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이런, 이런. 결국 내가 나서야만 했나.”
“이제 포기하시죠, 아버지.”
또다시 부자간의 대화가 시작된 틈을 타 자아에 목소리를 주입했다.
지금쯤 4일째에 접어들기 직전이겠지. 남은 3, 4페이즈를 무난하게 넘긴다면 일단 신기록은 확정이다.
“오랜만에 상대하려니 약간 긴장되는군.”
하미준 헌터가 헌터용 에너지바를 입에 쑤셔 박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초근접전으로 싸우는 헌터들은 열량 소모가 큰 건지, 세빈이도 헌터용 육포를 열심히 먹는 중이었다.
“3페이즈 대형은 정석대로 가나요?”
차도윤 헌터가 입을 열었다. 3페이즈의 ‘진(眞) 크로노스’는 제자리에서 낫만 휘두르긴 하지만 범위가 워낙 넓기도 하고, 불규칙적으로 불꽃 구체를 뿜어대는 터라 상대하기 좀 까다로웠다.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전방에 저와 하미준 헌터, 후방에 차도윤 헌터, 그리고 지의가 공중을 맡는 걸로 하죠.”
세빈이가 진(眞) 크로노스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시선을 제우스 쪽으로 옮겼다. 제우스는 진(眞) 크로노스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같잖은 기 싸움 중이었고 신전의 정중앙에 서있었다.
중심축으로 쓰기에 딱 좋은 위치네.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미준 헌터가 왼쪽, 세빈이가 오른쪽이 좋겠어요. 세빈이의 공격 범위가 더 넓은 편이니까 그게 더 안전할 거예요.”
“신지의 헌터 베테랑 다 됐네.”
하미준 헌터가 씩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럼 다들 불꽃 조심하고, 무사히 4페이즈로 넘어가자고.”
제우스와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각자의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나도 공중으로 뛰어올라 진(眞) 크로노스의 정수리가 보이는 위치에 서서 자아를 고쳐 쥐었다.
“어디 한번 도전해 보거라!”
콰광!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진(眞) 크로노스가 낫을 가로로 휘둘렀다. 앞에 있던 기둥 두 개가 반으로 갈라져 밑으로 떨어졌다. 기둥이 떠받치고 있던 지붕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무줄기가 기둥 밑에서 솟아나 기둥이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웠고 천장이 무너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진(眞) 크로노스의 손 위에 불꽃이 솟아있었지만 아직까진 우리를 향해 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저게 언제 튀어나오는지만 알아도 훨씬 편할 텐데 말이지.’
퍼버벙!!
차도윤 헌터의 화살이 가장 먼저 진(眞) 크로노스를 공격했다. 자아에서 뽑혀 나온 굵은 탄환도 놈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끼긱.
“쳇…….”
진(眞) 크로노스가 낫을 휘둘러 탄환의 궤도를 살짝 바꿨다. 확실히 중상급 S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 정도 되니까 공격을 어느 정도 버텼다.
탄환은 신전 구석에 박힌 후 장식되어 있던 도자기 몇 개를 깨트리며 소멸했다.
“커헉!”
그때 검은 그림자 손이 진(眞) 크로노스의 목을 졸랐다. 그림자의 끝을 쥐고 있는 세빈이가 녀석의 뒤로 돌아가 목을 뒤로 꺾었다.
‘찬스다!’
녀석의 목구멍을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 자식…들이!”
진(眞) 크로노스의 손바닥에 있던 검은 불꽃이 점점 크기를 불리더니 갑자기 사방으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콰과광!!
신전 바닥 곳곳에 구멍이 뚫리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얼굴에 훅 끼치는 열기 때문에 폐부에 뜨거운 숨이 들이찼다. 폐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아서 팔뚝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콜록! 콜록!”
자욱한 연기와 불꽃의 틈새로 진(眞) 크로노스가 낫을 쳐드는 것이 보였다.
아까는 가로로 베더니 이번에는 바닥으로 찍으려고 하는구나.
자아를 입가로 가져왔다.
“옆으로 피하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낫이 바닥을 찍었다. 빙하가 깨지듯 바닥에 금이 갔고, 순식간에 신전 바닥 전체가 반으로 갈라졌다. 지붕에서 돌가루가 떨어지고 하미준 헌터의 스킬로 묶어뒀던 기둥도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신전 자체가 무너지기 일보직전처럼 보였다.
