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타임 어택! 그리스 S급 던전】
‘이럴 시간이 없는데 말이지.’
출국장 앞에서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머릿속에 든 생각이라곤 그것뿐이었다.
타임 어택에 도전하는 멤버는 나, 세빈이, 하미준 헌터, 그리고 차도윤 헌터였다. 방어와 치료를 포기하고 공격에 모든 것을 집중시킨 조합. 치유계 한진우 헌터나 방어계 최민 헌터가 없어서 모두가 우려했지만, 타임 어택은 얼마나 폭발적으로 공격을 쏟아붓느냐가 관건이다.
부상의 리스크를 감수하고 한 대라도 더 때리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직접 구성한 파견 팀이다.
‘전부 말의 씨앗을 심은 대상이기도 하고.’
그리고 국내에서 벌어질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점도 있다. 아무래도 비상 상황에는 치유와 방어가 제일 중요하니까. 또 시부야 S급 던전을 대신 클리어해 준 덕분에 일본 헌터 협회도 우릴 도와줄 것이다.
“신지의 헌터도 포부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차도윤 헌터, 이쪽 한번 봐주세요~”
“그리스 헌터 협회가 이례적으로 하루 만에 던전 입장권을 발급해 주었는데, 혹시 DF 순위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기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지의야.”
“아, 응.”
세빈이가 내게 마이크를 건넸다.
포부, 포부라…….
“절대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차차차차차차.
내 말에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마이크를 내 쪽으로 날아온 드론에 끼운 후 출국장 안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스 S급 던전, 그리스 신화에 직접 들어가서 제우스와 함께 크로노스를 죽이는 신화 던전이다. 난도는 S급 던전 중에서 중상 정도. 전부 인간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지능이 높은 데다가 던전 설정상 모두 신이다 보니 처리하기 어려운 편에 속했다.
하지만 공략법 자체는 전혀 어렵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인 크로노스를 만날 때까지 제우스와 동행하기에 게이트를 찾느라 헤맬 필요가 없었고, 결국 얼마나 빨리 몬스터를 잡느냐가 클리어 시간의 관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던전보다 타임 어택을 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지.
“신지의 헌터, 긴장했어~?”
“조금요.”
“기록 경신은 당연히 하겠지만, 못 한다고 해서 너무 부담 가질 건 없어. 내가 다 내준다니까?”
“제가 가자고 한 거니까, 책임은 제가 져요.”
“하하, 반하겠는걸.”
하미준 헌터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키득거렸다. 이제 막 부모님 집 대출금을 협회에 갚고 지유 병원비를 갚는 중인데, 여기서 더 빚이 불어나면 안 된다.
“저, 여러분.”
사람들을 부르자 세빈이, 하미준 헌터, 그리고 차도윤 헌터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혔다.
“고마워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나야 ‘아이테르의 로브’를 얻겠다는 확실한 목적이 있지만, 이들은 그저 내 부탁으로 움직여 준 사람들이다. 전투 모습이 전 세계에 송출되어 스킬이 노출되는 리스크를 기꺼이 감수해 주었다.
“그리고 미안…….”
텁.
“지의야.”
그때 세빈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허리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난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거야.”
“…….”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날 마음껏 다뤄.”
‘또 말 함부로 하네, 얘가…….’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은 든든했다. 이번 시간선에선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낯간지럽게 뭘 감사 인사를 해. 나중에 한 끼 대접할 수 있게 해줘, 알겠지?”
“제가 대접하는 게 아니고요?”
“나보다 어린 공주님에게 식사 얻어먹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아서.”
이번엔 하미준 헌터가 대답했다. 말은 가벼웠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이, 이걸로 파주 던전 빚은 갚은 거예요.”
“어휴, 알았어요.”
그리고 여전히 나한테 신세 진 걸 마음에 걸려하는 차도윤 헌터까지.
‘동료 하나는 잘 뒀어, 내가.’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불안을 몰아내고 전용 출국 게이트를 향해 나아갔다.
“하~ 이게 몇 개월 만의 유럽 여행인지.”
우리 협회 직원이 차에 짐을 싣는 동안 하미준 헌터는 기지개를 쭉 켰다.
날씨는 한국이랑 비슷하네. 조금 더 습한 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실으실 건 없죠? 이제 차에 타셔도 됩니다~”
직원이 밴 트렁크를 닫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같이 따라 나온 직원이라는데 나른한 말투에 비해 일하는 손길이 굉장히 능숙했다.
밴에 전부 타자 차가 도로를 부드럽게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리무진으로 모셨을 텐데, 일정이 급하게 잡혀서 밴으로 모시네요.”
“신경 쓰지 마, 왕자님.”
“하미준 헌터님도 참 여전하시군요.”
좋은 날씨와 아기자기한 건물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어디에 시선을 두든 전부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등받이에 다시 등을 대고 조수석에 앉은 협회 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우리의 일정과 던전에 대한 정보를 태블릿으로 살피고 있었다. 던전 정보 페이지에는 얻을 수 있는 장비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그거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직원이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내게 태블릿을 넘겼다. 태블릿에는 온갖 종류의 장비들이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확실히 많군.’
인기 던전답게 획득 가능한 아이템의 개수도 많았다.
비행 기능이 붙은 ‘헤르메스의 샌들’, 공격 궤적을 따라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헤스티아의 불쏘시개’, 발이 땅에 붙어있으면 모든 공격으로부터 높은 면역 상태가 되는 ‘가이아’까지.
