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65화 (65/366)

65화

“제 이 기억과 죄책감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설마.’

난 그대로 굳은 채 눈만 굴려 최민 헌터의 머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곤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로 그를 다시 한번 살폈다.

[내가 죽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봤어]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기록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찾는 나그네’에게 당한 후 시간을 되돌릴 때도 기묘한 상태창을 봤었다.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 상승]

‘아, 그런 거구나.’

이리저리 흩어졌던 기억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내가 회귀할 때마다 내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의 인과율도 같이 올라가고 있어.’

내 인과율이 지난 시간선부터 쌓아 온 기억의 양이라면, 최민 헌터의 인과율은 내 죽음에 대한 기억의 양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서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거고.

“신지의 헌터가 저 대신 공격을 맞은 그날부터, 계속 이상한 꿈을 꿉니다.”

그때 최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제 눈앞에서 신지의 헌터가 계속 죽는 꿈이었습니다.”

“…네?”

“처음엔 경포대 게이트 폭발 때의 신지의 헌터 모습이 나오길래 그냥 무의식이 반영된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장소가 점점 늘어가더군요.”

“…….”

“남원 S급 던전, 경주 A급 던전, 다낭 S급 던전… 그리고 여기, 감천 B급 던전까지.”

최민 헌터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만 돌렸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전 그게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분명히 제가 겪은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선명할 리가 없습니다.”

그가 평소보다 예민했던 것도, 몬스터 하나를 잡는 데도 과하게 공격했던 것도 전부 이해했다.

내가 기억하는 내 죽음은 대부분 고독했기 때문에 여기서 죽었을 때도 혼자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최민 헌터는 내 죽음을 수십 번 목격했다.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동료가 죽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았다.

‘내 죽음이 업이 아니라, 이 사람한테 죄책감을 덧씌운 게 업이었겠네.’

누군가를, 특히 이미 상처 입은 사람을 또다시 아프게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당신은 절 구했는데, 전 당신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보기만 한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최민 헌터가 다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꿈으로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는 일인데, 그는 굳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고 자신의 가설을 검증하려 했다.

‘한결같이 다정한 사람이구나.’

지난 시간선과 마찬가지로, 그는 지나치게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이런 최민 헌터한테 ‘당신의 눈앞에서 죽은 게 전부 맞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의 죄책감을 더 키울 수 없었다.

텁.

난 최민 헌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전부 꿈이에요. 전 살아 있잖아요.”

“…….”

“최민 헌터 의외로 귀여운 사람이네요? 꿈을 다 믿고.”

일부러 가볍게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건 불규칙적인 숨소리였다.

“만약 그게 꿈이 아니라고 해도, 그건 최민 헌터 때문이 아니에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그제야 최민 헌터가 고개를 들었고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는 입을 달싹이며 뭐라 말을 하려다 이내 꾹 다물어버렸다.

[발언 결과 : 혼란]

“그러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최민 헌터는 절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절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의 씨앗을 각성자 ‘최민’에게 심겠습니까?]

최민 헌터가 크게 동요했다. 반투명한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약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네.’

[각성자 ‘최민’에게 ‘절 구하러 온 사람이니까’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전부 우연입니다.”

“우연이어도 구한 건 마찬가지잖아요.”

‘그 우연이 수십 번씩 반복된 건 좀 이상하지만.’

내가 구원자의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이 사람도 날 구할 운명을 타고났을 수도 있겠네.

투쾅!

그때 벽화에 있던 꽃이 튀어나와 전망대 정중앙에 꽂혔다.

“시간을 너무 끌었군요.”

퍼버벙!!

최민 헌터가 꽃 그림을 불로 감쌌고, 녀석의 줄기가 우리 쪽으로 날아오기 전에 내가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탄환이 줄기를 찢고 불기둥을 그대로 관통하자 알록달록한 꽃 그림은 수십 갈래로 갈라져 전망대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갈까요?”

최민 헌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뒤를 따랐다.

좁은 골목길을 몇 번이고 돌고 나서야 광장에 도착했고, 게이트가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에 가까워질수록 벽화도 점점 기괴하게 변했는데, 이 광장도 영 멀쩡한 곳은 아니었다. 얼핏 보면 혈흔 같은 물감 자국들이 바닥에 뿌려져 있었고, 타일엔 토막 난 시체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시작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중간 보스와 비슷한 인간형 몬스터라 어렵진 않을 겁니다.”

