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75화 (75/366)

75화

복도에는 아까와 같은 적막이 맴돌았다. ‘낮말을 듣는 새’ 덕분에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복도를 지나 거실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거실은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 때문에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끼익, 끼익.

‘오는군.’

복도 끝, 그리고 계단 쪽에서 ‘신사’의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 손잡이에 의지한 채로 터벅터벅 내려온 녀석이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어차피 신사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소란만 피우지 않으면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숨을 꾹 참고 최대한 천장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달그락.

신사는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한 듯, 부엌 쪽으로 몸을 틀더니 찬장에서 예쁜 찻주전자를 꺼냈다.

‘얼씨구.’

태연하게 티타임을 즐길 준비를 하는 녀석을 보니 하마터면 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계속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들키면 신사한테 쫓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게이트 위치가 또 바뀌는 게 문제다.

‘길을 비추는 자’는 2층보다 더 높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단을 따라 열심히 위로 올라가자 1층과 2층보다 훨씬 낡은 복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나무로 된 문은 삭아 있었고 바닥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키이잉.

고개를 내려 반지를 보자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복도의 가장 끝을 가리켰다.

작업실

작업실?

길을 비추는 자가 가리킨 방에 ‘작업실’이라고 새겨진 나무 명패가 걸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아 옆으로 돌렸고 몸이 통과될 만큼만 열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와 씨, 이게 다 뭐야…….”

온 벽면에 미니어처 하우스가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책상엔 방금까지 만들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마차 미니어처까지 있었다.

‘몬스터 주제에 취미 생활까지 하네.’

뭐에 홀린 양 안으로 발을 들여 진열장 앞에 선 나는 그 안에 있는 작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진짜 같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길을 비추는 자는 여기에 게이트가 있다고 했는데…….

화살표를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보이는 문이라곤 진열장 문이 전부였다.

키이잉.

그때 길을 비추는 자가 오른쪽 진열장을 향해 맹렬하게 반응했다.

절대 손대지 마시오.

진열장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볼 법한 메모가 붙어있었다.

‘설마 이게 게이트?’

아까 열고 온 게이트랑 다르게 생겼는데. 뭐, 이미 게이트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는 오류가 발생해 버린 던전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탁.

메모를 무시한 채 진열장 문에 손을 댔고 신사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여기 너무 좁은데 잘 싸울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이상하리만치 잠잠하다. 보통 게이트에 손대자마자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게 정상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진열장 문을 더듬으며 손자국을 내도 게이트가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먼지가 묻어 찝찝한 손을 대충 턴 후 진열장에서 한 발짝 떨어졌다.

이 반지가 불량일 리는 없고 단순히 내가 게이트를 못 찾는 걸 텐데…….

“음?”

진열장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수많은 미니어처 하우스 중 유난히 대문이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아까 열고 온 그 게이트였다.

우웅, 우웅, 우웅.

한 번 더 확인해 보려 대문 앞에 반지를 가까이 대보자 화살표의 끝이 정확히 대문을 향했고 격하게 반응했다.

‘바뀌기 전에 빨리 소환시켜야겠군.’

철컥.

자아를 손에 쥔 후 한 손으론 미니어처 하우스의 대문, 게이트를 건드렸다.

콰그작!

작업실 한가운데에 게이트가 뚝 떨어졌다. 덕분에 마차 모형이 있던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졌고 나무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끽, 끼익, 끼익.

낡은 나무 바닥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작업실의 입구를 향해 자아를 겨눈 채 녀석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쿵, 쿵, 쿵.

잔뜩 화가 난 듯한 발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고, 동시에 작업실 문이 활짝 열렸다.

“끼아아아아아아악!!”

“큿!”

신사가 부서진 미니어처를 눈앞에 두고 비명을 꽥 질렀다.

콰과과광!!

수십 개의 진열장이 순식간에 신사를 감싸는 동시에 안에 있던 날카로운 나무 조각들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우우웅―

방아쇠를 길게 당겨 음파를 방출하자 나무 조각은 작은 파편으로 갈려 바닥 위로 떨어졌다. 미처 부수지 못한 몇 개는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지만 곧바로 실드를 펼쳐 막았다.

