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81화 (81/366)

81화

그리스 S급 던전 게이트 앞은 기자들과 구경꾼들로 바글거렸다. 경찰들과 현지 협회 소속 헌터들이 나와 게이트 주변을 보호했지만 소란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타임 어택 규칙 설명드리겠습니다!”

그리스 헌터 협회 직원의 목소리까지 덩달아 커졌다. 귀에 꽂은 동시 통역기가 약간의 노이즈와 함께 직원의 말을 내 귀로 흘려보내 주고 있었다.

“도전 조건은 헌터 최대 네 명이고 클리어 중 채굴되는 부산물은 갖고 가실 수 없습니다! 대신 아이템은 습득하셔도 됩니다!”

“신지의 헌터! 이쪽 한번 봐주세요!”

“저게 다 한국 S급 헌터라는 거지?”

‘정신없어 죽겠네.’

직원이 인벤토리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꺼냈다.

“타이머입니다. 파견 팀 전원이 던전에 들어가고 나온 시간을 기준으로 기록됩니다. 그리고 시간은 던전 밖 시간으로 계산됩니다.”

“자, 이 타이머는 내가 갖고 있을게~”

하미준 헌터가 직원에게서 나침반처럼 생긴 타이머를 건네받았다. 시간을 나타내는 부분은 전자식이었는데 안에 들어있는 부품은 수십 개의 톱니바퀴였다. 아직 돌아가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매 전투 포인트마다 저희가 설치해 놓은 송출용 카메라가 있습니다. 카메라의 의도적인 파괴는 절대 금지되며 고의로 파괴할 시 책임을 물을 예정입니다.”

“다들 준비됐으면 바로 가도 될까요?”

게이트에 손을 댄 채 질문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니다.”

끼이이익.

팔에 힘을 주어 게이트를 열었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리스 S급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야, 여기!”

던전에 모두 들어오자마자 깔끔한 미성이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금발의 미청년이 우리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가의 ■몽에 입■하셔야 합■■.]

새로운 기억은 아니고 잠깐 까먹었던 던전이라 그런가, ‘카르마를 밟는 자’가 반응했다. 내 눈앞의 어린 제우스는 자기 형제들을 전부 먹어치운 아버지, 크로노스를 무찌르기 위해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하, 저 얼굴로 평생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세월이 야속해.”

“지금부터 우린 아버지의 거처를 습격할 거야. 아마 가는 동안 여러 괴물들과 우리 아버지의 현신들을 만날 건데 봐주지 말고 전부 해치우면서 가자!”

하미준 헌터의 말에도 제우스는 자기 할 말만 했다. 게임의 NPC 같은 모습은 언제 봐도 어색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제우스의 뒤를 따라 커다란 협곡으로 부지런히 들어갔다. 마음 같아선 제우스보다 먼저 전투 포인트에 도착해 빠르게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그가 도착하지 않으면 몬스터가 소환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템포를 맞춰야 했다.

쉬이이익―

갑자기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협곡 사이로 부는 바람이라 꼭 누군가가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제우스를 흘끔 보자 그는 양손으로 장창을 꽉 쥔 채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첫 번째 몬스터가… 뱀의 머리를 한 인간이었나?’

자아를 고쳐 쥐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따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세빈이와 하미준 헌터가 자연스럽게 전방에 섰고 나와 차도윤 헌터는 후방을 맡았다.

두 사람이 대형을 흐트러트려 놓으면 내가 빈틈을 노려 탄환을 박아 넣는다. 간단하지만 확실한 공략법이다.

‘카메라는 아무래도 저것들인 것 같고.’

협곡 위쪽에 단단해 보이는 검은 캡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지금 우리가 싸우는 모습이 전 세계로 송출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쿠구궁!

그때 커다란 굉음이 협곡을 울렸다.

“아버지의 현신이야! 다들 조심해!”

