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60화 (60/366)
  • 60화

    “와, 진짜 낯설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너무나 어색했다. 검은 단발에 흰 셔츠, 검은 정장 바지와 재킷. 낮은 구두까지 신고 있어서 어느 회사 신입 사원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딩동.

    “지의야.”

    “어어~ 지금 나가!”

    준비를 다 마친 세빈이가 초인종을 눌렀다. 서둘러 카드키를 챙겨 재킷 안주머니에 넣은 후 방을 나서자마자…….

    “좋은 아침.”

    “와…….”

    인사보다 감탄을 먼저 내뱉었다.

    얘 진짜 슈트 입고 태어났나?

    평소 옷차림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슈트 재킷보다 트렌치코트의 형태를 한 ‘검은 뱀의 허물’을 더 자주 입었기 때문에 분위기가 더욱 성숙하게 느껴졌다.

    “잘 잤어? 어제 늦게 잤잖아.”

    “아, 엉. 갑자기 잠들어서 미안.”

    “잘 잤으면 됐지.”

    세빈이가 싱긋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이그제큐티브룸 투숙객 전용이라 금방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는 곧바로 로비로 내려갔다.

    “Good morning!”

    ‘아, 맞다. 통역기.’

    조앤의 말을 듣자마자 급하게 통역기를 귀에 꽂아 넣었다. 그제야 그가 하는 말이 제대로 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한 사람씩 로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아하하, 신지의 헌터, 제법 잘 어울리는군.”

    하미준 헌터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모습 중에 가장 단정한 차림을 하고선 느끼하게 윙크를 날렸다.

    회장님과 한진우 헌터를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이 내려오자 조앤이 입구 쪽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럼 바로 이동할게요!”

    이미 밖에는 우리가 어제 탄 리무진이 와있었다. 타자마자 넓은 도로를 차가 부드럽게 달렸다. 창문을 살짝 내려 아침 공기를 쐬니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바다라고 생각할 만큼 커다란 호수를 지나자 얼마 안 있어 컨벤션 홀 앞에 도착했다.

    ‘분위기는 전이랑 비슷하네.’

    헌터 마켓 수준으로 커다란 홀에 의자가 빼곡히 놓여 있었고, 단상 위에는 성조기와 윈디 길드의 깃발부터 시작해서 이번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모든 조직의 상징기가 걸려 있었다.

    “메인 홀에선 오프닝 행사와 학술 발표가 있을 예정이고, 옆에 있는 홀A에는 열두 시부터 식사와 다과가 세팅되니까 자유롭게 드셔도 됩니다. 다시 호텔로 돌아가시려면 접수처에 말씀해 주세요! 제가 말해 뒀으니까 금방 차를 불러 줄 거예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이따 발표 때 보러 갈게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아, 여기 이름표 받으시고!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조앤은 호탕하게 웃으며 단상 뒤로 사라졌고, 회장님은 우리에게 이름표를 나눠 주었다.

    ‘아직 오프닝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까, 아자디바르 남매를 찾아볼까.’

    만약 여기에도 없다면 진짜로 이번 시간선에 그 남매는 없는 것이고, 존재한다면 적어도 컨퍼런스에는 왔을 것이다.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세빈이에게 살짝 말하고 인파로 북적이는 홀을 가로질렀다.

    미나랑 무하가 어떻게 생겼더라? 둘 다 안경 썼던 것만 기억나는데.

    포털 사이트 프로필에 있던 모습을 최대한 떠올리며 눈으로는 부지런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그냥 뒤에 서서 듣기만 할게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을게요!”

    “아니, 안 된다니까 그러네?”

    입구 쪽에서 웬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를 아래로 길게 땋은 여자가 접수처에 있는 직원의 팔을 붙잡고 울상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 있던 남자는 접수 데스크에 거의 몸을 기댄 채로 발을 동동거렸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퐁실거리며 흔들렸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피부와 검은 눈동자, 그 위를 덮은 두꺼운 안경. 그리고 두 사람의 손목에 있는 레터링 타투.

