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연구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아자디바르 남매는 스크린 앞에 선 채로 미래 씨가 뭐라 말하기를 기다렸고, 미래 씨는 심드렁한 얼굴로 태블릿과 남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X나 많은데.”
“네, 넵.”
“딱 한 가지만 물어보자.”
툭.
미래 씨가 태블릿을 소파에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남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액체냐?”
“네? 아, 고체로 된 배리어나 바리케이드는 평소에 보관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사용할 때 시간도 많이 소요되고요.”
“액체는 아닐 것 같고?”
“상대적으로 덜하죠. 관련 연구는 31페이지에 인용해 두었습니다.”
미나가 제법 단호한 태도로 말을 끝마쳤다.
“일단 이론상으론 완벽하고 니들 실험 보면 A급 공격까지는 적당히 막을 것 같긴 해.”
“진짜요?!”
“근데 제일 중요한 걸 고려하지 않았네.”
중요한 것?
미래 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남매의 손에 들린 액체 배리어를 빤히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배리어가 경화되는 시간.”
“아…….”
“저 배리어, 던전 밖 공기에 3분만 노출되어도 다 경화된다며. 그럼 고층 건물들은? 저 염병할 액체가 1층에 가기도 전에 전부 굳어버릴 텐데?”
미래 씨 말이 맞다. 아자디바르 남매의 설계대로 가장 위층에서 배리어 살포기를 설치했을 때, 액체가 전부 1층까지 올 확률은 손에 꼽을 것이다.
지난 시간선에서도 저 부분을 보완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어떻게 보완했는지 기억나면 좋을 텐데, 뉴스에서 거기까진 알려주지 않았다.
‘회귀자의 눈동자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왼쪽 눈을 감고 남매를 가만히 응시했다.
[미나 아자디바르]
[윈디 길드의 촉망받는 연구원]
[무하 아자디바르의 쌍둥이 동생]
[인도 출생이지만 미국으로 이민]
[무하 아자디바르]
[윈디 길드의 촉망받는 연구원]
[미나 아자디바르의 쌍둥이 오빠]
[인도 출생이지만 미국으로 이민]
하긴, 이 지식도 뉴스로 본 게 전부라 크게 쓸모 있진 않겠네.
내가 그들을 회귀자의 눈동자로 바라보는 동안에도 남매는 여전히 미래 씨에게 피드백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배리어 제거 방법. 너희들이 만든 용해제로 건물 전체에 있는 배리어 제거하려면 한 달씩 걸린다.”
“으…….”
“성분도 문제야. 가격 때문에 부산물 중에서 몬스터고기를 쓴 것 같은데, 몬스터고기는 구성이 복잡해서 배합에서 다른 성분 들어가기 딱 좋다. 그것도 고려 안 했냐? 멍청이들.”
미나와 무하는 잔뜩 풀이 죽었지만, 손으로는 민첩하게 미래 씨의 말을 전부 받아 적고 있었다.
‘그래도 긴 발표를 끝까지 들어준 걸 보면 미래 씨도 이 연구에 관심이 있는 거야.’
미래 씨 성격상 조금이라도 개소리다 싶으면 가차 없이 연구실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미래 씨는 미나와 무하의 발표를 끝까지 들어줬고, 심지어 피드백까지 알차게 해주고 있다.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해도 좋겠어.
“…그럼 저희 연구는 사실상 개발이 불가능한 건가요?”
그때 무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의미 있는 지적들이었지만 한 번에 들으려니 멘털에 살짝 금이 간 것 같았다. 옆에 있는 미나는 무하보다는 덜 동요하는 듯 보였지만 펜을 꽉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위로를 해줄 수도 없는 노릇인…….’
“누가 개발이 불가능하대? 그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거지. 근성도 없는 새끼.”
“미, 미래 씨?”
찰진 육두문자와 함께 미래 씨가 입을 뗐다.
“경화 시간 이슈는 건물 높이에 따라 배리어가 1층에 도달하는 시간을 계산해서 배합 과정에 적용하면 되잖아. 그 정도 계산도 못 돌리면 걍 나가 죽고.”
