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83화 (83/366)

83화

“어차피 죽을 인간을 욕해 봤자 남는 건 없으니 말이다.”

“허억, 허억, 헉.”

온몸은 차갑게 식었지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로 뜨거운 공기가 들어왔다.

‘내가 지금 저 자식의 말이 들리는 걸 보니 목숨은 붙어있구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갑자기 낫을 휘둘러 불꽃 구체를 방출했다. 녀석이 소멸할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을 불길이 내 몸을 집어삼키기 전에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실드를 뽑았다. 두꺼운 실드 너머로 불길이 무섭게 일었지만 다행히 실드를 깨트리진 못했다.

“앗, 뜨거워!”

아무리 실드를 두껍게 뽑아도 손바닥을 타고 열기가 전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손을 댔다간 정말로 손바닥 전체에 물집이 잡힐 것 같았다. 실드에서 손을 뗀 후 곧바로 위로 도약했다.

‘일단 연기부터 걷어내자.’

우우우웅―

자아를 들어 자욱한 연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음파가 공기를 타고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얼마 안 있어 투웅, 하고 공기가 울렸고 잿빛 연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켈록! 콜록!”

겨우 눈을 떠 밑을 내려다보자 나무줄기로 몸을 포박당한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있었고, 이따금씩 ‘하늬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다들 어디에 있는 거지?

지면을 향해 빠르게 착지한 후 주위를 둘러보자 솟아있는 두꺼운 나무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하미준 헌터! 괜찮아요?!”

“어! 신지의 헌터!”

나무줄기 뒤쪽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의 하미준 헌터가 튀어나왔다. 얼굴에 가벼운 상처가 생긴 것 빼고는 멀쩡했다.

하미준 헌터는 나를 흘끔 보면서도 손으로는 계속해서 나무줄기를 뽑아냈다. 하지만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 주위를 맴도는 검은 불꽃 때문에 금방 재가 되었다.

퉁―

끊어진 굵은 나뭇가지 하나가 우리를 향해 맹렬하게 떨어졌다. 곧바로 그쪽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나뭇가지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미준 헌터가 내 머리에 떨어진 나뭇가지 잔해를 털어주며 싱긋 웃었다.

“큰일 날 뻔했군.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네. 혹시 세빈이랑 차도윤 헌터는 못 봤어요?”

“차도윤 헌터는 제우스 옆에 있어. 강세빈 헌터는 폭발 직전에 저 녀석 발목 끊는 것까진 봤는데, 그 이후론 전혀 안 보이네.”

그림자로 뭔갈 하더니 유효타를 먹이긴 먹였구나.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발목을 보니 검은 용암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보이는 거야!’

정신계 스킬에 면역 있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어느 순간부터 겁 자체를 상실한 것 같은 모습이 종종 보였다. 방심하다 공격을 당했을까 봐 마음 한켠이 영 불안했다.

“걱정 마. 강세빈 헌터 고유 스킬 중에 은신계 스킬 있잖아.”

“…네?”

“아.”

순간 하미준 헌터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고, 난 까치발을 들어 하미준 헌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강세빈 헌터가 신지의 헌터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세빈이 고유 스킬 세 개 중에 하나가 은신계예요? 왜 말하지 말래요?”

콰드드득.

그때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나무줄기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녀석이 낫을 든 팔을 휘둘러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을 쳐내자 나무줄기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무튼 강세빈 헌터 무사할 거야.”

‘진짜 이번 시간선의 강세빈, 여러모로 사람 걱정되게 하네…….’

그래, 세빈이는 어딘가에 잘 있을 것이다. 지금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목숨을 끊는 일이다.

* * *

―현재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광역 공격으로 송신 상태가 원활하지 않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리스 S급 던전 타임 어택 2일 차 전투를 시청하고 계십니다.

―아! 지금 복원됐네요! 다행히 무사한 것 같습니다! 근데 강세빈 헌터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세빈 헌터가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발목을 끊는 모습만 카메라에 포착이 되었는데요. 그 부분 화면으로 만나보겠습니다.

던전의 모습을 보여주던 화면이 두 개로 갈라졌고, 오른쪽에 ‘1분 전 상황’이라는 자막과 함께 살짝 멀리서 촬영한 세빈의 모습이 떠올랐다.

세빈은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제우스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녀석의 그림자 뒤로 이동했고,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사방을 불태우는 동시에 그의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 손을 뽑아냈다.

그림자 손들이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오금을 정확히 가격했고, 앞쪽으로 중심이 쏠린 녀석의 발목 뒤 힘줄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틈에 세빈이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발목을 단칼에 베었다.

모자이크 처리된 피분수와 함께 세빈은 모습을 감췄고, 화면은 다시 현재의 상황을 비추는 카메라로 바뀌었다.

[LIVE 실시간 채팅]

[ㄷㄷ]

[왜 내 발목이 아픈 거임?]

[ㅈㄴ살벌하다]

―이야… 대단하군요.

―강세빈 헌터의 행방이 묘연해진 가운데, 또다시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화염구를 방출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 타오르면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소멸할 때까지 절대 꺼지지 않는 불이라 주의해야 할 텐데요!

콰과광!

화면은 시커먼 연기로 가득했다. 지의는 운석처럼 떨어지는 불공을 피하며 위로 도약했고, 미준도 옆으로 피하며 이미 썰린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발목을 나무꾼으로 한 번 더 찍었다.

―이번에도 하미준 헌터가 제압, 신지의 헌터가 공격을 맡을 것 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어딘가에 숨어있던 차도윤 헌터가 등장했습니다!

