유가 나 많이 기다렸…….”

짝.

지의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커다란 손바닥이 지의의 뺨을 내리쳤다. 지의의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지의는 오른쪽 볼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손을 올린 적 없던 제 부친이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의가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제 앞에 무릎을 꿇은 부친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삐―

지의의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부친의 울음소리가 다 묻힐 정도로 큰 소리였다.

하지만 한참 시간이 지나도 소리가 끝나지 않자, 지의는 그제야 이 소리가 이명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다.

지유의 죽음을 알리는, 사망 선고였다.

* * *

퍽, 퍼억.

“갑자기 이상한 게 껴서……. 야, 가자.”

“아이 씨, 재수가 없으려니.”

교복을 입은 무리가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그러자 넘어져있던 두 사람의 형체가 드러났다.

“괘, 괜찮아……?”

아까까지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던 여학생이 지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의는 교복을 탁탁 털곤 먼저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 여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을 잡자 지의가 끌어당겨 일으켜주었다.

“괜찮아. 학교엔 당장 신고해. 내가 다 찍어놨어.”

“지, 지, 진짜?!”

여학생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근데… 왜 날 도와준 거야?”

“…어?”

“아, 아니, 안 고맙다는 게 아니야! 진짜 정말 고마워! 그냥 내 말은…….”

여학생이 눈동자만 굴려 지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이 모르는 사이잖아.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왜 날 도와준 건가 궁금해서…….”

지의는 텅 빈 눈으로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순수한 질문에 뭐라 답을 해줘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지유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그날부터 지의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다.

한 번 맺은 약속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지켰다. 절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자신이 다치더라도.

지유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도움이 되는 언니가 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부탁을 들어주는 존재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러다 다쳐도 싼 인간이지, 난.’

본인이 희생하고 있다고 자각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지 1년이 지난 후.

[각성자 신지의]

[빛 속성 개방]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 개방]

[S급 공격계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

[‘호령여산 (號令如山)’ : 자신의 목소리로 상대를 공격한다. 시전자가 아군으로 인식한 존재에게는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지의는 정체불명의 던전에 떨어져 S급 스킬과 함께 각성했다.

그리고 상태창을 보자마자 지의가 떠올린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제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구나.’

* * *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 빼고 다른 소원은 다 되는 거지?”

“그러어엄~”

창조자의 제안에 지의는 고민에 빠졌다. 지유를 살리는 것 말고 다른 소원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내 좋은 생각이 났는지 창조자 쪽으로 몸을 살짝 숙였다.

“내가 이 부적 잘 보호해서 세상이 안 망하면, 내 동생이 살아있는 삶을 살게 해줘.”

“…가상 세계를 만들어 달란 얘기야아?”

“가상 세계가 됐든 꿈이 됐든, 뭐든 좋아. 내 동생이랑 평화롭게 사는 인생을 한 번만 살게 해줘.”

창조자는 두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곤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간은 아주 바보 같구나.’

그동안 자신이 사도로 삼았던 자들은 전부 지금 필요한 소원을 빌었다. 누군가는 길드 전쟁에서 이길 힘을, 다른 누군가는 모두를 속일 수 있는 연기력을.

하지만 지의의 소원은 달랐다. 그의 소원은 창조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이후에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창조자는 지의의 소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자신의 파편이 무사히 ‘지옥도’의 재료가 되면 그런 소원은 애초에 없던 게 되니까.

“알겠어어~ 그럼 사도 계약 완료오~”

맞잡은 손 사이에서 검푸른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지의를 덮치자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퍽.

엉망진창이 된 지의의 신체는 공중을 떠다니다 지옥도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그 X끼랑 손을 잡으면 안 됐는데.’

지의는 땅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감각이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멍청한 삶을 영화처럼 보고 있다면 세상에 둘도 없을 싸구려 코미디 영화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의의 심장은 서서히 존재감을 죽였다. 지의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세상이 당신을 원한다.]

[세상이 당신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삼는다.]

그리고 그의 멍청한 삶을 영화처럼 보고 있던 세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원자의 권능]

[말의 힘]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구원자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순간]

[구원자의 말은 현실이 된다.]

그러곤 그를 세상을 구할 구원자로 삼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대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할 존재였기 때문에.’

지의는 눈앞에 뜬 황금색 글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창조자의 사도 계약과 다를 바가 없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하지만 입으로는 또다시 자신의 바람을 말하고 있었다.

“각성 전으로… 시간을 돌려…….”

[‘말의 힘’ 발동 시 구원자의 인과율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말의 힘’ 발동]

[범위 : 이 세상의 모든 시간선]

[시간선 되감기]

[구원자의 인과율 증가]

[구원자 인과율 1% 달성]

[생태계 변화]

[시간선 초기화]

불우한 구원자의 첫 번째 회귀였다.

* * *

첫 번째 회귀. 지의는 각성과 동시에 회귀 사실을 폭로하지만 미친 사람 취급받으며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리고 첫 파견을 나가기도 전에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회귀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면 안 돼.’

지의는 그 점을 인지하며 회귀한다.

[구원자 인과율 2%]

두 번째 회귀. 지의는 각성 직후 잠적했다. 혼자서 창조자의 파편과 사도를 찾아 나섰지만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그대로 지옥도를 마주했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의는 동료를 갈망하며 회귀한다.

[구원자 인과율 3%]

세 번째 회귀. 지의는 각성 후 정식으로 헌터가 되어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클랜에 가입하고 동료를 만들었지만 정작 지옥도를 마주했을 때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헌터는 없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지?’

지의는 좌절하며 회귀한다.

[구원자 인과율 4%]

네 번째 회귀. 지의는 그냥 포기했다. 각성 후 잠적했다. 집에서 지옥도를 마주하며 다시는 회귀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살고 싶어.’

지의는 죽을 용기조차 없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며 회귀한다.

[구원자 인과율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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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번째 회귀. 지의는 태양을 삼킨 늑대를 만났다. 그것과 함께할 때만큼은 행복감을 느꼈다.

서른한 번째 회귀. 지의는 민에게 회귀 사실을 고백했다.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 함께 싸우다 지옥도 등장 이후 그의 눈앞에서 사망했다.

쉰여덟 번째 회귀. 지의는 사도 ‘가면’의 존재를 알아냈다.

예순다섯 번째 회귀. 지의는 배신자의 존재를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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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일곱 번째 회귀. 지의는 모든 정보를 모았다. 사도 네 명과 배신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힘이 조금 부쳐서 이번 시간선에선 실패했지만 다음번엔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지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인간성을 버리며 회귀한다.

[구원자 인과율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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