“어, 네, 네!”
“그리고 용해제는 내가 비슷한 연구를 한 적이 있어서 그거 기반으로 진행하면 돼. 도대체 뭐가 어려운 거냐?”
정말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미간을 구긴 미래 씨가 소파 옆 테이블에 둔 커피를 낚아채 그대로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야, 너희들 언제 출국이냐?”
“올해 말이요. 여행 비자로 온 거라서…….”
“3개월 정도는 있는 거네.”
탁.
미래 씨가 컵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 아자디바르 남매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오케이. 두 달 안에 끝낸다.”
“그, 그렇다는 건…….”
“옆 연구실 비어있으니까 알아서 해라.”
“와아악!!”
미나와 무하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소리를 지르며 뭐라 말했지만 워낙 빠르게 얘기하는 터라 통역기까지 버벅댔다.
“고마워요, 미래 씨!”
두 사람이 난리를 치는 동안 나도 미래 씨에게 작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니한테 그 소리 듣자고 받아준 거 아니다. 착각하지 마라.”
“원래도 배리어 연구에 관심 있던 거죠?”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비각성자 ‘안미래’가 동요한다.]
“뭐, 약간의 흥미는 있었지. 돈에 혈안인 기업 놈들 때문에 다른 연구에 밀렸지만.”
미래 씨가 안경을 벗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용케 저런 물건을 데려왔네.”
“운이 좋았죠.”
“…니 진짜 성격 바뀌었다.”
그런가? 기억 일부가 돌아온 이후로 조금 여유로워지긴 했는데. 다른 사람도 느낄 정도인가 보다.
“쟤네들 잘 곳은 있어?”
“일단 저희 집으로 데려가긴 했어요.”
“이쪽으로 옮겨. L그룹 놈들한테 받은 호텔 바우처 좀 쓰게.”
“미래 씨……!”
능력 있는 어른의 후광이 이 괴팍한 골초에게서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미래 씨를 빤히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험한 욕설이 돌아왔다.
“안미래 소장님! 신지의 헌터님! 정말 감사합니다!!”
미나와 무하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우리를 향해 눈을 빛냈다.
‘어쩌면 정말로 이번 시간선에서 종말을 막을지도 모르겠는걸.’
* * *
“대~박~ 넓~다!”
미나가 침대 위로 몸을 날리며 까르륵 웃었다. 미래 씨가 마련해 준 호텔 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커다란 더블 침대 두 개와 커다란 욕실, 그리고 꽤 넓은 사무 공간과 미니바가 딸린 스위트룸이었다. 창문으론 남산타워와 서울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야, 꼴값 그만 떨고 이거나 받아라.”
미래 씨가 가운 안주머니에서 파란색 카드 두 장을 꺼내 남매를 향해 던졌다.
“이건…….”
“연구실 출입증. 니들 비자가 여행 비자라서 연구원으로 등록은 못 했다.”
지금 보니 출입증에 ‘방문객용’이라고만 써져 있었다.
“같은 이유로 너희들한테 월급도 못 줘. 그 대신.”
탁.
미래 씨가 검은색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카드엔 금색 글자로 미래 씨의 이름과 함께 L그룹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예요?”
“호텔 멤버십 카드. 이걸로 매 끼니마다 뷔페를 처먹든 커피를 사 먹든 알아서 해라. 아마 니들 있는 동안 원 없이 쓸 수 있을 거다.”
“소장님!!”
“닥쳐, 좀.”
미래 씨는 그 말과 함께 방문을 열었고 얼굴만 살짝 돌려 입을 뗐다.
“…니들이 원한다면 나중에 걍 출근해도 좋고.”
“네, 네?!”
“아, 시끄러워. 내일 열한 시까지 내 연구실로 와라.”
쿵.
미래 씨는 그 말과 함께 방을 나갔다.
‘순식간에 휘몰아쳤네.’
닫힌 문에서 시선을 떼고 아자디바르 남매를 바라보자 그들의 눈빛은 이미 미래 씨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있었다. 한진우 헌터가 미래 씨한테 반한 이유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긴 했다.