헌터 마켓에서 구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매물이 나왔다고 해도 적게는 수천억, 비싸면 몇 조에도 팔리는 무기와 방어구들이다.
난 장비 소개창의 마지막 페이지를 눌렀다.
[아이테르의 로브]
[그리스 S급 신화 던전 방어구]
[빛 속성]
[특이 사항 : 정보 없음]
[이미지 정보 없음]
그리고 소문만 무성한 전설의 아이템 아이테르의 로브. 다른 아이템에 있던 정보를 기반으로 아이테르의 로브의 존재는 알려졌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능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려진 거라곤 현존하는 빛 속성 방어구 중 가장 강하다는 것뿐.
“신지의 헌터도 역시 아이테르의 로브가 욕심나나 봐?”
“네? 아, 네. 강한 속성 방어구라고 하니까 좀 갖고 싶네요.”
하미준 헌터가 뒷자리에서 목을 쭉 빼고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아이테르의 로브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을 때 아주 난리였죠~ 가이아의 특이 사항에 그 방어구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거든요.”
직원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원하는 정보를 찾았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테미스, 네게 아이테르의 로브를 선물로 주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너를 상처 줄 수 없을 테니.’라는 특이 사항이에요.”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직원에게 다시 태블릿을 건넸다.
“그리스 S급 던전에서 다른 속성 아이템들은 전부 공개됐는데 빛 속성만 나온 적이 없어서, 아이테르의 로브가 빛 속성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죠.”
“아이테르는 빛과 창공이랑 관련이 있는 신이기도 하고 말야.”
하미준 헌터가 말을 덧붙였다. 대충 전설로 내려오는 아이템 정도로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더 엄청난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난 조용히 상태창을 켜 구석에 떠있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축복]
[심마니]
[‘심마니’ : 나타났다 하면 최상급 아이템을 쏙쏙 뽑아내는 심마니의 축복. 심마니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던전에서 최상급 아이템을 얻을 확률이 ‘대폭’ 상승한다.]
[지속 시간 : 5일 21시간 49분 24초]
‘무조건 아이테르의 로브다. 알겠어?’
속으로 생각하자 축복 글자가 치지직거렸다.
알았다는 의미인지 뭔지 모르겠네.
상태창을 끈 후 눈을 감았다. 들어가서 잠깐 숨만 돌리고 곧바로 타임 어택에 도전해야 하니 지금부터 체력 관리를 해놔야 한다.
우우웅―
도심을 향해 달려가는 차의 엔진 소리를 들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 * *
“네~ 지금 중심가 쪽으로 들어갔어요. 네? 아, 그럼 봤죠. 평범하던데요?”
금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장발의 남자가 하늘 위에 뜬 채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꽤나 미성인 그가 입을 열 때마다 고양이 같은 입매가 귀엽게 말려 올라갔다. 맹금류를 닮은 부리부리한 눈 위로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섬세하게 생긴 이목구비에 비해 체격은 상당히 잘 잡혀 있었다. 딱 달라붙는 검은색 티셔츠 위로 그의 근육이 얼핏 드러났다. 청바지를 입은 긴 다리를 따라 시선을 내리면 날개가 달린 얇은 가죽 샌들인 헤르메스의 샌들이 신겨져 있었다.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하냐? 걔가 평범한 동양인 여자애라는 건 나도 봐서 알고 있어. 쓸모없는 얘기를 자꾸 하네.
“아하하, 이것 참 결례를 범했습니다.”
―멍청한 자식. 네 스킬이랑 그럭저럭 볼만한 껍데기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어딘가에 버리고 왔을 거다.
남자가 들고 있는 수화기 너머로 중저음의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시종일관 오만한 태도로 남자를 매도하다 혀를 한 번 찬 후 침묵을 유지했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아무런 말 없이 눈으로 지의가 탄 승합차만 좇았다.
―오늘은 그냥 봐두기만 하는 거다. 함부로 접근하지 마.
“알겠어요. 어차피 방송으로 뭔 스킬 쓰는지 다 보일 텐데요, 뭘.”
휘이잉―
남자는 바람을 타고 아테네 쪽으로 날아갔다. 헤르메스의 샌들 주위로 옅은 초록빛이 감돌았다.
“근데 저 애 이름이 뭐라고 했죠? 지이?”
―지의. 발음하기 어려우면 그렇게 바보같이 얘기하든가. 사실 두 발음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지만.
여자는 꽤 정확한 발음으로 지의의 이름을 읊었다. 남자는 여전히 ‘지이’라고 중얼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근데 길드장님은 쟤를 왜 만나고 싶어 하는 거예요? DF 랭킹 1위라서?”
―쟤가 SS급이든 DF 랭킹 1위든 상관없어.
수화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의외라는 듯 핸드폰에서 얼굴을 떼고 화면을 바라보았고, 자신의 길드장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게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만나게 될 날이 정말 기대되는군.
뚝.
여자가 웃음 섞인 말로 이야기하곤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에휴, 나도 돌아가야지.”
남자는 인벤토리에 핸드폰을 던져놓은 후 허공을 향해 원을 만들었다.
휘이이이―
바람이 동그랗게 모여들더니 이내 커다란 균열이 생겼고, 남자는 그 속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