최민 헌터가 그 말과 함께 게이트에 손을 올렸다.

♬♩♪

밝은 멜로디의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이곳의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경쾌한 음악이다.

터벅, 터벅.

‘이번에도 그림 그리는 놈인가.’

중간 보스와 비슷한 모습의 몬스터가 게이트 뒤쪽에서 걸어 나왔다. 녀석의 얼굴은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중간 보스와 다르게 입 부분은 뚫려 있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군.”

경계를 제외하고 말하는 몬스터는 춘향전 던전 이후로 처음이네.

녀석이 말을 할 때마다 물이 보글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최민 헌터의 시선이 녀석에게 고정돼 있는 걸 확인한 후 권능으로 녀석을 살폈다.

[B급 보스 몬스터 늙은 예술가]

[물 속성]

[그림 그리기, 물감 지대, 순간이동]

아까 그 몬스터랑 대충 비슷한 공격 패턴이겠군.

권능을 내려두고 곧바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푹.

“윽?!”

갑자기 중심을 잃은 탓에 탄환이 엉뚱한 곳을 향해 날아갔다.

‘이게 물감 지대인가 보네.’

타일이 전부 끈끈한 물감으로 변했다. 바닥을 향해 소리 탄환을 한 발 날리며 겨우 발을 뺐고 ‘낮말을 듣는 새’로 공중을 디뎠다.

파바바박.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늙은 예술가’가 내 쪽으로 손을 뻗자 형형색색의 물고기 그림이 나를 향해 맹렬하게 날아왔다.

투웅!

실드를 뽑아 물고기들을 전부 튕겨냈고 새빨간 불기둥이 그것들을 한 번에 휘감았다.

“주민들의 터전이…….”

늙은 예술가가 중얼거리며 최민 헌터 쪽으로 높이 도약했다. 녀석은 사방으로 페인트를 뿌렸고 최민 헌터는 불꽃 그 자체가 되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탕!!

늙은 예술가의 시선이 최민 헌터에게 향해 있는 틈을 타 자아를 작살총으로 바꿔 방아쇠를 당기자 새하얀 작살이 녀석의 팔에 박혔다.

푹.

녀석의 몸을 끌어당겨 물감 지대에 처박자 당황한 늙은 예술가가 허우적댔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곤 나머지 팔로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끼이이익.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걸렸다. 고개를 들자 광장 전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페인트 통이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큿!”

촤아아.

시뻘건 페인트가 쏟아지기 전에 재빨리 광장 밖으로 달렸다. 페인트에 깔리기 직전 최민 헌터가 내 허리를 낚아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콰과과광!!

아까 돌계단을 따라 쏟아지던 액체와 같은 것인지, 광장에 있던 사물들이 전부 녹아내렸다.

“감, 사합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팔을 풀었다.

하마터면 페인트에 깔릴 뻔했다. 순식간에 페인트에 잠긴 광장엔 늙은 예술가와 그가 그린 물고기 그림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빨리 끝냅시다.”

“좋아요.”

쾅!!

최민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손으로 허공을 그어 늙은 예술가가 서있는 공간에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공간을 찢는 폭발음과 함께 페인트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크아아아, 컥!!”

늙은 예술가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튄 물감이 녀석의 목구멍을 막아 그마저도 금세 멈췄다.

철컥.

녀석이 물감을 뱉으려 등을 보인 순간 자아를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펑!

이번엔 정확히 녀석의 머리를 꿰뚫었다. 늙은 예술가의 몸에 금이 쩍 가더니 이내 산산조각 났고, 페인트에 섞여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

그제야 한숨 돌리며 광장으로 내려왔다. 늙은 예술가가 죽은 탓에 물감 지대는 전부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

게이트를 열기 전 최민 헌터를 쓱 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광장 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내 죽음을 곱씹는 건가.’

어쩌면 최민 헌터 말고도 내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 지옥도처럼 난전 상황에서 죽은 적도 꽤 있으니까.

“최민 헌터.”

이름을 부르자 그의 고개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왔다.

“같이 갈까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최민’이 동요한다.]

최민 헌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고민하듯 내 손과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 이내 손을 맞잡았다.

“…네.”

[발언 결과 : 혼란]

여전히 머릿속은 복잡한 것 같았지만 최민 헌터는 내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급하게 굴 것 없다.

최민 헌터는 이번 시간선에서도 내 편이 되어 줄 거야.

손바닥 사이에서 은근하게 피어오르는 열기가 제법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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