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좋은 사람】
“윽…….”
정신이 돌아오자 욱신거리는 온몸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온돌 같은 바닥 위에 누워있는 건 알겠는데… 좀처럼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약간 숨쉬기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바스락.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자 내 시야를 막고 있던 게 커다란 바람막이라는 걸 알았다. 바람막이는 내 허벅지 위로 스르륵 떨어졌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지만, 아까처럼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그냥 몸이 좀 무거운 정도.
아까 전주 A급 던전에서 대차게 뻗었지. 그 후에 누가 날 들어 올렸고, 정신이 나가기 전에 그 사람이랑 눈이 마주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몸은 좀 괜찮습니까?”
“아.”
아까의 일을 떠올리기도 전에 날 여기로 데리고 온 주인공, 최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는 턱을 괸 채 곁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 탓일진 모르겠지만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매서워 보였다.
“영양실조에 탈수 증세더군요.”
“아, 네. 한동안 좀 못 먹어서.”
“식사는 그럴 수 있지만 물까지 안 드신 것 같던데.”
달그락.
최민 헌터가 턱을 괴던 손을 내리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어, 진짜 화났나 본데.’
오늘따라 더 매서워 보인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는 굉장히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로 나를 타박하고 있었다. 돌발 지령을 대신할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느라 머리를 굴릴 때쯤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떠올랐다.
“근데 최민 헌터는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걸 안 거예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당황]
“헌터넷으로 알았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헌터넷으로 던전이 지금 클리어 중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안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한테 무언가를 숨기고 있나 보네.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인가 뭔가 하는 게 또 이 사람한테 뭘 보여주나?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최민 헌터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며 말을 돌렸다. 나를 노려보던 그 기세는 어딜 가고, 이번엔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뭐, 어떻게 알았는지는 내가 기억을 전부 찾으면 금방 알아낼 수 있겠지.
‘그나저나 여기 한정식집이었구나.’
좌식 온돌방과 창호지 문. 테이블에 달린 호출 벨까지. 흔한 한정식집의 모습이었다. 테이블 앞쪽으로 몸을 끌어 앉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다양한 반찬들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절하신 동안 기력 회복제와 물을 목으로 넘겨드렸습니다. 어느 정도 컨디션이 돌아왔을 테니 바로 식사하셔도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냅다 기절했는 줄 알았는데 용케 기력 회복제랑 물을 받아먹었나 보다. 그러니까 지금 좀 살 만한 거겠지.
달그락.
숟가락으로 흰 죽을 조심스럽게 떴다. 한 번 후후 불고 입안으로 넣으니 목구멍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진짜 얼마 만에 먹는 음식이냐.’
얼마나 속이 비었는지 죽이 목구멍을 타고 위장으로 내려앉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 정도다.
오징어젓갈을 얹어서 한 입, 장조림 얹어서 한 입, 보리차 한 모금 마시고 생선살 얹어서 한 입. 내가 조금 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눈물 한 방울은 흘렸을 것이다.
“천천히 드세요. 체합니다.”
“최민 헌터는 안 드세요?”
“괜찮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민 헌터 앞에는 수저도 없었다.
정말로 나 먹이려고 데려왔나 보네.
“고마워요. 또 최민 헌터한테 신세만 지네요.”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혼란]
“대단한 도움을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지난 시간선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최민 헌터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할 때마다 크게 동요했다. 자신이 베푼 호의에 조금 더 자부심을 가져도 될 텐데.
“대단한 도움이죠. 하마터면 꼼짝없이 굶어죽을 판이었는데.”
젓가락으로 떡갈비를 조각내 입으로 가져왔다. 짭조름하면서도 달콤한 간장 향과 불 향이 가득 밴 고기가 입안에서 춤을 추는 것 같다.
“…신지의 헌터는.”
그때 최민 헌터가 눈동자를 굴려 내 쪽으로 시선을 건넸다. 반쯤 감긴 눈꺼풀 밑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제 남동생이랑 겹쳐 보일 때가 있습니다.”
“최민 헌터 남동생이요……?”
“네. 저보다 네 살 어린 애였죠.”
나랑 지유랑 똑같은 나이 차이네.
최민 헌터가 직접적으로 가족 얘기를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난 숟가락을 놓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잘 까불었지만 기본적으론 착한 애였습니다. 모든 것에 고마워할 줄 아는 녀석이었고.”
“저희 동생이랑 똑같네요. 저희 동생도 엄청 사소한 일에도 고마워했거든요.”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마저 고마워하던 지유. 지유의 미소를 떠올리니 가슴 한편이 저릿해졌다.
“하아…….”
그때 최민 헌터가 다시 시선을 피하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아니요, 아니요.”
가족 얘기를 했다는 건 그가 내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인데 싫을 리가 없지.
지난 시간선처럼 ‘신뢰할 수 있는 동료’로 관계가 발전한 것 같아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결국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민 헌터랑 친해진 것 같아서 기분 좋은데요.”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최민 헌터가 테이블 위의 냅킨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반응할 정도의 대답인가.
“저랑요…….”
최민 헌터의 눈이 살짝 풀어졌다. 항상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리락 말락 했다.
저렇게 따뜻한 얼굴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
텁.
[발언 결과 : 두려움]
‘어?’
그때 최민 헌터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슬쩍 보곤 금방 시선을 떨구었다.
그는 명백하게 웃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마치 웃는 걸 누구한테 들키면 안 되는 것처럼.
“저랑 친해져서 좋을 것 없습니다.”
손을 내리자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 없는 입술이 나타났다. 그 입술을 통해 뱉은 말이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식사나 하시죠.”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거지? 도대체 뭐가 두려워서?
