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인간치고 꽤 하는구나. 나의 신전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
“기다리십시오, 아버지!”
‘잡은 건 우린데 유세는 지가 다 떠네.’
제우스는 또 우리한테 숟가락만 얹었다. 마음 같아선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어차피 그냥 통과될 걸 알기에 상상에서 멈췄다.
두 페이즈를 동시에 넘길 만큼의 말도 안 되는 공격 후의 풍경은 모든 걸 쓸어버린 이후라 그런가, 오히려 평화로웠다. 제3 형태 박격포는 원래 땅에 놓고 써야 하지만, 시간이 살짝 지체된 것 같아 과감하게 공중을 택했다.
‘사실상 도박이었지.’
공중에서 조립이 잘 될지, 포구가 정확히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을 향할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던 불확실함투성이의 공격이었다. 공격이 들어간 게 기적 그 자체였다.
세빈이와 하미준 헌터의 포박, 그리고 차도윤 헌터의 지속적인 공격이 아니었다면 시도도 못 해봤을 것이다.
텁.
“음? 왁!”
그때 무언가가 내 허리를 낚아채 밑으로 끌어당겼고,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누군가의 품에 안착했다.
“다친 데는 없어?”
“강세빈!”
아까까지 모습을 감췄던 세빈이가 해사하게 웃으며 날 내려주었다. 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세빈이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강세빈 헌터 고유 스킬 중에 은신계 스킬 있잖아.”
하미준 헌터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은신계 스킬 있으면 있다고 말해도 되는데, 왜 굳이 숨기는 거지? 오해받기 좋은 스킬이라 그런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차피 전투 상황에서만 쓸 텐데 그게 뭔 상관이야?
“어디 있었어?”
“계단 쪽에 숨었어요.”
하미준 헌터의 질문에 세빈이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영’을 다시 팔찌로 돌려놓았다.
“아, 맞다. 지금 기록 얼마나 나왔어요?”
“어디 보자.”
내 질문에 하미준 헌터가 인벤토리에서 타이머를 꺼냈고 한쪽 눈썹을 올렸다.
3일 3시간 21분
현재 최고 기록은 멕시코 파견 팀이 보유한 5일 21시간 초반 대. 보스전에서 허송세월만 안 하면 신기록은 확정이다.
고개를 들어 하미준 헌터를 보자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멋있게 페이즈 스킵을 해준 덕분이지.”
“S급 페이즈 스킵은 처음 봤어.”
세빈이가 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내 축복은 얼마나 남았지…….’
조용히 상태창을 열어 구석에 박힌 글자를 바라보았다.
[축복]
[심마니]
[‘심마니’ : 나타났다 하면 최상급 아이템을 쏙쏙 뽑아내는 심마니의 축복. 심마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던전에서 최상급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대폭’ 상승한다.]
[지속 시간 : 3일 1시간 9분 32초]
망할, 이번에 못 얻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
“뭐 해, 어서 와!”
그때 제우스가 우리에게 손짓하며 열심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슬슬 이동하죠.”
차도윤 헌터가 ‘하늬바람’을 시전하는 동시에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계단은 구름을 뚫을 정도로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있었다. 보스전을 앞둔 마지막 이동이기 때문에 인벤토리에서 기력 회복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윽.”
지나치게 떫은맛에 헛구역질이 올라왔지만 물로 입을 헹궈서 역류하는 건 겨우 피했다.
구름을 뚫고 계속 올라가자 신전의 기둥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우스도 좀 지쳤는지 아까보다 느린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이젠 진짜로 고지가 눈앞인 것 같은데.
“허억, 후…….”
정말로 오르다가 천국 갈 뻔한 계단이 끝났고, 우리는 모두 거대한 신전 앞에 섰다.
새하얀 기둥과 뾰족한 지붕, 신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모습의 건축물이었다.
방전된 자아에 목소리를 주입하며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터벅, 터벅.