“엄청 뜨겁네.”
낮은 중얼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빈이가 천장에 쪼그려 앉은 채 진(眞) 크로노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긁힌 상처를 제외하곤 멀쩡했다.
콰드득.
먼지바람 틈에서 굵은 나무줄기와 함께 하미준 헌터가 튀어나왔다. 나무줄기는 바닥에 박힌 진(眞) 크로노스의 낫을 단단히 묶어 땅에 고정시켰고, 당황한 녀석이 낫을 양손으로 꽉 쥔 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하미준 헌터가 나를 향해 가볍게 윙크를 날렸고, 난 곧바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콰과광!!
평소보다 크게 탄환을 뽑아내 진(眞) 크로노스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검은 그림자 손이 목을 조르자 진(眞) 크로노스는 손톱으로 그림자 손을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러댔다.
“조심하세요!”
차도윤 헌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이 낫을 놓고 양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커다란 화염구체들이 운석처럼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퍼버벙!!
“윽!”
피할 틈이 없어 실드로 막았다. 실드를 지탱한 손바닥에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이 퍼졌다. 나는 실드를 위쪽으로 던지며 바닥으로 착지했다. 시뻘겋게 익은 손바닥이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분명 불꽃 방출 패턴이 따로 있어.’
숨을 잠깐 돌리며 진(眞) 크로노스를 살폈다. 녀석은 하미준 헌터의 나무줄기를 전부 태워버린 후 자신의 낫을 들어 올렸다. 녀석의 손에는 또다시 검은 화염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서걱.
그때 세빈이가 갑자기 진(眞) 크로노스의 눈앞에 나타나 녀석의 얼굴을 가로로 베었다.
“크아아악!! 이 우매한 인간들이이!!”
콰과광!!
“세빈아!”
그와 동시에 검은 화염이 진(眞) 크로노스의 주변을 순식간에 불태웠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느낄 새도 없었다. 공간 여기저기를 불태우는 진(眞) 크로노스의 불꽃 때문에 피해 다니기 바빴다.
‘잠깐, 그러고 보니 공격 이후마다 불꽃이 터지지 않았나?’
공중으로 높이 도약해 화염구와 열기를 피하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맞게 본 거라면, 지금까지 진(眞) 크로노스는 자신이 공격을 받을 때만 저 검은 화염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공격을 모아서 한 번에 제압해야 해.
또각.
그때 세빈이가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와 천장에 착지했고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화상을 입은 손등에 들이부었다.
“불꽃 패턴 알아냈… 윽!”
쾅!
그 순간 세빈이가 날 자기 품으로 끌어당기며 ‘영’으로 진(眞) 크로노스의 낫을 막았다. 그러곤 곧바로 지면에 착지해 차도윤 헌터 쪽으로 나를 보냈다.
“괜찮아요?”
“손바닥 까진 게 다예요.”
차도윤 헌터가 ‘하늬바람’을 시전하는 동시에 ‘나팔꽃’의 시위를 당겼다.
“잠깐! 공격하지 말아봐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의문]
“하미준 헌터! 강세빈! 다들 공격하지 말고 방어만 해요!”
“뭐라도 알아낸 거야?”
최전방에서 커다란 낫을 막던 세빈이와 하미준 헌터가 고개만 살짝 돌렸다.
“저희가 직접적으로 공격할 때마다 화염 공격을 하는 패턴이에요.”
“불규칙적인 공격이 아니었군.”
쾅!
진(眞) 크로노스의 낫이 이번엔 나와 차도윤 헌터를 노렸다. 공격 대신 옆으로 굴러 피하자 녀석은 다시 낫을 거두고 다른 공격을 준비했다.
“한 번에 공격을 쏟아붓고 회피하는 방식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럼 공격 직후 제가 천재지변으로 최대한 불을 밀어볼게요.”
“차도윤 헌터만 믿을게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줍음]
‘하여간 이 인간, 칭찬에 참 약해.’
하긴, 그런 부모들 밑에서 칭찬은커녕 제대로 된 대우도 못 받고 살았을 테니까 그럴 만도 하다.
