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61화 (61/366)
  • 61화

    【러브콜】

    ‘이제야 겨우 벗어났네.’

    긴 오프닝 행사를 전부 보고 나니 벌써 열두 시가 되었다.

    간단한 식사를 하려 홀A로 발을 옮긴 순간부터 기묘한 시선들이 내게 꽂혔고, 이내 제법 많은 인파가 내게 몰려들었다. 친근하게 인사하며 자기를 소개하던 헌터들은 어느새 대화를 빙자한 은밀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진짜 SS급인가요?”

    “혹시 방송 쪽은 관심 없어요?”

    “저희 길드에서 이번에 야심차게 내놓은 방어구가 있는데 한번 입어만 보시면…….”

    “협회에선 잘해 주나요? 아, 별건 아니고 길드에 마침 자리가 좀 비어서…….”

    어떻게든 나를 회유해서 뭐 하나 해먹어 보려는 사람들의 수작에 억지로 웃어 보이며 슬슬 자리를 피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발언력의 힘을 빌려 떨어트려놓았다.

    내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어느새 표적을 바꿔 하미준 헌터와 세빈이, 그리고 회장님에게 필사의 영업을 하고 있었다.

    “후아아암.”

    “피곤해 보이시네용.”

    “왁, 깜짝아!”

    아메리카노를 든 한진우 헌터가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커피라도 좀 드세요! 저기 커피 머신 있던데.”

    “하… 그래야겠어요.”

    커피 먹어서 깰 졸음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안 마시는 것보다야 낫겠지.

    미나랑 무하 남매가 발표 세션에 무사히 들어왔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내가 모르는 사실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최대한 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에에엥―

    “음?”

    그때 갑자기 컨퍼런스 룸 내부에 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불났어?”

    “게이트 폭발 아니지?”

    “이쪽에 게이트가 있었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이 수군거렸고, 순식간에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참관객 여러분들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현재 애들러 천문관 앞에 C급 게이트가 발생하였고 몬스터 두 마리가 유출되었습니다.

    “뭐? 유출?”

    “애들러 천문관이면 바로 앞이잖아!”

    “그 호수 앞에 있는 거?”

    “으…….”

    사람들의 탄식과 걱정이 한마디씩 더해졌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일인데.’

    전에 없던 상황에 일단 입을 다물었고 사람들의 말소리 틈으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더더욱 귀를 기울였다.

    ―그레이스 길드가 수습 중에 있으며 참관객 여러분들은 현재 위치를 유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현재 애들러 천문관 앞에…….

    “두 사람, 잠깐 이쪽으로.”

    그때 하미준 헌터가 나와 한진우 헌터의 어깨를 감싼 채 그대로 홀A를 빠져나왔다.

    “다른 사람들은요?”

    “강세빈 헌터는 유출 몬스터 잡으러 바로 나갔고 여기 초청된 S급들은 다 로비에 있어.”

    그에게 이끌려 건물 로비로 나오자 컨퍼런스 직원을 포함해 다섯 명 정도가 모여 있었다. 그중엔 모르는 얼굴들도 섞여 있었다.

    ‘…뭐지?’

    무리에 있던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미소를 띤 채 날 바라보고 있었다. 예의상 살짝 고개를 숙여 준 후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송 들으셨죠? 빨리 용건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분주하게 태블릿을 두드리며 입으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유출된 몬스터 두 마리는 지금 그랜트 파크에서 그레이스 길드원들과 교전 중입니다. 사실 그레이스 길드 소속 헌터들이 그렇게 전투에 능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합니다. 지원에 대한 보상은 확실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던전 클리어 팀이랑 외부 수습 팀으로 나누면 되겠군.”

    하미준 헌터의 말에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강세빈 헌터님께서 유출 몬스터 수습과 시민 대피를 담당하고 계십니다. 일단 여러분들 중 던전 클리어 팀을…….”

    “저랑 신지의 헌터가 적절할 것 같군요.”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직원의 말을 끊었다. 난데없이 언급된 내 이름에 목소리의 주인공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까 내게 눈인사를 했던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고, 직원은 잠시 말을 고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어떤 던전인지 예측이 되시나요?”

    “물론이죠. 최근 발생한 뉴욕 헤이든 천문관 C급 던전을 포함해서 23건 이상의 천문관 근처 던전들은 다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거든요.”

    “굳이 신지의 헌터님인 이유는요?”

