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구원자와 구원자】
“스캔하겠습니다.”
협회 직원이 아이템을 스캔하는 동안 눈동자만 굴려 최민 헌터를 바라보았고 조용히 왼쪽 눈을 감았다.
[최민 헌터]
[가장 믿음직한 동료]
[‘방공호’ 스킬 보유자]
[조율자의 사도]
[나랑 닮았어]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생명의 은인]
[지옥도에서 세 번, 게이트 폭발로 한 번 사망]
[이 사람이 살아있어야 지옥도 앞까지는 갈 수 있어]
그거 말고도 수십 개의 문장이 그의 주위를 떠다녔다.
‘…세빈이랑은 다르네.’
텅 비어 있던 세빈이에 대한 기록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지만 일단 지금은 눈앞의 최민 헌터에게 집중해야 한다.
“갑작스럽게 초대해서 죄송합니다.”
그때 최민 헌터가 입을 열었다.
“네? 아뇨. 죄송할 것까지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놀라긴 했다.
아오시마 던전에서 나올 때쯤 난데없이 연락을 해서 바로 다음 날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도 기억을 절반 정도 되찾은 김에 이번 시간선의 최민 헌터를 알아갈 생각으로 그의 초대에 응했다.
“갑시다.”
최민 헌터가 게이트를 열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감천 B급 던전에 발을 들였다.
타닥.
“엄청 좁네요.”
“벽화마을을 배경으로 한 던전이라 그렇습니다. 몬스터들이 갑자기 튀어나오니 조심하세요.”
그의 말대로 우리 주위는 전부 담벼락이었다. 담에는 정성스러운 벽화가 그려져 있었고, 벽 안쪽으로는 낮은 지붕의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여기가 던전이 아니었다면 곳곳이 포토 스폿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던전인 터라 그냥 습격받기 딱 좋은 구조로밖에 안 보였다.
‘그나저나 익숙하네.’
회귀를 수십 번을 했으니 안 가본 던전이 있는 게 더 이상하겠지만.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청산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위치에 도착하였습니다.]
“어?”
“왜 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쩐지 익숙하더라.’
진짜로 와본 던전이었다.
여기서 업까지 쌓은 걸 보면 뭔 일이 있었던 건데.
최민 헌터와 관련이 있는 일인지, 아니면 내 문젠지 모르겠다.
키이잉―
‘길을 비추는 자’가 북서쪽을 가리켰다. 둘 다 비행이 가능하니까 곧장 게이트로 날아가도 되지만, 중간 보스와 일반 몬스터가 보스전에 한꺼번에 소환될 수도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지양하는 편이다.
최민 헌터도 별말 없이 골목 안으로 발을 들인 걸 보니 정석대로 클리어할 생각인가 보다.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주위를 경계했고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며 기습에 대비했다.
콰드득.
몇 미터 가지도 않아 예쁜 덩굴 그림이 벽 밖으로 튀어나와 최민 헌터의 목을 노렸다.
탕!
방아쇠를 당기자 흰 탄환이 줄기를 끊어버렸다.
퍼버벙!!
끊어진 단면에서 시뻘건 폭발이 일었고, 동시에 골목의 공기가 갑자기 상승했다.
“중간 보스 지점까지는 벽화 몬스터가 계속해서 튀어나올 겁니다. 주의하세요.”
최민 헌터가 잔해를 발로 밟은 후 다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근데 여긴 왜 오자고 한 거예요?”
결국 궁금증을 못 이기고 물었다. 내 말에 갑자기 발을 멈춘 최민 헌터가 고개만 살짝 돌려 어깨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 박힌 검붉은 눈동자가 무심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죠.”
약간 날이 선 대답이다. 그의 태도에 어색함을 느끼며 왼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민이 약간 화난 것 같지 않냐.’
자아도 나와 똑같은 평가를 내렸다. 계단을 올라가며 최민 헌터의 등을 빤히 바라보았다.
굳이 날 이 던전으로 부른 건 조율자에게 뭔가를 들었기 때문이거나, 개인적으로 날 조사하고 싶어서일 텐데. 뭔지 감도 안 와서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스스슥.
그때 무언가가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다. 담벼락에 붙어있던 검은 형체가 움직이는 게 시야에 걸리자마자 일단 자아의 방아쇠부터 길게 당겼다. 공기가 울리기 무섭게 벽에서 빠져나온 뱀 그림들이 배를 뒤집어 까고 괴로워했고, 최민 헌터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며 뱀 그림을 발로 눌렀다.
탕!
소리 탄환으로 뱀 그림을 쏘자 진득한 물감을 남기며 산산이 분해됐다.
확실히 B급까지는 한 발이면 충분하네.
쏴아아아―
이번엔 돌계단의 위쪽에서부터 시뻘건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낮말을 듣는 새’로 바로 도약했고 최민 헌터도 온몸에 불을 두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액체에 닿은 화분과 양동이가 연기를 내며 그대로 녹아내렸다.
