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게이트 위치가 바뀌었어!’
설마 차도윤 헌터가 들어왔을 때도 게이트 위치가 바뀐 건가? 그러면 탈출을 못 한 것도 말이 된다.
또각.
‘젠장할.’
어느새 ‘신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났고, 이 복도에서 1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계단 앞을 막아섰다.
‘근접전을 피할 수가 없네.’
귀찮은 상황에 이를 아득 갈며 일단 자아의 방아쇠를 녀석을 향해 당겼다.
탕, 탕, 탕!
파열음과 함께 새하얀 소리 탄환이 날아갔지만 신사는 유연하게 몸을 돌려 피했고 순식간에 나와 거리를 좁혔다.
끼기긱.
날카로운 지팡이의 끝과 커다란 실드가 맞닿으며 마찰음이 났다.
‘진짜 예상치 못한 상황이다.’
요령 없이 실드로 막기만 하니까 팔이 덜덜 떨렸다.
“하아!”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실드를 통째로 옆으로 밀어 몸의 중심을 깨트린 후 소리 탄환을 쐈지만 아까처럼 가볍게 피해버렸다. 곧바로 방아쇠에 손을 걸어 길게 당기자 새하얀 음파가 공기 전체를 울렸다.
쏴아아아―
온몸으로 소리를 받은 신사가 크게 휘청거리더니 벌어진 입을 통해 검은 피를 토해 냈다.
‘일단 몸부터 숨기고 생각하자.’
녀석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동안 계단 밑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을 밟아 내려가며 빠르게 1층으로 간 나는 ‘길을 비추는 자’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열심히 달렸다.
아까보다 공간이 더 넓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커다란 거실을 가로질러 1층 복도에 도착했다. 방은 네 개, 이 중에 게이트가 있다.
반지를 나침반처럼 들고 몸을 천천히 돌리자 화살표가 또다시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장난하나?”
길을 비추는 자가 다시 2층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신사에게 들킬 때마다 게이트 위치가 바뀌도록 던전이 재설계된 것 같다.
또각, 또각.
집요하네.
신사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후 문에 귀를 대고 복도의 소리에 집중했다.
끼익, 끼익.
녀석의 발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문 여닫는 소리는 100% 들었을 거고, 신사는 아마 여기 있는 모든 문을 열어볼 것이다.
아무래도 한 번 더 몸을 숨기는 게 좋겠는데.
문에서 떨어져 방 안을 살폈다. 침대의 이불 밑, 옷장 안, 책상 밑…….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바로 앞까지 왔다!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옷장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발밑에 있는 옷더미들 때문에 자꾸만 몸이 휘청거려서 위에 있는 행거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중심을 겨우 잡았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 옷장 틈새로 왔다 갔다 하는 녀석의 발이 보였다.
서걱, 푹.
신사는 지팡이로 방 이곳저곳을 두드리고 찔렀지만 번번이 허탕을 쳤다. 녀석이 마지막으로 내가 숨은 옷장 앞에 섰다. 옷장의 좁은 틈으로 녀석의 얼굴을 덮은 수많은 손과 검은 피가 줄줄 흐르는 입술이 보였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들켰나?’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과 함께 가슴이 쿵쿵거렸다. 들킬까 봐 숨까지 참았는데 심장 소리 때문에 발각될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숨을 죽인 채로 눈동자만 굴려 녀석의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끼이익.
그림자는 미동도 없이 한참 서있다 이내 뒤로 물러났고,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토해 냈고 다시 깊게 들이마셨다.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어떻게든 따돌리긴 했다. 행거를 잡은 손을 놓고 옷더미 위로 몸을 살짝 누이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꽤 큰 소란이었는데 세빈이도 전투가 벌어진 걸 알고 있겠지? 내가 시간을 번 틈에 한 사람이라도 찾았으면 좋으련만.
저택이 얼마나 큰지 세빈이와 단 한 번이라도 마주치긴커녕 코트 자락 한 번 못 봤다.
‘뭔 일 없어야 할 텐데…….’
“…음?”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니 내 옆에 옷더미라고 하기엔 제법 사람 같은 형체가 보였다. 옷장 안이 어두워서 뭔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 가까이 다가가니 진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마…….’
불길한 기분과 함께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고 조심스럽게 내 옆을 비췄다.
시뻘건 피가 묻은 흰 티셔츠, 얼굴을 타고 내리는 핏줄기, 긴 속눈썹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본 지 몇 초가 채 지나지 않아 금방 내 옆에 있는 이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차, 차도윤 헌터!”
‘젠장, 죽은 건 아니겠지?’
핸드폰으로 차도윤 헌터를 비추며 그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 앞에 손을 가져다 대자 미약하게나마 숨결이 느껴졌다. 일단 목숨은 붙어있었다.
차도윤 헌터는 옷장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축 늘어져 있었고, 피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얼굴은 약간 긁힌 상처 빼고는 멀쩡하고, 목이나 머리도 괜찮은 것 같은데…….
차도윤 헌터의 몸을 따라 핸드폰을 밑으로 내리자 붉게 물든 그의 복부가 보였다.
‘배를 찔렸구나.’
아직 지혈이 안 됐는지 여전히 붉은 액체가 흥건했다. 혹시 몰라서 헌터 마켓에서 산 지혈제를 챙겨왔는데, 최고의 타이밍이다.
달칵.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차도윤 헌터의 복부에 천천히 약을 부었다. 끈적한 액체가 상처와 고인 피 위를 파고들었다.
