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환장의 파트너】
‘잘 될 것 같아?’
자아가 입을 열었다. 난 감았던 눈을 뜨고 좌석 등받이에서 살짝 등을 떼서 옆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비행인데도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있는 하미준 헌터와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는 차도윤 헌터가 보였다.
‘어떻게든 멋있는 모습을 보여 봐야지, 어쩌겠어.’
승무원에게 다 마신 콜라 컵을 건넨 후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하얗고 푹신해 보이는 구름 밑으로 초록빛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행선지는 제주도 A급 만장굴 던전, 신규 던전이다.
‘물론 난 이미 경험해 봤지.’
만장굴 던전은 동굴이 배경이라 시야 확보가 어렵고, 초음파 공격을 해오는 박쥐 몬스터 때문에 클리어 과정이 영 짜증 나는 던전 중 하나다. 하지만 내 고유 스킬이 박쥐의 초음파를 전부 무효화시켜 버려서 굉장히 쉽게 클리어했다.
내가 이 던전을 이번 시간선에서도 기를 쓰고 가려는 이유는 단 하나.
차도윤 헌터가 이 던전에서 내게 마음을 열었기 때문이다.
전투의 호흡이 잘 맞아서 서로의 실력을 인정했었고 신뢰할 수 있는 동료가 되었다.
난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 차도윤 헌터를 흘긋 보았다.
[차도윤 헌터]
[S급 바람 속성]
[공격계, 밸런스가 좋은 듯?]
[부모님 얘기를 극도로 꺼림]
[싹싹한 편은 아니지만 은근히 친절한 구석이 있음]
[독극물 때문에 죽을 뻔함. 성대를 심하게 다침. 집에 있었다는데, 왜지?]
[회장님을 존경하다 못해 사랑하는 것 같음]
.
.
.
[만장굴 던전에서 협공 대박이었는데]
차도윤 헌터와 만장굴 던전을 공략했다는 사실은 몇 번을 회귀해도 바뀌지 않았다.
‘이번에도 호흡을 맞추면서 반드시 관계 회복한다.’
―저희 비행기는 곧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원래 위치로 해주시길 바랍니다.
비행기가 지면을 향해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신지의 헌터, 엊그제도 던전 다녀왔다며. 체력 괜찮아?”
“네. 엄청 격렬한 전투는 없었거든요.”
“그렇담 다행이네. 이 던전이 어떤 곳일지 감도 안 와서 말이지.”
하미준 헌터와 대화하는 동안 차는 예쁜 해안길을 따라 부드럽게 달리더니 어느새 산길로 들어섰다.
만장굴
도착했나 보네.
커다란 안내판의 뒤쪽으로 컨테이너 박스와 함께 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님의 말과 함께 내가 가장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휘잉―
약간 싸늘한 바람이 피부를 쓸고 지나갔다.
저 동굴에서부터 불어오는 건가?
컨테이너 너머로 보이는 동굴 입구가 괜히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하미준 헌터와 차도윤 헌터도 밴에서 내려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아! 헌터분들 오셨어요!”
태블릿을 들고 있던 젊은 여자가 소리쳤다. 동굴 주변을 서성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고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들고 있던 펜을 귀 뒤에 꽂은 후 우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엇, 손 떤다.’
긴장한 건지 태블릿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허, 헌터 협회 제주도 지부 던전국 소속 좌민아입니다!”
“김 지부장은 어디 가고 웬 깜찍이가, 컥.”
하미준 헌터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가 짧게 숨을 토해 냈다.
이 인간의 카사노바 기질은 몇 번을 회귀해도 바뀌지가 않냐.
“지부장님은 회장님께 보고 중이세요. 그래서 제가 브리핑하러 왔습니다!”
“그래, 얼른 말해 주겠어?
민아 씨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태블릿을 두드렸다. 그러곤 좀 진정한 듯 귀에 꽂았던 펜을 다시 손에 쥐었다.
“어제 새벽에 여기 만장굴 근처에서 게이트 발생 전조가 감지되었고, 곧바로 통제에 들어갔습니다. 그, 그리고 곧바로 게이트가 발생했죠.”
전형적인 패턴이네.
민아 씨의 태블릿을 슬쩍 보니 지진파 같은 그래프가 들쭉날쭉 나있었다.
“파형이랑 게이트 성분을 채취해 봤을 때 A급 이상의 상급 게이트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아……. 제주도에서 이렇게 높은 등급의 던전이 등장한 건 처음이에요.”