퉁, 퉁, 퉁.
돌계단을 시뻘겋게 물들인 주범, 대형 페인트 통 더미들이 계단을 통통거리며 내려왔다. 난 곧바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녀석을 향해 당겼다. 새하얀 탄환이 박힌 페인트 통이 사방팔방으로 붉은 액체를 뱉어댔다.
퍼버버벙!
최민 헌터가 계단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놓으며 완전히 끝을 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화풀이라도 하는 양 과한 공격이다. 타닥거리며 불꽃이 튀고 이따금씩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고개를 돌려 최민 헌터를 바라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말투는 날이 서있었는데 그의 눈은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이동하시죠.”
최민 헌터는 계단의 가장 위쪽으로 유유히 비행했고 난 그의 뒤를 따라 허공을 밟았다.
탁.
계단의 끝엔 커다란 전망대가 있었다. 벽화가 그려진 작은 집들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고, 그 너머엔 푸른 바다가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렸다.
“여기가 중간 보스 포인트입니다.”
“어떤 몬스터예요?”
그가 대답하려다 말고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인간형 몬스터입니다. 방어력 자체는 약하지만 매우 민첩하고요.”
인간형이라……. 일단 음파로 공격한 다음에 바로 제압해야겠네.
터벅.
전망대의 한가운데로 오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까 우리가 올라온 돌계단을 통해 페인트 통과 브러시를 든 사람이 등장했다. 얼굴 전체엔 시커먼 물감이 덮인 상태였고, 녀석이 입고 있는 앞치마엔 붉은 물감이 묻어있었다.
최민 헌터보다 한 발짝 뒤로 간 후 왼쪽 눈을 조심스럽게 감았다.
[진짜 어이없게 당했네]
[죽지 말아야지]
[방심만 안 하면 쉽게 처치할 수 있어]
두근, 두근.
머리보다 몸이 더 먼저 반응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천천히 숨을 쉬었다.
내가 이 던전에서 청산해야 할 업이란 건…….
‘나 자신의 죽음이었어.’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방심했으면 B급 중간 보스 몬스터한테 죽은 거야?
투쾅!!
어이없어할 시간도 없다. 녀석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더니 나와 최민 헌터 사이로 나타났다.
“큿.”
뒤로 피하며 곧바로 자아를 조준했다. 하지만 몬스터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후였고, 내 탄환은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우우웅―
방아쇠를 길게 당기자 공기가 진동했다.
캬아아아악!!
쿵.
녀석이 비명을 지르며 지붕 위로 떨어졌고 뜨거운 불길이 녀석의 몸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시커먼 연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내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걸렸다.
쿠구구궁!!
‘버스?!’
수채화로 그린 것 같은 버스 수십 대가 전망대 위로 떨어졌다. 난 재빨리 뒤로 물러나 자아의 방아쇠를 다시 당겼다.
까드득.
버스 그림들이 새하얀 음파에 닿자 깡통처럼 찌그러졌다. 그제야 시야가 다시 확보되어 주위를 살펴 몬스터의 모습을 찾았다.
퍽!
“윽!”
그 순간 강한 힘이 내 어깨를 밀었다. 전망대의 난간이 허리에 닿는 동시에 몸이 뒤로 넘어갔고, 눈앞의 풍경이 새파란 하늘로 바뀌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을 느끼자마자 낮말을 듣는 새로 뒤로 굴러 허공을 디뎠다.
꺄하하하!!
전망대 난간 앞에서 몬스터가 양손을 뻗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철컥.
가슴을 쓸어내리며 곧바로 자아를 조준했고 그림을 그리려는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퍼버버벙!!
읏!
키에에에엑!!
자아의 탄환이 녀석의 몸에 닿기도 전에 새빨갛다 못해 푸른 기까지 도는 불기둥이 녀석의 밑에서 치솟았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업이 청산되었습니다.]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70%]
‘죽었네.’
몬스터가 죽자 업도 청산되었고, 동시에 이곳에서의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낮말을 듣는 새가 이번에 처음 개방된 스킬이다 보니, 지난번엔 여기서 그대로 떨어져 죽었다.
시간을 되돌리면서도 어이없어서 웃음이 날 정도였지.
텁.
“윽?!”
그때 갑자기 최민 헌터가 날아와 내 팔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전망대 쪽으로 끌어내렸다.
쿵.
벽에 등을 부딪쳤다. 얼얼한 통증에 아파할 틈도 없이 최민 헌터가 제 팔 안에 날 가뒀고 고개를 내려 날 바라보았다.
“저한테 하실 말씀 없습니까?”
‘어라.’
분명 아픈 건 난데 최민 헌터의 얼굴이 더 괴로워 보였다. 꽉 문 입술에선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고 미간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이 이곳에서 있던 일을 기억 못 한다면…….”
툭.
최민 헌터의 머리가 내 어깨에 얹혔다.
“제 이 기억과 죄책감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