최민 헌터는 컵에 물을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훈훈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식어가는 죽을 떠서 다시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언가가 그의 감정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지난 시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민 헌터는 항상 무언가에 억눌린 것 같은 모습이었고, 감정을 얼굴에 비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다.
‘…설마 조율자가?’
최민 헌터도 조율자와 계약을 맺을 때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그때 빈 소원이 지금 저 행동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탁.
숟가락을 내려놓고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 최민 헌터랑 친해지겠다는 게 아니에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그냥 최민 헌터가 좋은 사람이라서, 좋은 동료라서 친해지고 싶은 거라고요.”
[발언 결과 : 혼란]
어떤 소원을 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동료가 스스로를 좀먹는 모습은 그냥 두고 볼 수 없지.
고집스러운 내 말에 최민 헌터가 반박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요즘도 제가 죽는 꿈을 꿔요?”
화제를 단번에 돌렸다. 기왕 분위기가 가라앉은 김에 지난 시간선에서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나 알아내자.
최민 헌터는 여전히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이 사람 앞에서 열 번은 죽었는데, 그걸 전부 꿈으로 봤다면 정신이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저 어떻게 죽었어요?”
“…그걸 저보고 말하라는 소립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최민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날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푹 쉬었다.
“다양하게 죽었습니다. 몬스터에 당한 경우도 있고, 와보니 이미 죽어있던 경우도 있고.”
이미 죽은 경우라……. 내가 ‘말의 힘’으로 시간을 돌리는 도중에 내 모습을 발견한 거겠군.
난 몸을 앞으로 기울여 최민 헌터와 거리를 좁혔다.
“혹시 그리스 S급 던전에서 죽었던 적도 있어요?”
“그리스……?”
최민 헌터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 안 죽었던 것 같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본 건데.
“신경 쓰이시나 봅니다.”
“네?”
그때 최민 헌터가 차갑게 말을 뱉었다.
“저한테는 그냥 꿈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
“아.”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최민 헌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최민 헌터가 신경 쓸까 봐 그런 거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내 대답에 최민 헌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시선만 내 쪽으로 옮겨 말을 덧붙이길 기다리듯 나를 응시했다.
“그리스 S급 던전에 갈 생각이거든요.”
“…흠.”
“제가 거기서 죽는 꿈을 꿨으면 최민 헌터가 신경 쓸 수도 있잖아요. 감천 때처럼.”
‘진짜 자의식 과잉이 따로 없다.’
[발언 결과 : 수긍]
낯 뜨거워지는 대답이었지만 발언력의 힘을 빌려 최민 헌터를 설득했다. 최민 헌터는 헛웃음에 가까운 숨을 내뱉은 후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그리스 S급 던전은 왜 가시는 겁니까.”
“방어구를 좀 얻고 싶어서요.”
“…아이테르의 로브?”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전설적인 아이템이다 보니 최민 헌터도 알고 있나 보다.
최민 헌터가 손가락으로 턱을 매만지다 내 쪽으로 시선을 건넸다.
“입장권은 구하셨습니까?”
“아직요.”
그리스 S급 던전처럼 인기가 많은 던전의 경우 입장권을 따내는 것부터 일이다. 던전을 소유한 협회나 길드 홈페이지에서 직접 신청하는 형태인데, 그리스 던전은 몇 달 전에 예약을 걸어놔도 입장권을 따낼 수 있을까 말까다.
‘축복 심마니의 지속 기간은 일주일…….’
일주일 내로 그리스 S급 던전의 입장권도 얻어내야 하고 클리어도 해야 한다.
막막해서 눈앞이 잠깐 캄캄해졌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리스 S급 던전의 입장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타임 어택.’
자국 헌터들로 팀을 꾸려 타임 어택에 도전하면 우선 입장권을 받을 수 있다.
신기록을 세우면 그리스 S급 던전 무제한 입장권이라는 엄청난 보상이 주어지지만, 기존 기록을 깨지 못하면 타임 어택을 도전한 시점에 예약을 걸어놓은 모든 파견 팀들의 입장권을 대신 지불해 줘야 한다.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하지만 지금은 이것밖에 답이 없다.’
“타임 어택 하려고요.”
“진심이십니까?”
“네.”
단호한 태도에 최민 헌터도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다.
“타임 어택에 도전하면 클리어 과정이 전 세계에 송출되는데, 그 부분은 알고 계신 겁니까?”
“뭐, 뭐요?”
“빠르게 도전할 수 있는 대신, 볼거리가 되는 겁니다. 특히 그리스 헌터 협회는 타임 어택 송출권을 방송국에 판매하는 걸로 돈을 꽤 벌었죠.”
이건 난생처음 듣는 정보다.
이번 시간선의 유럽 헌터들은 생각보다 악독하구나.
“던전 안은 밖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잖아요. 보스전만 송출해도 며칠은 걸릴 텐데…….”
“그리스 S급 던전은 던전 안과 밖의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갑니다.”
쿵!
이것 역시 처음 듣는 사실이다. 이번 시간선의 그리스 S급 던전은 거의 쇼를 위해 존재하는 던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상이 무료하기라도 했나. 별걸 다 추가했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유리할 수도 있겠는걸.’
DF S5의 SS급 헌터가 포함된 파견 팀의 타임 어택. 그리스 헌터 협회에게 있어 꽤 달콤한 제안일 것이다. 화제성이 있을 테니 송출권도 불티나게 팔릴 것이고.
어쩌면 던전 우선 입장권을 더욱 빠르게 발급해 줄지도 모르지.
“상관없어요. 그 던전에 빨리 들어갈 수만 있다면.”
스킬이 많이 노출되겠지만, 잃는 것보다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은 도박이다.
달그락.
물컵에 든 물을 단숨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세상을 구하고 지유를 다시 살릴 수 있다면 기꺼이 구경거리가 되어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