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76화 (76/366)
  • 76화

    【안전핀】

    [도 대 체 왜 ?]

    이제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지의는 하나뿐인 자신의 소꿉친구가 동료를 배신하고 세상에 종말을 가져온 인물이라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사라락.

    글자는 물에 씻겨 나가듯이 그대로 녹아내렸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너머로 세빈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 이전 시간선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상황에서 세빈이 왜 동료들을 배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게 만드는 게 우선이야.’

    지의는 다시 세빈 쪽으로 다가가 그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세빈은 고개를 기울이며 제 소꿉친구의 행동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지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늘 그렇듯 따스했다.

    “강세빈.”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긴장]

    세빈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와 호칭에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세빈은 약간 긴장했지만 이내 다시 눈을 접어가며 지의가 말을 덧붙이길 기다렸다.

    텁.

    지의가 세빈의 옷깃을 잡아당겨 얼굴을 바로 앞까지 끌어왔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세빈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지의가 제법 단단히 제 옷깃을 잡고 있어서 얌전히 허리를 숙여주었다.

    ‘…내가 하는 말, 들어주려나.’

    막상 이야기할 기회가 오니 망설여졌다. 지의는 검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세빈의 눈동자로 보는 자신의 모습에서 결연함이 묻어 나왔다.

    ‘들어줄지 말지는 세빈이의 몫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세빈이가 엇나가지 않도록 막아야 해.’

    “세빈아.”

    “응, 나 여기 있어.”

    다정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세빈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넌 내 편이지?”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세빈이 눈을 크게 떴다. 항상 예쁜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고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

    ‘왜 동요하는 거야.’

    마치 무언가를 들킨 사람처럼 행동하는 세빈 때문에 지의의 가슴이 타들어 갔다.

    설마 벌써 늦은 건가, 이미 창조자의 편이 되어 이 세상을 무너트릴 계획을 세운 건 아닐까.

    불어난 걱정이 지의의 숨통을 조를 무렵 세빈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당연하지. 난 언제나 지의 네 편이야.”

    세빈은 다시 은은하게 웃으며 지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발언 결과 : 절박]

    물론, 마음은 정반대였다.

    지의는 눈동자만 굴려 세빈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 혼자 크기를 키웠다 줄였다 하며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빈이 동요할 때마다 보이는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이 마음을 이용하고 싶진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지의가 다시 세빈과 눈을 맞췄다.

    “너가 정말 내 편이라면 나랑 약속 하나만 해.”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주변에 있던 그림자가 세빈의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몬스터 때문에 몸이 꿰뚫리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가 명백하게 긴장하고 있었다.

    [발언 결과 : 수긍]

    세빈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자 지의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배신하지 마.”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정적을 쫓아내었다.

    “배신……?”

    세빈이 눈만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말하다 목이 멨는지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아직 창조자랑 만나기 전인가?’

    지의는 세빈의 행동이 꾸며내지 않은 날것의 반응이란 걸 단번에 눈치챘다. 만약 이미 세상을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당황하거나 변명부터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세빈은 완전히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또각.

    세빈은 지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지의의 시선을 피하다 이내 입만 열어 천천히 대답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발언 결과 : 비참]

    ‘상처 줬네.’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누가 보아도 큰 충격을 받은 세빈은 머릿속으로 있지도 않은 자신의 죄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시커먼 그림자가 점점 몸집을 키워, 어느새 비탈길을 따라 쭉 흘러내렸다.

    “너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세빈의 자책하는 습관을 알고 있는 지의가 그 잡념을 단칼에 끊어냈다. 당장이라도 끓어 넘칠 것 같던 그림자도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지의는 세빈에게 한 발짝 다가간 후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적어도 너만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너만큼은… 끝까지 내 편이었으면 해서 그런 거야.”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강세빈’이 동요한다.]

    “나라서?”

    “응.”

    전부 진심이었다. 지의에게 있어 세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기에.

    지의는 지유를 잃고 난 직후 세빈을 만났다. 의젓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는 점이 지의의 텅 빈 마음을 자극했고, 그렇게 친구가 된 세빈과 지의는 서로를 지탱하며 10년을 함께했다.

    ‘지난 시간선에서 세빈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이번엔 내가 그걸 막으면 돼.’

    지의가 손을 꽉 쥐었다.