“아무튼 잘됐네요. 숙소가 해결돼서.”
“저희 연구만 좋게 봐주신다면 길바닥에서 자도 상관없었는데……. 어쩜 사람이 저렇게 친절하고 다정할 수가 있죠?”
“안미래 소장님은 신이에요, 신!”
친절과 다정……. 미래 씨와 전혀 안 어울리지만, 한편으론 또 무서우리만치 알맞은 표현이었다.
“진짜 이 모든 게 기적 같아요.”
미나가 침대에 완전히 누워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카고 던전 컨퍼런스에서 신지의 헌터님을 만나고, 저희 연구를 안미래 소장님께 인정받고, 이제 같이 연구를 하게 되다니…….”
미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천장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미국으로 이민 가길 잘했어!!”
“그게 결론이야?”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짐을 풀던 무하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했다. 미나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이며 중얼거렸다.
“물론 인도랑 네팔도 좋은 곳이긴 하지만, 솔직히 이만큼 좋은 시설이 있는 건 아니니까.”
두근.
네팔, 그 두 글자를 듣자마자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했다.
‘거긴 사도 ‘쿠마리’의 활동지니까.’
“네팔에서도 살았어요?”
“네! 저희 할머니가 거기 계시거든요.”
이번 시간선에서도 그 사실이 변하지 않았다면 분명 ‘쿠마리’의 흔적이 있을 텐데. 이 남매가 알고 있는 게 있으려나.
“네팔에서도 게이트가 자주 터졌나요?”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많이 터졌다고 들었어요.”
“국가에 등록된 S급 헌터들도 거의 없어서 수습 작업도 더뎠다고 하더라고요.”
각성 사실을 숨길 수 있는 환경인가 보다. 그렇다면 쿠마리도 본인의 신분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수습되는 걸 보면 숨어있던 헌터들이 책임감이 아예 없지는 않은가 봐요.”
“맞아, 맞아. 특히 ‘칼리의 창’ 같은 애들.”
두근.
미나의 말에 심장이 또다시 동했다.
‘익숙하군.’
난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며 미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칼리의 창? 별명인가 봐요?”
“네. 게이트 폭발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상황을 전부 해결해 버리는 이상한 헌터가 있거든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고 커다란 창만 둥둥 떠다녀서, 네팔 사람들이 걔를 전부 ‘칼리의 창’이라고 불러요.”
‘틀림없이 쿠마리다.’
여전히 네팔에 있나 보군. 변수가 하나 줄었네.
고향 이야기에 심취한 남매를 뒤로한 채 방문 쪽으로 발을 돌렸다.
“아무튼 저도 이제 가볼게요. 미나랑 무하도 아직 시차 적응도 못 했을 텐데 좀 쉬어요!”
“신지의 헌터님도 새벽부터 저희 신경 써주시느라 너무 고생하셨어요!”
미나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무하도 덩달아 내 앞에 서며 강아지처럼 눈을 빛냈다.
“신지의 헌터님께서 주신 기회, 절대로 그냥 날리지 않을게요!”
“반드시 이 배리어 연구를 성공시킬게요!”
내가 이들에게 한 거라곤 자신감을 조금 북돋워 준 것뿐인데. 약간 머쓱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말없이 웃으며 이 천재 남매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 * *
그날 새벽.
“으음…….”
지의가 이불을 끌어 올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답답해서 열어둔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잠깐 뒤척이던 그의 얼굴이 이내 다시 평온해졌다. 지의가 작게 숨을 내쉴 때마다 몸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우웅.
그때 인벤토리 속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평소 같으면 금방 깼겠지만, 오전부터 여러 가지 일이 있어 푹 잠든 지의를 깨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우웅, 우웅.
핸드폰도 마지막 힘을 다해 울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든 알리려는 것처럼.
우웅, 툭.
하지만 결국 의미 없이 종료되었다. 인벤토리 속 핸드폰은 다시 무거운 적막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깜박거리는 화면의 한가운데엔 그토록 애처롭게 울어댄 주인공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부재중 전화 3통]
[차도윤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