제우스의 외침과 함께 협곡에서 집채만 한 거인이 튀어나왔다. 몸은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머리는 뱀의 것이었다. 녀석의 손에는 커다란 낫이 들려 있었는데, 이미 누군가를 베고 온 듯 시커먼 피가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치이익.

피가 닿은 지면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썩어문드러졌다. 녀석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나는 왼쪽 눈을 감고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크로노스의 현신―뱀]

[찌르기 공격, 베기 공격, 공격 자체는 단순한데 파괴력이 엄청남]

[2페이즈 돌입할 때 정신계 스킬 씀. 압도당하지 않게 조심. 근데 정신계인 거 알고 보면 큰 타격은 없는 듯?]

[2페이즈부터 방어력 대폭 상승]

“2페이즈 들어갈 때 정신계 스킬 조심하세요.”

“아, 고마워. 신지의 헌터 아니었으면 까먹을 뻔했네. 그 절대신의 압도인가 뭔가 하는 것.”

그리스 S급 던전은 몬스터의 이름부터 그들이 쓰는 스킬까지, 그리스 헌터 협회에서 공식적으로 이름을 붙였다. ‘절대신의 압도’라는, 쓸데없이 긴 스킬 이름도 그들이 붙인 것이다.

‘권능으로 보면 어떤 이름일까 좀 궁금하네.’

크로노스의 현신은 우리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랄! 결국 그 예언이 맞았구나! 내 자식 중 하나가 나를 몰아낼 거라던 그 망할 예언!”

“아버지, 이제 왕좌에서 내려오고 할머니와 약속한 대로 타르타로스에 갇힌 이들을 풀어주세요!”

“시끄럽다!”

녀석이 높이 낫을 들어 휘두르자 그와 동시에 검은 바람이 칼날처럼 허공을 갈랐다.

콰과광!!

뒤쪽 협곡이 무너져 커다란 바위가 밑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낮말을 듣는 새’로 도약해 공중을 디디며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를 진동시켰다.

위협적으로 굴러오던 바위는 산산조각 났고 자잘한 돌가루가 되어 힘없이 떨어졌다. 흙먼지 때문에 녀석의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다.

타앙!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기자 먼지를 가르고 탄환이 녀석의 실루엣을 관통했다. 얼마 안 있어 거대한 낫이 내 앞으로 쑥 들이밀어졌다.

“윽!”

실드를 바로 펼쳤지만 낫이 닿자마자 순식간에 깨졌다. 뒤로 밀려난 나는 한참을 날아갔다가 공중에서 한 두어 번 구른 후에야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제우스! 인간의 손을 빌린 것이냐! 저 더럽고 저열한 것!”

‘그래도 유효타는 들어갔다.’

아까 내 공격으로 녀석의 어깨가 반쯤 날아갔고, 너덜너덜한 팔 사이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도 녀석의 공격을 실드로 막긴 했지만 여전히 뼈마디 전체가 징징 울렸다.

이래서 어둠 속성 몬스터는 힘들다. 내 공격이 잘 먹히긴 하지만 그만큼 나도 어둠 공격에 취약하니까.

쿵!

그때였다. 세빈이가 크로노스의 현신의 몸 위로 뛰어오르더니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평온하게 녀석의 머리를 향해 뛰었다. 크로노스의 현신은 제 몸 쪽으로 낫을 휘둘렀지만 그림자 손과 나무줄기가 그 날붙이를 잡아당겼다.

녀석의 목 언저리에 있던 그림자에서 검은 손이 튀어나왔다. 세빈이는 그 손을 잡고 순식간에 녀석의 눈앞까지 도달했다.

서걱―

그리고 세빈이가 양손으로 검을 잡고 가로로 베었다.

“크아아아악! 눈, 눈이……!”

“강세빈! 조심해!”