    “너가 어떤 상황이든 내 편이었으면 좋겠어. 누가 소원을 빌미로 널 꾀어내려 해도 그걸 거절했으면 좋겠어.”

    “…….”

    “그러니까 절대 내게서 등 돌리지 마.”

    [발언 결과 : 환희]

    ‘…응?’

    예상치 못한 발언 결과에 지의가 순간 몸을 움찔했다.

    ‘의문’이나 ‘긴장’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환희’라니. 자신이 한 말에 기뻐할 구석이 있었나 싶었다.

    지의는 상태창 너머의 세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빈은 여전히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지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절대 내게서 등 돌리지 마’의 씨앗을 각성자 ‘강세빈’에게 심겠습니까?]

    일단 지의가 의도한 대로 ‘말이 씨가 된다’가 터져주었다.

    ‘예.’

    [‘절대 내게서 등 돌리지 마’의 씨앗을 각성자 ‘강세빈’에게 심었습니다.]

    이미 마음을 여러 번 흔들어놓은 상태라 씨앗이 쉽게 심겼다. 지의는 무사히 씨앗이 심긴 것을 확인한 후 상태창을 닫았고, 아까부터 계속 말이 없는 세빈을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텁.

    “어……?”

    “난 절대로 널 배신하지 않아, 지의야.”

    세빈이 지의의 손을 잡더니 천천히 깍지를 꼈고 긴 손가락으로 손등 뼈를 꾹 눌렀다.

    “다른 사람들이면 몰라도, 나는.”

    “어, 어…….”

    “나만큼은 네 옆에 있을 거야.”

    세빈의 검은 눈동자에 옅은 빛이 돌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고맙긴 한데,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네…….’

    세빈은 잡은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지의를 꽉 끌어안았다. 얼결에 품에 갇힌 지의는 눈만 깜박거리며 세빈의 어깨 위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반응은 아니지만 어쨌든 씨앗도 심었으니 보험 장치는 걸어놓은 것이다. 등 돌리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가 세빈의 마음속에서 크기를 키우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줄 것이다. 그것만으로 지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두근.

    ‘…어?’

    순간 세빈의 어깨 너머 풍경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지의는 눈을 굴려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붉기는커녕 온통 나무뿐이었다.

    ‘잘못 본 건가?’

    지의는 자신의 불안을 애써 누르곤 세빈이 팔을 풀 때까지 얌전히 눈을 감았다.

    세빈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지의의 귀에 들어갈까 두려웠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제 눈앞에 뜬 상태창을 반쯤 감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명>

    [인어공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라. 할 수 있다면.]

    [달성도 상승]

    [달성도 : 99%]

    [보상 : 내세의 연]

    ‘거의 다 왔어.’

    다음 생도, 그리고 그다음 생도 지의와 함께할 거라고.

    세빈은 입술을 꽉 물곤 지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그림자가 지의의 그림자를 향해 조용히 기어가고 있었다.

    * * *

    쿵.

    현관문을 닫고 그대로 신발장 앞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차도윤 헌터를 구한 것부터 세빈이에게 말의 씨앗을 심은 것까지. 모든 일이 폭풍처럼 휘몰아친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앞이 빙글 돌았다.

    창조자가 지옥도를 터트리기 전에 사도들을 전부 찾아내고, 그들에게서 파편을 빼앗아 박살 내려면 더 빨리 움직여야 해.

    난 다시 일어나 신발을 벗어 던지곤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아―

    세면대에 물을 받는 동안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보았다. 턱 끝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전투로 이리저리 구겨진 검은 티셔츠, 그리고 살짝 찢어진 녹색 점퍼.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제대로 된 방어구 하나 없네.’

    평소 잘 입는 녹색 점퍼에 방어 스킬을 덕지덕지 바른 게 내 방어구의 전부였다. 지금까진 그럭저럭 잘 버텼지만 앞으로의 전투를 생각하면 빛 속성 S급 방어구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아아아…….”

    한숨을 길게 쉰 후 세면대에 얼굴을 박았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고 잡념이 물에 같이 씻겨 나갔다.

    빛 속성이면서 S급인 최상급 방어구.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방어구라면 역시…….

    촤아악.

    “…아이테르의 로브.”

