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꼭꼭 숨어라】
―연결이 되지 않아 헌터넷 사서함으로…….
뚝.
“왜 안 받지?”
새벽에 차도윤 헌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길래 일어나자마자 다시 걸었더니 받기는커녕 신호음조차 들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사이에 던전이라도 들어간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연결이 안 되는 경우는 정말 희박한데.
차도윤 헌터가 내게 꽤 마음을 연 다음에 걸려온 첫 전화라서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이 찝찝했다. 개화한 건 아니니까 뭔가 큰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도 아닐 테고.
탁, 타닥.
화면을 두드려 차도윤 헌터의 프로필을 눌렀고, 배정된 파견 일정이 있나 살폈다.
[차도윤 / S급 / 바람]
[메시지 보내기]
[파견 일정 : 파주 A급 던전(2일 차)]
[통화하기]
‘…파주?’
‘파주라고?!’
“윽!”
갑자기 자아가 평소보다 큰 목소리를 냈다. 몸 안에서 울리는 강한 목소리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서 식탁에 살짝 엎드린 채로 자아에게 말을 걸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래?’
‘저 던전, 차도윤 헌터를 집어삼켰던 그 던전이야.’
치지직.
[청산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위치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젠장.”
자아가 기억하는 바로 직전의 시간선에서 차도윤 헌터를 그대로 집어삼켰던 던전이, 이번에도 똑같이 그를 삼키려 하고 있다. 이 시간선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는데 내게 업 청산을 강요하는 정체 모를 절대자는 기억하고 있나 보다.
‘위치나 보내.’
[경기 파주시 탄현면 XX로]
상태창을 향해 속으로 중얼거리자 이번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나저나 나한테 왜 구조 요청을 한 거지?’
아무리 내게 마음을 열고 내가 SS급이라고 해도, 구조 요청까지 할 이유는 없다. 회장님에게 하거나 협회 간부인 세빈이, 아니면 베테랑인 하미준 헌터나 최민 헌터에게 하는 게 일반적인 판단일 것이다.
그 모든 옵션을 버리고 내게 전화했다는 건 내가 적합하다고 생각해서일 텐데.
‘차도윤 헌터가 이 던전 안에서 고립됐다고 했지?’
‘응. ‘천명’으로 봤는데 사망하기 전에 이미 게이트가 소멸했다고 그랬어.’
‘그 스킬은 예지 스킬이면서 별게 다 보이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자아가 예전에 말한 대로 차도윤 헌터네 파견 팀은 던전 안에서 출구를 못 찾았고, 그 상태로 던전이 소멸해 버려서 사망했다. 그랬던 그가 내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는 건…….
‘길을 비추는 자.’
내 아이템을 기억한 거야.
그제야 내가 이 반지를 처음 산… 건 세빈이지만, 아무튼 내 손에 이 반지가 들어온 이유가 생각났다.
‘소중한 동료라고 말한 책임을 져야지.’
난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회장님께 말씀은 드려놨어.”
세빈이가 핸들을 꺾으며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왔다. 원래 최민 헌터와 함께 가려 했는데 그는 이미 다른 던전에 있었기에 결국 세빈이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런 부탁해서 미안.”
“안 미안해해도 돼.”
세빈이가 게이트 앞에 선 후 내 쪽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무렇지 않나?’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처음 보는 건데 세빈이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짙은 쌍꺼풀 밑으로 새까만 눈동자가 있었고, 살짝 올라간 입꼬리는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쳐냈을 때 봤던 표정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일을 다시 꺼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그냥 찝찝한 느낌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끼익.
세빈이가 컨테이너 박스 앞에 차를 세웠다. 서둘러 차에서 내려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파주 A급 던전…….’
내 앞에 있는 파주 A급 던전은 독특한 공략법 때문에 ‘숨바꼭질 던전’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눈은 안 보이지만 청각이 엄청 예민한 보스 몬스터를 피해 게이트를 찾아서 손을 대고, 그 몬스터를 해치우면 끝…이라고 세빈이한테 들었다.
“게이트 위치는 항상 똑같은데 왜 고립된 거지?”
“…게이트 위치가 바뀌었나?”
“들어가 봐야 알겠네.”
세빈이가 말을 덧붙이며 스캔 담당 직원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그는 빠르게 나와 세빈이의 아이템을 훑은 후 게이트로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다.
“준비됐지? 문 열게.”
“응.”
끼이익―
세빈이가 한 손으로 문을 밀자 대저택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당에는 예쁜 꽃과 나무가 아기자기하게 심어져 있었고 지붕이 달린 그네까지 한구석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멋들어진 이층집이 있었다.
‘예쁘긴 한데 공포 영화에 나올 것 같네.’
고개를 살짝 내려 ‘길을 비추는 자’를 보았다. 보석 위의 빛이 저택을 굳건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까진 별 이상한 점은 없군.
바스락.
마당을 가로질러 저택의 입구까지 오자 적막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문고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 차분히 입만 열었다.
“보스 몬스터한테 들키면 계속 쫓긴다고 했지?”
“응. 완전히 따돌릴 때까지 계속 쫓겨.”
“그냥 잡으면 안 돼?”
“지의 너라면 어떻게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게이트를 찾기 전까지는 기본적으론 불사 상태야.”
성가시네. 최대 출력으로 뽑으면 그대로 끝낼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일단 정석대로 공략하자.