    ‘아자디바르 남매다!’

    근데 왜 이렇게 어려 보이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은 미래 씨와 동년배인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자디바르 남매는 기껏해야 내 나이 정도로 보였다. 내 회귀 때문에 그동안 크고 작은 부분들이 바뀌긴 했지만 나이가 어려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애초에 이 컨퍼런스는 초대받은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어. 너희들 초대받았어?”

    “…아뇨.”

    “뒤에 자리 몇 개 남는 거 다 알아요. 누구는 가고 싶어도 못 가는데, 초대받은 사람 중에 연구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미나~?”

    “치.”

    타이르는 듯한 직원의 말투에 미나가 입을 비죽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무하도 미나의 옆에 딱 붙어 서서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일단 지금 상황으로 봐선 미나와 무하는 윈디 길드 소속이긴 하지만 아직 너무 어려서 컨퍼런스에 참가조차 할 수 없는 것 같네.

    당황스럽긴 하지만 일단 이 남매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난 조심스럽게 접수처 쪽으로 걸어갔고, 내 인기척을 느낀 건지 직원이 생긋 웃으며 나를 맞이했다.

    “아! 신지의 헌터님.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요, 별건 아니고…….”

    눈만 살짝 굴려 미나와 무하를 올려다보았다. 미나는 나를 빤히 보다 이내 몸을 부르르 떨었고 무하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야, SS급. 한국에 있는 SS급!”

    “뭐어?”

    “DF 1위……!”

    난 남매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이곤 다시 직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 친구들도 윈디 길드 소속인가요?”

    “아, 하하… 네. 저희 신입이죠. 이제 한 달 됐어요.”

    한 달이라……. 진짜 막내네.

    “윈디 길드에 들어올 정도면 엄청 똑똑하겠네요.”

    “아하하, 최연소 길드원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죠.”

    통역기가 없는 미나와 무하는 그저 나와 직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열심히 눈치를 볼 뿐이었다.

    “혹시 가능하다면…….”

    나는 직원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저 친구들, 발표 세션 때만 들여보내 주면 안 될까요?”

    “네, 네?”

    직원이 눈을 크게 떠서인지 아자디바르 남매도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까 대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하하, 네, 어… 다른 학자들과 귀빈들이 많다 보니 좀 어렵더라고요.”

    “그럼 혹시 제 자리를 이 친구들한테 양도해도 될까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비각성자 ‘피터 해리슨’이 동요한다.]

    오케이, 일단 동요는 시켰다.

    혼란스러워하는 직원이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컨퍼런스는 저보다 이 친구들에게 더 값진 경험이 될 것 같아서요. 연구 중심 길드의 최연소 길드원들이잖아요. 얼마나 많은 걸 배우겠어요.”

    “아, 아무리 그래도 신지의 헌터님의 자리를 드리기엔 저 친구들의 능력이…….”

    “충분해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시간선에서 아자디바르 남매는 배리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이번엔 나이가 어려지긴 했지만 잠재력은 충분할 것이다.

    이번에도 아자디바르 남매는 세상을 지킬 배리어를 만들어낼 거야.

    [발언 결과 : 수용]

    “플라스틱 의자 두 개 추가하는 정도면 괜찮겠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발언력과 직원의 배려 덕에 아자디바르 남매를 홀 안으로 들여보내는 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아무런 소득 없이 귀국할 뻔했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안 직원이 미나와 무하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의 손에 통역기를 쥐여 주었다.

    “진짜요?!”

    “무르기 없어요! 줬다 뺏기 없어요!”

    “알았다, 알았어. 빨리 신지의 헌터님한테 감사하다고 해.”

    아자디바르 남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악!!”