세빈이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녀석이 입을 쩍 벌려 검은 침을 뱉었다. 세빈이 쪽을 향해 자아를 겨눠 방아쇠를 당기자 새하얀 음파가 세빈이를 피해 앞으로 날아가더니 거대한 방패가 되어 검은 타액을 막았다. 실드는 몇 초 정도 버티다 금방 녹아버렸지만 그래도 세빈이가 무사히 착지할 시간은 벌었다.

우르릉.

크로노스의 현신 주위로 시커먼 먹구름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천재지변이군.’

쾅!!

내 예상이 맞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초록빛 번개가 크로노스의 현신을 관통했다. 지축을 뒤흔드는 공격에 녀석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지만 정신력으로 버텨낸 건지 용케도 죽지 않았다.

“이, 이, 더럽고 천박한 벌레 새끼들이!!”

콰과과광!

녀석이 낫으로 공간 전체를 베었다. 잽싸게 몸을 낮춰 공격을 피했지만 낫의 사정거리에 있던 산과 나무들이 전부 반으로 갈라져 땅 위로 떨어졌다.

‘세빈이는 무사하나?’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자 협곡의 한가운데 서있는 세빈이가 눈에 들어왔다.

콰직.

그때 굵은 나무줄기가 크로노스의 현신의 사지를 다시 한번 단단히 묶기 시작했고 당장이라도 끊어낼 것처럼 꽉 조였다.

“강세빈 헌터!”

우드드득.

하미준 헌터의 외침에 크로노스의 현신의 그림자에서 수십 개의 손이 솟구쳐 나왔다. 그림자 손은 나무줄기와 함께 녀석의 사지를 옭아맸고, 그중 몇 개는 아예 녀석의 몸을 관통했다.

철컥.

녀석이 또다시 낫을 들기 전에 자아를 장전했다. 녀석의 머리를 정확히 겨눈 후 방아쇠를 당기자 공기가 진동하는 동시에 새하얀 탄환이 빠르게 날아갔다.

쿵!

뱀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져 협곡 위로 뚝 떨어졌다. 구멍이 뻥 뚫린 어깨와 너덜너덜해진 전신의 관절, 그리고 반쯤 날아간 머리까지. 2페이즈에 돌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

“무서운 파괴력이야.”

하미준 헌터가 씩 웃으며 들고 있던 팔을 내려놓았다. 크로노스의 현신을 꽁꽁 묶어두었던 나무줄기들은 흙냄새와 함께 다시 가루가 되어 땅 위로 떨어졌다.

‘확실히 다르다.’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전에 상대했을 때보다 훨씬 강해진 것이 느껴졌다.

‘호령여산’의 파괴력 자체도 올라갔지만 자아도 같이 강해진 게 느껴져.

우웅, 우웅.

자아도 동의한다는 듯 내 손안에서 진동했다.

“이… 자식들…….”

“이런. 2페이즈 들어가려나 보네.”

“정신계 스킬 주의하세요.”

그때 크로노스의 현신이 중얼거렸다. 차도윤 헌터가 녀석을 슬쩍 올려다보곤 손으로 허공을 쥐었고, ‘하늬바람’으로 우리를 조용히 감쌌다.

‘그러고 보니 세빈이는 정신계 스킬에 면역이 있는 것 같던데.’

내 옆에서 하늬바람을 조용히 쐬던 세빈이와 눈이 마주쳤다. 세빈이는 날 보자마자 눈을 접어가며 배시시 웃었다.

“이놈들이!!”

콰지직.

잠깐 다른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크로노스의 현신 주위로 검은 기운이 몰려들었다. 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반쯤 남은 입에선 세 갈래로 갈라진 혀가 날름거렸다. 들고 있는 낫으로 우리를 두 동강 낼 기세로 식식거리던 놈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키이잉―

녀석의 머리 뒤로 시커먼 원이 생겼다. 하나였던 원은 점점 그 수를 늘리더니 거대한 태양을 연상시키는 톱니바퀴가 되었다.

바람이 울고, 지면이 진동했다. 신의 일부분이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낫을 높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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