탕!

몸을 낮춘 채로 방아쇠를 당기자 소리 탄환이 진열장들의 벽을 박살 냈고 그대로 신사가 서있던 곳을 덮쳤다.

“키야아아아악!!”

“윽!”

쨍그랑!

녀석이 진열장을 뚫고 나와 내 실드를 지팡이 끝으로 찍자 실드는 총알을 맞은 유리처럼 정확히 지팡이 크기만큼 깨졌다.

콰그작!

구멍 뚫린 실드를 옆으로 던져 녀석의 중심을 흐트러트린 뒤 자아의 손잡이로 턱을 쳐올렸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신사의 얼굴이 반쯤 부서졌다. 녀석이 반격하기 전에 자아를 작살 총 형태로 바꿔 반대편 벽에 박아 넣었다. 녀석과 겨우 거리를 벌려놓은 후 숨을 골랐다.

‘만만하게 볼 놈이 아니야.’

파괴력에 있어서 두 등급 차이는 거의 극복할 수 없다. 하지만 녀석은 내 실드를 뚫었고 내 공격을 어느 정도 버텨내고 있다.

사사사삭.

“잠깐, 이게 뭔……!”

갑자기 신사의 형체가 흐려지더니 이내 녀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콰과광!!

1층 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후우우웅―

그리고 매서운 바람 소리도 들렸다. 저택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던 바람 소리가 들린 이유는 하나뿐.

녀석이 차도윤 헌터에게 간 것이다.

곧바로 뛰쳐나와 낮말을 듣는 새로 빠르게 이동했다. 허공을 디디며 계단을 단숨에 내려갔다. 차도윤 헌터가 있던 1층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한바탕 아수라장이 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쾅!!

“차도윤 헌터!”

차도윤 헌터가 복도 벽으로 던져졌고,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지팡이가 그의 목을 향했다.

쨍그랑!

방아쇠를 당겨 신사의 지팡이를 소리 탄환으로 부숴버렸다. 차도윤 헌터는 바닥에 쓰러진 채 기침을 토해 냈고 무기를 잃은 신사는 제 손을 한참 바라보다 이내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내 작품을! 내 작품을!”

지능이 올라간 건지 이젠 말까지 구사하며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너덜너덜해진 녀석의 몸을 향해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새하얀 탄환이 녀석의 머리를 뚫고 공기 전체를 강하게 진동시켰다. 내 목을 조르려던 앙상한 손은 목적을 잃고 허공을 휘적거렸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업이 청산되었습니다.]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90%]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가의 ■몽에 입■하셔야 합■■.]

녀석이 죽었다는 걸 알려주듯 업이 청산됐다는 상태창이 떴다. 마지막 문장이 깨진 건 좀 아쉽지만, 일단 대부분의 기억은 돌아온 기분이다.

‘이제 한숨 돌렸…….’

푹―

“어?”

그때 고깃덩이가 무언가에 찔리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신사의 몸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녀석의 몸을 뚫은 새카만 칼날이 보였다. 그리고 그 검의 끝은 정확히 내 심장 앞에 있었다.

반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신사와 나의 생사가 갈렸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속이 뒤집히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깜짝 놀라서?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파사삭.

신사의 몸이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영’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자마자 명확한 이유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가의 ■몽에 입■하셔야 합■■.]

‘익숙하기 때문에.’

“지의야!”

탱그랑.

이 검의 주인이자 방금 전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세빈이가 내 양어깨를 잡았다. 저 멀리 던져버린 영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가 허리를 숙여 내 몸을 살폈다.

‘떨고 있네…….’

내가 조금도 다치지 않은 걸 확인했음에도 세빈이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안 찔렸어. 멀쩡해.”

세빈이를 겨우 떨어트려놓은 후 한 손은 심장 위에 올렸다. 당연하게도 상처 하나 없었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가 반응했다. 그건 이게 명확하게 내 기억의 일부라는 걸 뜻하는 것이다.

“지금 기억이 안 나는 게 배신자랑 니 소꿉친구 단둘뿐이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다고 봐.”