    “천문관 던전엔 어둠 속성 몬스터들이 주로 분포되어 있어요. 빛 속성의 SS급 헌터라면 금방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는 짧은 분석을 마친 후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덕분에 쌍꺼풀 밑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속눈썹이 작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던전 공략은 저희 불릿(Bullet) 길드가 제일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아, 그 길드 소속이었군.’

    불릿 길드, 미국의 전투 중심 길드다. 길드원 전부가 전투계, 또는 방어계 헌터이고 던전 공략에는 도가 튼 곳이다. S급 각성자가 나오면 무작정 스카우트 제의부터 보내는 길드기도 하다.

    이번 시간선은 물론, 지난 수많은 시간선에서도 내게 러브콜을 보냈었다.

    “조슈아 군, 자신감이 남다르네.”

    하미준 헌터가 말을 얹자 그가 하미준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자신이 있는데 굳이 겸손할 필요 없으니까.”

    “오?”

    “아.”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하미준 헌터가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턱을 쓸 때쯤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슈아는 다시 아까와 같은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방금 약간 인상 쓰지 않았나.’

    “그럼 알겠습니다. 신지의 헌터님만 괜찮으시다면 조슈아 님과 함께 던전 클리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 * *

    탕!!

    게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몬스터가 튀어나오길래 곧바로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 탄환에 맞은 커다란 운석 조각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바닥 위로 떨어졌고, 먼지가 되지 못한 돌가루들은 천문관 앞 계단을 따라 도로록 굴러갔다.

    “이런……. 빨리 공략해야겠네요.”

    조슈아가 운석 조각을 발로 치우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지만 점프슈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실루엣에서 단단함이 느껴졌다.

    골격 자체가 튼튼한 것 같네.

    “조슈아… 헌터라고 했죠?”

    “아, 아직 정식 인사를 안 드렸군요.”

    그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슬쩍 보니 명함이었다.

    Guild Bullet

    Joshua Chester

    Master

    “…엥.”

    “불릿 길드의 길드장, 조슈아 체스터입니다. 그냥 조슈아라고 부르세요!”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이었잖아?!’

    불릿 길드 소속이라는 걸 들었을 때 끽해야 간부급이라고 생각했지, 이 정도의 인물일 줄은 몰랐다. 내가 잠시 허둥거릴 동안에도 조슈아의 눈은 나에게 꽂혀 있었다.

    “아… 한국 헌터 협회 신지의입니다.”

    “알고 있어요. 전 세계 유일 SS급 각성자, 그리고 DF 1위.”

    조슈아의 눈이 빛났다. 파란색 물감을 탄 것 같은 눈동자가 얼마나 깊은지 내 실루엣이 얼핏 비칠 정도였다.

    “DF 랭킹이 갱신됐을 때 정말로 놀랐어요. 제가 몇 년에 걸쳐서 탈환한 1위 자리를 한순간에 뺏겨버릴 줄이야.”

    “…잠깐. 그럼 제가 각성하기 전까진.”

    “네. 제가 1위였습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내 DF를 보고 미래 씨가 미국에 있는 누군가를 언급했었다. 그게 조슈아였구나. 지난 시간선에서도 1위였나?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것까진 기억나지 않네.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요. 목표를 바꿨거든요.”

    조슈아는 예쁜 눈웃음과 함께 허리를 살짝 숙여 내 앞으로 제 얼굴을 가져왔다.

    “신지의 헌터를 저희 길드로 모셔가는 걸로.”

    두근.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위압감에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 인간과 직접적으로 엮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점은 알겠다.

    “잘 부탁드려요.”

    “저야말로요. 길드에 관해서 궁금하신 게 있다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일단 최대한 정보를 캐봐야지.’

    그와의 짧은 악수를 마친 후 던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타닥.

    실제 천문관 내부를 배경으로 한 던전인 건지 로비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쪽으론 전시공간과 기념품 숍까지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역시 헤이든 천문관 던전이랑 똑같은 구조네요.”

    조슈아가 전시관 안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가며 ‘길을 비추는 자’를 슬쩍 보자 흰색 화살표도 전시관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냥 무작정 걷는 건 아니었구나.

    “아마 어둠 속성의 별자리 몬스터들이 일반 몬스터로 나올 거예요. 음… 그리고 중간 보스는 없을 것 같네요.”

    “처음 발생한 던전인데 파악이 빠르시네요.”

    “흐흥. 감사합니다.”

    ‘칭찬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조슈아가 배시시 웃으며 전시관을 가로질렀다.

    샤라랑.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소리가 난 쪽을 겨누자 시야에 검은색 별 모형이 걸렸다.