“그건 그렇지. 제주도는 부산물 채굴용 최하급 던전만 있으니까.”
하미준 헌터가 팔짱을 낀 채로 만장굴과 컨테이너 박스를 한참 바라보았다.
“일단 갈까요?”
“분부대로.”
내 말에 하미준 헌터가 윙크를 하며 다시 민아 씨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민아 씨는 어깨를 흠칫 떨며 우리를 컨테이너 박스로 이끌었다.
‘아까부터 차도윤 헌터가 저기압이네.’
평소에도 말이 없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건조해 보였다. 단순히 피곤한 걸 수도 있지만… 뭔가 그것보다 더 사연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끼이익.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열자 담쟁이덩굴로 둘둘 감긴 나무 게이트가 우릴 반겼다.
“꽤 자연친화적인 문이군.”
“저희도 보자마자 좀 당황했어요. 만장굴 앞에 열린 거라 돌 게이트일 줄 알았거든요.”
원래 저렇게 안 생겼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텁.
“바로 가죠.”
아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차도윤 헌터가 가장 먼저 게이트에 손을 댔다.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팔에 힘을 줘 그대로 게이트를 밀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래, 깜찍이~”
“어휴, 좀 들어가요.”
하미준 헌터를 게이트 안쪽으로 꾹 밀어 넣은 후 가장 마지막으로 안에 발을 들였다.
싸아아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고 풀 냄새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꼭 수풀에 코를 박고 있는 것 같네.
그런데…….
‘왜 이렇게 시야 복구가 안 되지?’
금세 앞이 보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답답한 상태가 오래 이어졌다.
“하미준 헌터! 차도윤 헌…….”
파아앗.
“웃.”
불안감에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온 세상이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도, 동굴이 아니잖아?’
주위는 온통 수풀 담장뿐이었다.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높은 수풀 벽이 끝없이 이어졌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던전 시작 포인트가 달라진 건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동굴은커녕 굴러다니는 돌 하나 없었다.
“아.”
“어.”
수풀 벽에서 시선을 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긴 속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차도윤 헌터!”
“바로 옆에 계셨군요.”
이 사람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차도윤 헌터도 나를 보자마자 눈을 살짝 크게 떴고 이내 무기를 들며 주위를 경계했다.
“하미준 헌터는요?”
“잘 모르겠어요. 이제 막 시야가 돌아온 터라.”
골치 아파졌네.
자아를 꺼내 입가로 가져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하미준 헌터어!!”
우웅, 우웅, 웅.
내 목소리가 던전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지만 공기만이 잠깐 진동할 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지의 헌터……!”
아, 차도윤 헌터의 싸늘한 눈빛이 돌아왔네.
그는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한껏 경멸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관계 회복을 해서 돌아가겠다는 목표는 아주 가볍게 실패했다.
그나저나 내가 기억하는 만장굴 던전과 이 던전은 너무 차이가 크다. 여긴 마치…….
“미로 속에 있는 것 같군요.”
“아,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차도윤 헌터가 손을 뻗어 수풀 벽을 살짝 만졌다.
사악.
“읏.”
“괜찮아요?!”
종이에 베인 것처럼 차도윤 헌터의 손등에 가느다란 선혈이 맺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닿았던 나뭇잎은 아까보다 더욱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아무래도 접촉할수록 더욱 강해지는 형태인 것 같네요.”
후웅―
차도윤 헌터의 ‘하늬바람’이 가볍게 불었다. 그의 손등에 있던 상처 위로 천천히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겨먹은 던전인지, 공중에서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잠깐 올라가서 확인하고 올게요.”
‘낮말을 듣는 새’로 도약했고 계단을 오르듯 허공을 밟았다.
‘어디 보자, 벽이 꽤 높…….’
쿵!!
“악!”
“윽!”
수풀 벽의 가장 높은 곳이 잠깐 보인 순간 곧바로 몸이 밑으로 끌어내려졌고, 그와 동시에 차도윤 헌터와 머리를 박았다.
“아으… 뭐야, 대체…….”
‘더럽게 아프네, 진짜.’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고, 고통이 어느 정도 멎었을 때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형편없이 스킬을 쓸 거면 아예 쓰지 말든가요!”
“아니, 이게 제 문제가 아니라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저를 끌어당겼다니까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예요?”
차도윤 헌터가 날카롭게 쏘아붙이며 미간을 구겼다.