내부는 허허벌판이었다. 사람은커녕 벌레 한 마리 없었고, 가장 안쪽에 검은 실크가 커튼처럼 쳐져 있을 뿐이었다. 저 안쪽에 100% 크로노스가 있을 것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보스전은 총 4페이즈야.”
하미준 헌터가 검은 실크 커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1에서 2페이즈는 크로노스가 소환한 몬스터랑, 3과 4페이즈는 크로노스랑 직접 싸우게 되지.”
“3페이즈까진 그래도 괜찮은데, 4페이즈가 까다롭죠.”
세빈이가 손가락을 턱에 갖다 대며 기억을 천천히 더듬었다.
‘하긴, 4페이즈의 크로노스는 완벽한 인간형이니까.’
그리스 S급 던전 보스전의 4페이즈는 평범한 인간 크기가 된 크로노스와 싸우게 된다. 인간과 닮은 몬스터일수록 지능이 높고 공격에 쉽게 맞아주지 않기 때문에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터벅.
앞서 가던 제우스가 커튼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곤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름 결연한 표정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제우스와 함께 크로노스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과 똑같은 크기의 늙은 남자가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풍성한 수염이 얼굴을 거의 다 뒤덮고 있었고, 제우스와 똑같이 천으로 몸을 가린 차림이었다.
“이제야 직접 만나는군요, 아버지!”
“네 이놈 제우스…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말았구나!”
“현신과 싸우면서 아버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많이 상상했습니다. 제가 상상한 대로 아주 탐욕스러운 얼굴을 하고 계시군요.”
“탐욕이 아니다. 절대신의 위엄이지.”
그리스 헌터 협회가 정한 보스 몬스터의 공식명은 ‘진(眞) 크로노스’. 어둠 속성이지만 소환계 스킬과 화염 스킬도 쓰는 몬스터다. 아, 그리고 정신계 스킬까지.
난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진(眞) 크로노스]
[1페이즈와 2페이즈 땐 무적]
[3페이즈부터 직접 싸움. 거인 상태]
[불규칙적으로 화염구 방출. 절대 안 꺼짐]
[4페이즈 돌입 시 지능 대폭 상승. 기습에 주의]
“그래, 알았다. 네가 말하는 대로 나의 형제들인 키클롭스와 헤카톤케이레스들을 꺼내주마.”
양쪽 눈으로 녀석을 다시 응시할 때쯤 진(眞) 크로노스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쿵!
땅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와 함께 맨홀처럼 동그랗고 커다란 철문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시커먼 연기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었고 불길한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의 호의를 의심하는 듯 그 문을 노려보았고, 우리도 전투태세를 취하며 문을 바라보았다.
“이, 이건 타르타로스의 문……!”
제우스가 입을 틀어막으며 경악했다.
“그들이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는 안 했지만 말이다.”
“젠장,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자, 가라. 나의 형제, 키클롭스여! 가서 저 오만한 조카의 버릇을 고쳐놓거라!”
“그어어어…….”
눈이 하나만 달린 거인 세 명이 ‘타르타로스의 문’에서 기어 나왔다. 그들의 이마엔 진(眞) 크로노스의 암시를 받았다는 걸 나타내듯 검은색 낫 문양이 각인되어 있었다. 흉측한 생김새와 커다란 몸집에 약간 위압감을 느꼈지만 자아를 더욱 강하게 쥐며 심호흡을 했다.
콰과광!
새하얀 번개가 내리꽂혔다. 땅에 닿자마자 바닥 전체에 퍼진 전기를 피해 위로 도약했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키클롭스 삼형제가 나무 몸통만 한 팔을 휘둘렀다. 무게 때문에 느린 공격이라 피하는 건 쉬웠지만, 한 대라도 맞았다간 어딘가 제대로 부러졌을 것이다.
무의미하게 허공을 가르는 느린 주먹을 피하며 키클롭스 삼형제 중 하나의 눈에 소리 탄환을 발사했다. 녀석이 눈앞으로 급히 손을 가져왔지만 탄환은 손을 그대로 통과하며 결국 눈에 명중했다.