    얼굴에서 흐른 물이 티셔츠 위로 뚝뚝 떨어졌다.

    ‘아이테르의 로브’는 나의 지난 모든 시간선에서 얻는 데 실패했던, 아니 애초에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전설의 아이템이다. 다른 아이템의 특이 사항에서 그 존재가 겨우 알려졌을 뿐, 그 누구도 그 아이템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이테르의 로브가 현존하는 빛 속성 S급 방어구 중 가장 강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말 그대로 획득하는 게 기적에 가까운 아이템이다.

    정말 운이 좋다면… 운이 정말 기가 막히게 좋다면 내가 얻을 수도 있다.

    “…야, 상태창.”

    나에게 청산할 수 있는 업을 알려주고, 돌발 지령을 물어다 주는 상태창을 향해 말을 걸었다. 녀석은 묵묵부답이었지만 어렴풋이 글자가 진동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있는 인격체인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날 성장시키려는 것 같으니 그 점을 철저하게 이용해 주겠어.

    “내가 지금 아이테르의 로브가 너무 갖고 싶거든.”

    허공에 대고 얘기하려니 영 정신 나간 사람 같네.

    “너도 내가 강해지는 걸 원하잖아. 그치?”

    치지직.

    눈앞에 작게 노이즈가 떴다가 다시 사라졌다. 착실하게 반응해 주는구만.

    “그러면 내가 아이테르의 로브를 얻을 수 있게 도와. 그게 없다면 너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겠어.”

    [`♤\♤♤\■■■■₩♤]

    ‘동요한다.’

    물론 이 자식이 주는 돌발 지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나도 손해긴 하지만 일단 허세라도 부려보자.

    “나도 이 짓하는 거 이제 지겨워 죽겠거든. 솔직히 소원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포기하고 싶어.”

    [■■■■■○□○○♧♧₩₩¡※¿]

    볼멘소리를 할수록 상태창은 엉망진창으로 깨졌다.

    치지직―

    “읏!”

    상태창에 스파크가 튀는 동시에 글자가 순식간에 정리됐고, 제대로 된 문장이 되어 내 눈앞에 떠올랐다.

    [돌발 지령이 도착했습니다.]

    [마시멜로 실험]

    [지령 : 지령을 받은 시점부터 30시간 이상 공복 상태를 유지한 후 전주 A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하라.]

    [보상 : 축복 ‘심마니’ 일주일간 유지]

    [*축복 ‘심마니’를 받은 자는 최상급 아이템을 획득할 확률이 ‘대폭’ 상승합니다.]

    “하… 그냥은 안 주겠다?”

    괘씸하지만 일단 어떤 지령을 줬는지나 보자.

    이름은 마시멜로 실험, 내용은 지금으로부터 30시간 공복 상태를 만든 후 A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 혼자서 A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도 엄청 쉬운 일은 아닌데 그걸 30시간 이상 굶고 수행하라는 거다.

    공복 상태에서는 집중력도 떨어지고 기운도 없으니까 클리어 난도가 배로 올라가겠지.

    지령 이름은 왜 ‘마시멜로 실험’이지? 저 실험이 인내와 관련된 실험이란 건 어디서 주워들은 기억이 있는데.

    덜컹.

    그때 몸 안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인벤토리에 뭐가 들어온 게 느껴졌다.

    인벤토리를 열자 ‘속마음 전화기’ 옆에 웬 작은 초코바 같은 게 들어있었다.

    [에너지바]

    [한 입만 먹어도 한 끼를 먹은 것처럼 든든해지는, 이 세상 최고의 에너지바]

    [*에너지바의 포장지를 뜯으면 돌발 지령 ‘마시멜로 실험’은 자동으로 소멸합니다.]

    이래서 마시멜로 실험이라고 한 거군.

    ‘머리 좀 썼네.’

    내가 허기 때문에 이성이 날아가면 저걸 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노란색 포장지가 무슨 보석인 양 반짝거렸고, 날 유혹하려는 듯 달큼한 냄새도 솔솔 새어 나왔다.

    “축복 성능 안 좋기만 해봐. 진짜 가만 안 둬.”

    상태창을 향해 경고하자 글자에 잠시 노이즈가 끼더니 이내 그대로 사라졌다.

    까짓 거, 성공해서 축복받고 바로 그리스 던전으로 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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