수풀 뒤에서 튀어나온 도윤이 ‘나팔꽃’의 시위를 놓았다. 초록빛 화살이 주변에 있던 모든 바람들을 모아 불길을 단번에 몰아내자 화염구는 궤도를 바꿔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 쪽으로 돌아갔다.

곧이어 도윤이 하늘을 향해 화살을 한 번 더 쏘자 바람 화살이 수십 개로 갈라져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머리를 일제히 노렸다.

―역시 바람 속성! 불 속성 공격을 방어하는 데엔 바람만큼 좋은 게 없죠!

―차도윤 헌터의 바람 화살이 꽂히는 동시에 벼락이 내리꽂힙니다!

[LIVE 실시간 채팅]

[진심 꾸준딜의 의인화]

[한방은 없는데 막상 보면 공격 개잘들어가있음]

[가랑비딜 ㄷㄷㄷㄷ]

[ㅆㅂ 가랑비딜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도윤이 예쁘다]

그때 화면이 지의를 비췄다. 지의가 ‘낮말을 듣는 새’로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자아로 탄환을 박아 넣자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다시 전방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현재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 1페이즈 함께하고 계십니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은 총 3페이즈로 진행되는데요. 1페이즈의 경우 화염구 공격, 2페이즈는 용암 바닥, 그리고 3페이즈는 드래곤 형태로 변한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과 싸우게 됩니다.

속사포의 말에 채팅창은 금세 우려의 내용으로 가득 찼다.

[LIVE 실시간 채팅]

[지금 시간 얼마나 지남?]

[타임 어택 조진 거 아니냐 ㄷㄷㄷ]

[하미준 잇자나 쟤가 내주겠지]

[개쪽팔린다ㅅㅂ 지금 저기 DF랭킹 1위랑 3위가 있는데]

화면에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등장했다. 녀석은 대낫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지의는 실드와 낮말을 듣는 새로 방어했지만 제대로 된 공격 찬스가 나오지 않았다.

―아… 이거 생각보다 1페이즈에서 시간이 많이 지체되는데요.

―하미준 헌터와 차도윤 헌터가 지속적인 공격을 넣어주고 있지만 신지의 헌터 쪽에서 결정적인 공격이 나와주지 않으면, 사실 타임 어택 성공은 약~간 힘들거든요!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이 훨씬 민첩해져서 아까와 같은 근접 공격이 나오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몸에 탄환 몇 개가 박혔지만 구멍이 뚫리는 게 고작이었다.

지의가 자아에 대고 목소리를 주입하는 장면이 화면에 잠깐 등장했다. 화면 속 지의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LIVE 실시간 채팅]

[ㅇ?]

[웃네]

[뭐임 쟤?]

[포기한거아냐?]

[지의야 힘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앗, 신지의 헌터 뭔가를 결심한 것 같은데요!

―일단 1페이즈라도 넘기는 게 관건입니다!

쿠구궁.

커다란 나무줄기가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사지를 비틀었다. 갑자기 튀어 오른 나무줄기 때문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인 놈이 그것을 뜯어내기 위해 자세를 취한 순간, 이번엔 검은 그림자 손이 녀석의 목을 졸랐다.

―강세빈 헌터의 그림자 손이네요! 다행입니다! 무사하군요!

―어, 근데 지금 신지의 헌터가……!

아나운서가 세빈의 존재에 시선을 뺏긴 순간, 속사포가 다급하게 외쳤다.

카메라가 지의를 비추었고 동시에 채팅창은 순식간에 물음표로 도배가 되었다.

―무, 무기를 던졌습니다!!

지의는 자아를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 쪽으로 집어 던졌다. 새하얀 궤적을 남기며 날아간 자아가 갑자기 몸집을 키우기 시작하더니 받침대가 달린 포구 형태로 조립되었다.

제3 형태, 박격포였다.

콰과과과광!!

박격포 형태가 된 자아는 정확히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미간 앞에서 발포되었고, 현장을 비추고 있던 모든 카메라가 강하게 흔들렸다.

중계진은 넋이 나가 방송을 해야 하는 것도 순간적으로 까먹었다. 화면이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전신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眞) 크로노스의 현신의 처치를 알리는 대낫이 둥둥 떠다니다 하늘에 있는 신전 쪽으로 들어갔다.

―페, 페…….

―페이즈 스킵!!

―페이즈 스킵!!

아나운서와 속사포가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페이즈 스킵(Phase Skip)’, 말 그대로 남은 페이즈를 전부 넘기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파괴력을 페이즈가 존재하는 몬스터에게 쏟았을 경우에 극소수의 확률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S급 헌터가 C나 D급 던전에 갔을 때나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었고, B급 이상 던전부터는 사실상 페이즈 스킵을 보기 어려웠다.

[LIVE 실시간 채팅]

[실화냐?]

[ㅁㅊ]

[ㅅㅂ 돌았네]

[나 방금 페스본거임?]

[ㄱㅈㅇ]

[ㄱㅈㅇㄱㅈㅇ]

[god z e]

[우리는 신지의 보유국입니다.]

[S급 던전에서? 중간 보스급을? 페스로?]

[저♡♡ DF 다시 측정해 봐야 한다니까]

[갓지의]

[SAVIORRRRR!!!!!!!]

실시간 채팅창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올라갔다. 과열된 분위기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고, 흥분한 몇 유저의 채팅 권한이 막히기도 했다.

화면에 비친 지의는 하늘을 바라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열광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앞으로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그릴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