“우어어어!!”
“하미준 헌터, 조심해요!”
“걱정 마~”
쿠웅!
휘청거리던 녀석이 결국 뒤로 넘어가더니 하미준 헌터가 서있는 쪽으로 쓰러졌다.
하미준 헌터는 재빠르게 옆으로 피하는 동시에 누워있는 키클롭스의 목을 나무줄기로 단단히 조였다. 키클롭스는 손으로 나무줄기를 뜯으려 했지만 굵은 손가락과 뭉툭한 손톱으로는 날카로운 나무줄기를 떼어낼 수 없었다.
그때 세빈이가 천장에 발을 디딘 채로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는 칼날을 눈이 먼 키클롭스에게 향하도록 영을 고쳐 쥐더니 바닥으로 하강했다.
서걱.
“쿠오오오오!!”
영이 키클롭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시커먼 피가 솟구쳤고, 세빈이는 그 틈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밀어 넣었다. 그림자 손은 키클롭스의 상처를 더욱 벌리며 사지를 꽉 눌렀다.
탕!!
녀석의 머리에 소리 탄환이 묵직하게 박혔다. 키클롭스는 온몸을 파르르 떨다 이내 축 늘어졌고, 바닥으로 흡수되었다.
“형제들이여, 무얼 하는가! 어서 일어나서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라!”
커다란 눈알이 일제히 나를 응시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우으아아!!”
“크어어!”
키클롭스 형제의 이마에 있던 문양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키클롭스 형제가 발을 구르더니 이번엔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그작.
두꺼운 나무줄기가 녀석의 주먹을 막았고, 그 뒤에 있던 하미준 헌터가 뒤로 굴러 공격을 피했다.
‘부상 입은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나무줄기 주변에 새빨간 핏방울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우우우웅―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겼다. 공기가 강렬하게 진동하며 키클롭스의 속을 헤집었고, 두 녀석은 머리를 감싸 안으며 괴로워했다.
자아를 작살 총 형태로 바꾼 후 땅에 박아 넣었고, 단숨에 착지했다.
“하미준 헌터, 괜찮아요?!”
“긁힌 거야. 괜찮아.”
하미준 헌터의 허벅지에서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고유 스킬에서 떨어져 나온 얇은 나무껍질로 상처를 누르고 있었지만 지혈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엔 이 부상이 발목을 잡을 거야.’
“차도윤 헌터!”
후드드득
“크어어어!!”
차도윤 헌터를 부르자마자 초록빛 화살비가 키클롭스들을 덮쳤다. 목숨을 끊지는 못했지만 꽤 중상을 입은 듯 녀석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무슨 일이시죠.”
“하미준 헌터 치료 좀 해주세요. 시간은 저랑 세빈이가 벌게요.”
차도윤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쿵, 쿵.
그들의 주위로 실드를 세운 후 다시 ‘낮말을 듣는 새’로 높이 도약했다.
화살비의 고통에 조금 적응된 건지 키클롭스들이 다시 위협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미준 헌터는?”
그때 세빈이가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나타났다. 얼굴엔 키클롭스의 피가 약간 튀어있었다.
“차도윤 헌터가 치료 중이야.”
“최대한 이번 일격으로 끝내야겠네.”
씩 웃으면서 무릎을 굽힌 세빈이가 천장에 거의 앉다시피 자세를 낮췄다.
“어떻게 해줄까?”
세빈이의 검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고 키클롭스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녀석들은 몸이 둔한 대신 방어력이 높다. 내 공격 중 가장 파괴력이 높은 박격포 형태의 소리 포탄만이 녀석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을 공격했던 것처럼 최대한 가까운 위치에서.
다시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내 지시를 기다리는 예쁜 눈동자가 밤하늘처럼 반짝거렸다.
“쟤네들, 꼼짝 못 하게 팔 좀 묶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