“오케이, 그럼 신지의 헌터가 신호 줘.”
하미준 헌터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진(眞) 크로노스의 머리보다도 높게 뛰어올랐다. 녀석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건지 이따금씩 낫을 전방으로 흔들 뿐 큰 공격은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 같고…….’
곁눈질로 헌터들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곧바로 자아를 입가로 가져왔다.
“지금이에요!”
자아에서 빠져나온 묵직한 소리 탄환이 새하얀 궤적을 남기며 녀석의 이마를 향해 날아갔고, 그것이 명중하기 직전 세빈이가 녀석의 머리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바람 화살도, 굵직한 나무줄기도 일제히 녀석의 목을 노렸다.
콰과과광!!
그리고 공간 자체를 뒤흔드는 강한 충격이 신전 전체를 울렸다.
“크아아악!!”
“차도윤 헌터!”
“알고 있어요!”
휘이이잉―
까칠한 대답과 함께 강한 바람이 진(眞) 크로노스를 향해 불기 시작했다.
“인간 주제에 까불지 마라!”
퍼버벙!
진(眞) 크로노스가 양손으로 화염구를 날렸다. 피부에 닿는 열기는 그대로였지만 우리를 집어삼키지는 못했다. 상대적으로 느리게 날아오는 화염구를 가볍게 피한 후 난 진(眞) 크로노스를 향한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콰그작.
자아를 작살 총 형태로 바꿔 녀석의 앞에 빠르게 착지한 후 곧바로 박격포 형태로 만들었다.
‘이걸로 마지막 페이즈로 가자!’
경악으로 물드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잡히기 무섭게 검은 낫이 코앞까지 들이밀어졌다. 간발의 차로 뒤로 굴러 피했고, 동시에 공기가 크게 진동했다.
콰과광!!
진(眞) 크로노스의 몸이 터지는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제 위치를 지키던 신전 지붕마저 무너졌다.
“이, 이놈들이이이!!”
악에 받친 절규와 함께 진(眞) 크로노스의 몸이 떨어진 조각상처럼 볼품없이 깨졌다.
쿠구구궁.
녀석이 앉아있던 왕좌도 같이 무너져 내렸고 신전 지붕의 잔해도 그 위로 떨어졌다. 검은 먼지바람이 얼굴 위로 훅 끼쳤다. 자아 쪽으로 손을 뻗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아가 내 손안에 쏙 들어왔다.
“기특하다 못해 존경스러울 정도구만.”
“괜찮았나요?”
“압도적이었지.”
하미준 헌터 대신 세빈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곤 대답했다.
“4페이즈로 넘어가기 전에 빠르게 치료부터 하죠.”
차도윤 헌터가 진(眞) 크로노스 쪽을 바라보며 하늬바람을 시전했다. 녀석은 우리의 공격과 신전 잔해에 완전히 깔렸고, 너덜너덜해진 손만 삐져나와 있을 뿐이었다. 일정 체력으로 내려간 수준이 아니라 죽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모습인데, 아직 우리에겐 마지막 페이즈가 남아있었다.
“시간 얼마나 지났어요?”
“4일 1시간 25분. 신기록은 이미 확정이고, 얼마나 시간을 단축할지가 궁금하군.”
하미준 헌터가 다시 타이머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중간에 제대로 쉬지 않아서 이제 슬슬 몸이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집중력 흐트러지면 안 된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이 멍청하고 우매한 인간들이이……!”
“얘들아, 조심해! 아버지의 상태가 이상해!”
아까까지 가운데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던 제우스가 갑자기 우리를 돌아보더니 진(眞) 크로노스를 가리켰다.
쿠구구.
굳이 제우스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이다음부터 진(眞) 크로노스가 인간 크기가 되어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는 것쯤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투쾅!
신전의 잔해들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빨려 들어가고 커다란 진(眞) 크로노스도 깃털처럼 둥실 떠올랐다. 구멍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신전 안을 떠다니는 먼지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를 노려보며 거대한 낫을 양손에 쥔 진(眞) 크로노스가 이내 하늘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내 왕좌는 절대 넘볼 수 없다!!”
마지막 페이즈를 알리는, 절대신의 포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