“게이트 위치 어디야?”
“2층 복도 끝에 있는 작은 방. 문 열고 들어가면 바로 있어.”
또 뭔가 빠트린 건 없겠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세빈이의 손이 내 손 위로 포개어졌다.
고개를 들자 눈을 예쁘게 접은 채로 싱긋 웃는 세빈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응.”
“지의 너는 게이트 확보부터 해줘. 파견 팀은 내가 찾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은 얘를 믿고 가는 수밖에 없어.’
세빈이가 배신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일단 접어야 한다. 지금 내 목표는 차도윤 헌터와 다른 헌터들을 구하는 거니까.
끼이익.
문을 열자 나무로 된 저택 내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긴 복도를 따라 문이 있었고 벽의 중간중간에는 어디서 본 적 있는 명화가 걸려 있었다. 던전 내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적막했다.
‘소리에 예민한 보스 몬스터라곤 했지만 이 정도로 조용할 줄이야.’
세빈이랑 상황 공유도 못 하겠구만. 핸드폰으로 이야기해야 하나? 아직까지 보스 몬스터는커녕 개미 새끼 한 마리 없는데. 세빈이는 아예 기척을 숨긴 것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어?”
세빈이가 없다. 아까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로공원 던전처럼 사람들끼리 뿔뿔이 흩어지도록 설계된 건가? 세빈이가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이유야 뭐가 됐든 간에, 일단 게이트부터 찾자.’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길을 비추는 자가 알려주는 대로 복도 끝에 있는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끽, 끼익, 끽.
바닥과 천장, 벽과 가구들까지 전부 나무여서 고급스럽긴 한데… 발소리가 장난이 아니네.
혹시라도 이 소리를 듣고 보스 몬스터가 찾아올까 싶어 복도 한가운데 멈춰 서서 숨까지 참으며 주위를 살폈다.
‘낮말을 듣는 새’를 쓰며 위로 살짝 도약하자 발이 허공을 제대로 디뎠고 반짝거리는 파동이 퍼져 나갔다. 시험 삼아 살짝 뛰어봤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케이, 이제 뒤꿈치 들고 걸을 필요 없겠네.’
발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지자 한결 편안하게 저택을 누빌 수 있었다. 길을 비추는 자를 따라 계단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겉에서 볼 땐 2층이 끝이었는데, 이리저리 꼬인 걸 보니 그것보다 훨씬 높게 설계된 것 같다.
또각.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읍……!”
갑자기 뒤통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냉기가 훅 올라왔다. 나는 재빨리 위로 도약해 자아를 겨눴다.
‘소름 끼치게 생겼네.’
아까까지 내가 서있던 곳에 수십 개의 손으로 얼굴이 덮인 인간형 몬스터가 있었다. 입과 귀를 제외한 얼굴 모든 곳이 수십 개의 손에 가려져 있었고, 부르튼 입술은 반달 모양의 호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경계 몬스터라고 해도 믿을 만한 비주얼의 보스 몬스터네.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일단 권능으로 녀석을 비췄다.
[A급 보스 몬스터 신사]
[어둠 속성]
[찌르기, 암전, 예민한 청각, 불사]
[특이 사항 : 게이트를 찾기 전까지 ‘신사’는 ‘예민한 청각’과 ‘불사’ 상태를 유지한다.]
세빈이가 말한 대로 나오는군.
신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내 쪽을 바라보다 이내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만년필을 꺼냈다.
까드득, 까드득.
만년필이 지팡이처럼 점점 길어지더니 날렵한 검처럼 변했고 신사가 그것을 잡아 계단을 몇 번 두드렸다.
키잉!!
“큭.”
신사가 지팡이를 들고 단숨에 내 앞까지 뛰어왔다. 나는 동시에 실드를 뽑아 녀석의 공격을 막아냈다.
퉁.
지팡이가 뒤로 튕겨 나가기 무섭게 신사가 지팡이를 다시 잡아 내게 달려들었다.
탕!!
자아로 녀석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녀석은 밝은 귀를 이용해 소리 탄환이 날아가자마자 바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인간형 몬스터는 이래서 성가시다니까.
쿵!
“으, 읏!”
신사가 지팡이를 고쳐 잡아 내 복부를 노렸고, 급하게 실드를 만들어 내느라 몸이 뒤로 밀렸다.
쨍그랑.
실드가 깨지자 날카로운 지팡이의 끝이 내 목의 바로 옆을 찔렀다.
‘공격을 살짝 흘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대로 인생 끝날 뻔했네!’
콰드득!!
녀석의 명치를 발로 힘껏 걷어차자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얇은 몸이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모든 관절이 사발팔방으로 꺾인 신사가 1층 계단 앞에서 몸을 파르르 떠는 틈에 나는 허공을 밟아 서둘러 위로 올라갔다.
계단 난간을 넘어 2층 복도로 발을 들이자 방이 줄지어 있는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세빈이가 말한 대로 복도의 가장 안쪽에 다른 문과 다르게 생긴 철문이 있었다. 길을 비추는 자도 그 문을 가리키고 있는 걸 보니 저 안에 게이트가 있을 것이다.
우웅, 우웅, 우웅.
“응?”
얌전히 있던 길을 비추는 자의 화살표가 갑자기 이리저리 돌아가기 시작했다.
틱.
그리고 한참 헤매던 길을 비추는 자가 가리킨 곳은 1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