자아가 했던 말이 또다시 떠오른다.

고개를 돌려 바닥을 굴러다니는 영을 바라보았다.

저 검에 찔린 적이 있던 걸까.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칼날 주변을 맴돌 뿐이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고립 소식을 들은 기자 몇 명과 구급차, 그리고 회장님이 있었다. 이준수 헌터는 바로 구급차에 실려 갔고 애써 괜찮은 척하던 차도윤 헌터와 최진혁 헌터도 회장님 손에 떠밀려 구급차 안으로 들어갔다.

“빚지게 할 거예요, 알겠어요?”

“아, 네, 네. 일단 병원이나 가세요.”

차도윤 헌터는 분하다는 듯 구급차 문이 닫힐 때까지 내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다.’

지난 시간선에서 던전에 삼켜져 죽었던 차도윤 헌터가 살았다. 이제 큰 변수만 없다면 차도윤 헌터는 지옥도까지 멀쩡히 살아서 갈 것이다.

전신에 안도감이 퍼졌다. 긴장이 좀 풀린 건지 잇새로 짧은 숨이 토해졌다.

“고맙네, 신지의 헌터. 전부 자네 덕분이야.”

그때 회장님이 나와 세빈이 사이를 비집고 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머쓱해서 고개만 끄덕이자 낮게 웃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근데 회장님은 왜 이 일을 눈치 못 챈 거지?’

회장님의 ‘천명’으로 본 미래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정확한 시간이나 위치는 알 수 없어도 이 정도의 사고는 눈치챌 만도 한데…….

“이 게이트는 조만간 자연소멸할 걸세.”

“자연소멸이요?”

“응. 천명으론 그렇게 사라지는 걸로 보였네.”

“…그렇군요.”

차도윤 헌터가 고립될 뻔한 건 왜 몰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시간선에서 회장님은 헌터들과 나라를 지키는 데 온몸을 바친 사람이니까.

‘일단은 지켜보는 수밖에.’

“뭐, 아무튼 둘 다 수고 많았네. 먼저 들어가지.”

나와 세빈이를 번갈아 본 회장님이 리무진에 올라타자 차가 그대로 산길을 빠져나갔다.

‘정말 이대로 끝난 건가?’

해결되지 않은 불쾌감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차도윤 헌터네 파견 팀을 구하면서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고 기억까지 거의 다 되찾았는데,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우리도 이제 갈까?”

“…아.”

신이 정성스럽게 빚은 것 같은 저 얼굴을 보자마자 이 불쾌감의 원인을 알 것 같았다.

‘세빈이 검에 찔렸던 그 기억 때문이었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아직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세빈이의 검이 내게로 향했다는 사실이다.

‘진짜로 세빈이가 배신자인 건가?’

그러지 않고서야 세빈이가 내게 칼을 들이밀었을 리가 없다. 실수였을 수도 있지만 세빈이에 대한 기억이 날아간 지금 상황에서 그런 안일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텁.

“어디 아파?”

세빈이가 내 볼에 손등을 대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 얼굴을 보고 어떻게 기대를 안 해.’

세빈이의 다정함이, 친절이, 그동안 쌓아온 정이 냉정한 사고를 막았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닐까, 내 상태창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단 한 번도 내게 상처 준 적 없는 내 소꿉친구. 하지만 일부 시간선에선 존재조차 의심스러워지는 사람.

바스락.

세빈이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자 나뭇잎 밟히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세빈이는 허공을 헤매는 자기 손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했지만, 약간 동요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냐, 괜찮아.”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왼쪽 눈을 살짝 가렸다.

‘어쩌면 세빈이에 대한 걸 조금이라도 더 떠올렸을지 몰라.’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가 세빈이에 대한 기억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강세빈]

[내 소중한 소꿉친구]

그럼 그렇지, 역시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

치지직―

그때 세빈이의 주변으로 노이즈가 생겼다.

[■■■■!■■■%@#■■@■■■■]

깨진 글자 수십 개가 세빈이를 덮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그냥 눈을 감고 싶었지만 입술을 꽉 문 채 글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도 대 체 왜 ?]

그리고 결국,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 내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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