    탕!

    새하얀 탄환이 그 돌덩이를 꿰뚫자 여러 조각으로 분리됐다. 수를 늘린 별 조각은 우리를 향해 위협적으로 날아왔고, 난 곧바로 실드를 뽑아 전부 튕겨 냈다. 확실히 C급이라서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 무기도 하미준 헌터 작품인가요?”

    “네. 아까 보니까 하미준 헌터랑 아는 사이 같던데…….”

    “아, 별건 아니에요.”

    찰그랑―

    그의 양 엄지에 끼워져 있던 굵은 반지가 갑자기 흘러내리더니 손바닥만 한 잭나이프가 되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제 무기도 하미준 헌터가 만들어 줬거든요. 뭐, 그한테 무기 안 맡긴 S급 찾기가 더 힘들겠지만요.”

    말을 마치며 조슈아가 또다시 웃었다.

    한진우 헌터만큼이나 방긋방긋 잘 웃는 것 같네.

    조슈아의 무기는 평범한 잭나이프 두 자루였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긴 했지만 칼날이 제법 단단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그가 앞장서서 천문관을 헤집는 동안 난 조용히 왼쪽 눈을 감았다. 지독하게 얽힌 적이 없어서 그런가, 정보가 엄청나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조슈아 체스터]

    [불릿 길드장]

    [모든 S급 헌터들에게 스카우트 제안 날리는 놈]

    [S급 불 속성 공격계]

    [친절하고 온화한 성격, 동료가 많아]

    [지옥도가 열렸을 때마다 실종됨]

    지옥도가 열렸을 때마다 실종이라…….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지옥도와 관련이 있는 걸까.

    눈을 다시 원래대로 뜨고 이번엔 창조자의 눈동자를 빌려왔다.

    [조슈아 체스터(24) S급]

    [불 속성]

    [S급 공격계 스킬 ‘분노의 용암(Magma Fury)’ : 정해진 공간에 용암을 생성한다.]

    [연계 패시브 스킬 ‘화염 돌격(Flare Rush)’ : 활성화 시 움직임을 따라 불길이 솟는다.]

    [C급 치유계 스킬 ‘죽거나 타거나(Dead or Burnt)’ : 불꽃으로 외상을 치유한다.]

    [귀속 무기 : S급 이도 ‘광대의 칼(Clown's Knife)’, 사용자의 능력을 증폭시킨다.]

    [무기 비문 : 거짓말쟁이의 운명을 타고났구나.]

    엄청나게 특별한 스킬은 없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무기 비문.’

    거짓말쟁이의 운명을 타고난 데다가 지옥도가 열릴 때마다 실종된 대형 길드의 길드장. 수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쾅!!

    “이크.”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커다란 별자리 모형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맹렬하게 떨어졌다.

    탕!!

    곧장 옆으로 피해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자 새하얀 탄환이 그대로 별자리 모형을 꿰뚫었다.

    치이익.

    사방으로 퍼지는 돌가루는 시뻘건 용암이 삼켜버렸고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머리를 계속 보호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까 보니까 몬스터들이 대부분 낙하하는 형태네요~”

    조슈아가 어깨에 붙은 돌가루를 털며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최민 헌터와 비슷한, 나무 탄내 같은 체향이 훅 끼쳤다.

    “저희 길드의 스카우트 제안, 혹시 생각해 보셨나요?”

    조슈아가 나를 내려다보며 집요하게 시선을 건넸다. 반달로 접힌 눈매의 가운데 박힌 푸른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한번 찔러보는 식의 시도가 아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자기 길드로 끌어들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여지를 남겨서 정보를 좀 얻어 볼까.’

    사도 ‘가면’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녀석의 행동을 파악하려면 신뢰할 만한 정보 창구가 하나쯤은 있는 게 좋다.

    아자디바르 남매보다 지위가 높으면서 많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 아무리 생각해도 조슈아가 적격이긴 하지.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인 후 입을 열었다.

    “생각은 해봤어요.”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때 조슈아의 뒤로 떨어지는 별 모형이 보였다.

    타앙!!

    그의 어깨 너머로 자아를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약한 진동과 함께 탄환이 모형에 제대로 박혔고, 그것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져 바닥 위로 떨어졌다.

    조슈아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이 게이트부터 수습하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조슈아 체스터’가 동요한다.]

    “…하하.”

    [발언 결과 : 흥미]

    “그러죠.”

    조슈아는 내게서 한 발 떨어진 후 다시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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