“…컥.”
동시에 차도윤 헌터가 숨을 토해 냈다. 차도윤 헌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그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일단 체온이 떨어지는 거라도 막기 위해 내가 깔고 앉았던 옷더미들로 차도윤 헌터의 몸을 덮었다.
“정신이 좀 들어요?”
눈은 여전히 반쯤 감겨 있었지만, 그래도 의식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차도윤 헌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신…지의 헌, 윽!”
“말하지 마세요. 일단 좀 쉬어요.”
다행히 정신도 멀쩡하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혈제 뚜껑을 닫아 다시 인벤토리에 넣었다.
소리 때문에 치유 스킬인 ‘하늬바람’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
지금까지 기를 쓰고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피도 서서히 멎어 가는지 핏자국이 갈빛으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차도윤 헌터를 그대로 두고 옷장 문을 조심스레 열어 방으로 나왔다. 숨을 죽인 채 방문에 귀를 대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사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 같았다.
다시 옷장으로 돌아오자 차도윤 헌터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회복 스킬 쓸 수 있겠어요?”
“…….”
“소리 때문에 몬스터 오면 제가 따돌릴게요. 쓸 수 있으면 써요.”
차도윤 헌터는 내 말에 잠시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잉―
봄바람처럼 포근하지만 약간은 한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방 안에 불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바람이 차도윤 헌터를 감싸자 얼굴 위를 타고 내리던 피도 천천히 쓸려 나갔다.
회복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이 정도면 큰 고비는 넘기겠지.
“전화 바로 못 받아서 미안해요.”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강한 부정]
차도윤 헌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게이트 위치가 바뀌어서 저한테 연락한 거죠?”
이번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 보스 몬스터한테 들킬 때마다 게이트 위치가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하.”
차도윤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숨을 뱉으며 내가 덮어놓은 옷더미를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하늬바람을 계속 쐰 덕인지 아까보다 혈색이 그나마 좋아 보였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보스와 마주쳤어요. 그래서 바로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갔는데…….”
“게이트가 없어진 거군요.”
차도윤 헌터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투 중에 이준수 헌터가 부상을 입었고 제가 미끼가 됐습니다. 그 틈에 최진혁 헌터가 이준수 헌터 데리고 대피했고요.”
그럼 일단 두 사람은 같이 있겠군.
차도윤 헌터는 훨씬 안정적으로 호흡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기력 회복제 한 병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특유의 역겨운 맛 때문인지 차도윤 헌터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웅, 우웅.
그때 길을 비추는 자가 웅웅거렸고, 정확히 위를 가리키던 화살표가 한 바퀴 돌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누가 걸린 거지?’
숨을 죽인 채 귀를 쫑긋 세우자 누군가의 분주한 발소리와 물건 깨지는 소리가 은근하게 들려왔다. 명백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소리였다.
“강세빈 헌터겠군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차도윤 헌터가 말없이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헌터넷 내의 채팅 화면이었다.
[저 ㅎㅣ 2ㅊㅊ층 세번ㅋ재 바ㅇ]
[어딛에 ㄱㅖㅔㅅ요?]
[가ㅇㅅㅔ빈국장ㄴㄴ미 따돌리는 중ㅇ이에요 ―최진혁 헌터]
급박한 상황이 느껴지는 채팅이었다. 최진혁 헌터와 이준수 헌터는 2층 복도 세 번째 방에 있고, 세빈이가 따돌리는 중이라는 내용인 것 같다.
세빈이가 신사를 완전히 따돌리면 바로 게이트를 찾아야겠다.
‘…차도윤 헌터는 여기에 두고 가야겠지?’
차도윤 헌터를 흘끔 보자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복부의 큰 상처도 어느 정도 아문 것 같은데, 그래도 갑자기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질 것 같다.
“차도윤 헌터는 여기서 더 치료하세요. 제가 게이트 찾을게요.”
“따라갈게요.”
“아직 다 안 나았잖아요. 그냥 여기서 좀 쉬세요.”
“싫습, 윽!”
옷장에서 일어나던 차도윤 헌터가 앞으로 크게 휘청거리더니 다시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쉬라니까…….”
난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차도윤 헌터는 자신의 상황이 분한 건지 아랫입술을 꽉 물고 있었고, 덕분에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게이트만 찾으면 상황 금방 끝날 거예요. 여기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자꾸 빚지는 게 싫다고요.”
어린애 같은 투덜거림이 귀에 꽂혔다. 예상치 못한 볼멘소리에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이를 깍 깨물고 차도윤 헌터에게 무안을 주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이제야 좀 솔직해졌네.’
허리를 숙이고 차도윤 헌터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놀랐는지 어깨를 움찔거렸다.
“동료끼리 신세 좀 질 수 있죠.”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차도윤’이 동요한다.]
“…언젠간.”
“네?”
[발언 결과 : 의욕]
“저한테 빚질 일을 만들게 할 거예요.”
고맙다는 소리를 되게 거창하게 하네.
차도윤 헌터는 제법 비장하게 말을 마친 후, 약간 민망했는지 내 시선을 피했다.
‘이제 조용해진 것 같은데.’
차도윤 헌터를 뒤로한 채 방문 앞으로 걸어가 귀를 댔다. 위층의 소란은 어느새 잠잠해졌고 길을 비추는 자도 특정 위치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세빈이가 신사를 일단 따돌리긴 했나 보다.
“갔다 올게요. 녀석한테 들키면 소리라도 지르세요.”
속삭이듯 얘기하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