이 던전에서 나가면 사이가 더 안 좋아지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면 너무 곤란해지는데.
“아, 아아, 들려?”
그 순간 하미준 헌터의 목소리가 울렸다. 꼭 마트 안내방송 같은 음질이었다.
“하미준 헌터! 지금 어디 있어요?”
“아, 얘기하는 거 까먹었네. 여기선 신지의 헌터와 차도윤 헌터의 위치만 알 수 있고 소리나 모습은 전혀 안 들리고 안 보여.”
우리 위치만 보인다고? 하미준 헌터는 우리랑 같은 곳에 떨어진 게 아닌가?
“핵심만 간단하게 얘기할게. 이 던전은 미로 던전이야. 옛날에 이 근처에 꽤 큰 미로 공원이 있었거든.”
‘하필 바뀌어도 이 던전이 바뀌어?’
차도윤 헌터에게 좋은 모습 보여 줄 기회가 완전히 물 건너갔다.
“아무튼 내가 길잡이고, 신지의 헌터와 차도윤 헌터가 이 미로를 빠져나오면 돼.”
하미준 헌터가 낮게 웃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 그리고 또 당부하고 싶은 게 있는데.”
키이잉.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수풀 속에서 웬 나무줄기가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날아와 나와 차도윤 헌터의 손목에 달라붙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무조건 1미터 내를 유지해야 해.”
“뭐라고요?!”
“…네?”
나와 차도윤 헌터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튀어나왔다.
철그럭.
하미준 헌터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하듯, 차도윤 헌터의 손목과 내 손목은 수갑 같은 나무줄기로 둘둘 감겨 있었다.
아까 위로 올라갔을 때 차도윤 헌터 쪽으로 끌어내려진 것도 이 던전의 특성 때문이었나 보다.
“그리고 미로엔 웬만하면 손대지 말아 줘. 손대는 순간 나한테 바로 공격 날아오거든.”
차도윤 헌터가 자신의 손등과 수풀 벽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 두 사람 얼굴이 안 보이는 게 진짜 아쉽네. 꽤 볼만할 텐데.”
“저 인간도 참…….”
“아무튼 계속 둘이 같이 있고 싶은 거 아니면 얼른 직진해.”
뚝.
통신이 끊기고 어색한 적막만이 나와 차도윤 헌터 사이를 맴돌았다.
들어오자마자 머리 박고 서로 신경을 박박 긁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인간과 손목이 엮였다.
코미디가 따로 없네.
“뭐, 탈출은 해야 하니까 작전을 짜죠.”
차도윤 헌터는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미간을 꾹꾹 누른 후 다시 ‘나팔꽃’을 손에 들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 오른손과 차도윤 헌터의 왼손이 엮인 것이다. 난 탄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으니까 왼손으로 쏴도 어느 정도 맞힐 수 있지만, 차도윤 헌터는 화살을 쏘는 것부터가 일일 테니까.
“몬스터가 나오면 방어는 제가 할 테니까 차도윤 헌터가 공격을 해주세요.”
“방어계 스킬 있어요?”
“없어요. 대신 이걸로 실드를 뽑아낼 순 있거든요.”
자아를 흔들어 보이자 차도윤 헌터가 고개를 살짝 꺾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전보다 노련해진 것 같네요.”
“당연하죠.”
기억이랑 같이 전투 감각도 돌아왔다. 아직 부족한 부분은 많지만 차도윤 헌터가 기억하는 나와는 좀 다르겠지.
쉬익.
그때 가시 덩굴이 뱀처럼 기어와 우리의 발목을 노렸다.
‘벌써 시작이군.’
우웅.
휘잉―
발목 앞에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실드를 세우기가 무섭게 차도윤 헌터가 나팔꽃의 시위를 당겼다.
탁!
바람 화살이 약간의 스파크와 함께 가시 덩굴에 정확히 박혔고, 그것은 금방 먼지가 되어 부스러졌다.
호흡이 생각보다 괜찮은데?
“시부야 던전 이후로 합동 공격은 처음이네요.”
나름 괜찮은 연계 공격에 차도윤 헌터를 향해 웃어 보이자 그가 고개를 홱 돌렸다.
“호흡은 별로 안 맞은 것 같은데요.”
“잘 맞았는데.”
“흥.”
‘이렇게 된 이상 미운 정이라도 들게 해야겠네.’
얼굴에 불만을 덕지덕지 붙인 차도윤 헌터와 함께 본격적인 미로 던전의 공략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