    그리고 곧 푹 수그려진 고개와 함께 힘찬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혹시 잠깐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신지의 헌터님이랑요? 저희가?”

    극존칭 진짜 적응 안 되네.

    미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홀 구석으로 발을 옮기자 남매가 내 뒤를 쪼르르 따라왔다. 둘 다 덩치는 나보다 크면서 행동은 꼭 병아리 같다.

    사람이 잘 왔다 갔다 하지 않는 창고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천천히 살폈다.

    미나 아자디바르, 아자디바르 쌍둥이 남매 중 동생. 배리어 연구 때 아이디어를 제시한 핵심 인물. 그리고 그의 쌍둥이 오빠인 무하 아자디바르. 미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면서 연구의 디테일한 부분을 챙긴 인물이다.

    “헌터님?”

    “아, 맞다. 그… 최연소 길드원이라고 들었어요!”

    “뭐, 사실 그렇게 어린 나이는 아니긴 해요.”

    “열아홉 살이면 다 컸지. 그냥 우리 길드원들이 다들 나이 먹은 사람뿐이라서 그래요.”

    아까 잠깐 보고도 느낀 건데, 미나는 정말 화끈했다.

    ‘한 100배 순한 버전의 미래 씨 같은 느낌이네.’

    미국 나이로 열아홉 살이면 대학교 1학년인가?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일단 넘어가자.

    “어떻게 윈디 길드를 들어가게 된 거예요?”

    “저희 담임 선생님이 저희 몰래 추천서 넣었어요.”

    “무하랑 밥 먹다가 하는 소리를 들었나 봐요.”

    뭔 소리를 했길래?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건물을 쭉~ 감싸는 배리어가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거든요.”

    두근.

    배리어. 저들의 입에서 그토록 듣고 싶어 하던 말이 드디어 나왔다.

    “여기로 이민 오기 전에 살던 동네는 게이트 관리가 안 돼서 허구한 날 게이트가 터졌거든요.”

    “그럴 때마다 트럭 타고 대피했어요.”

    “힘들었겠네요.”

    아, 맞다. 이 사람들 인도에서 태어났지.

    까먹고 있던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아무튼 여기 와서도 무하랑 저랑 배리어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그걸 저희 담임 선생님이 듣고 윈디 길드에 추천서를 넣었어요.”

    “그 배리어에 대한 거 자세히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당연하죠! 신지의 헌터님 덕분에 저희가 여기 있는걸요!”

    아자디바르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미나가 볼펜 끝으로 안경을 쓱 올린 후 수첩에 네모난 건물을 그렸다.

    “간단히 얘기하면 창문 청소 배리어예요!”

    “창문 청소 배리어?”

    “왜, 그, 창문 청소할 때 위에서 물 주르륵 떨구잖아요?”

    “그것처럼 위에서 액체형 배리어를 떨구는 거죠! 아, 그리고 이 배리어는 던전 부산물 안에 있는 물질에서 추출한 혼합액으로 만들어진 건데, 이게 던전 밖 공기에 닿으면…….”

    미나와 무하는 번갈아가면서 쉬지 않고 말했다. 배리어 혼합액이 어떤 비율로 만들어지는지, 그 안에 들어있는 성분은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전부 설명했다.

    한 10%밖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가 지난 시간선에서 보았던 액체형 배리어의 원리와 정확히 일치하다는 것.

    ‘이 남매는 이번에도 액체형 배리어 개발에 성공할 거야.’

    불안은 확신이 되었다. 아자디바르 남매의 강의 아닌 강의가 끝났을 때쯤엔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었다.

    “헤헤, 좀 바보 같죠? 그래도 상용화되면 편할 것 같지 않아요?”

    “최고예요. 과학은 전혀 모르지만 이 아이디어가 엄청나다는 건 알겠어요.”

    “신지의 헌터님만큼이나 길드원들도 인정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미나가 한숨을 푹푹 쉬며 수첩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혼합액을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후속 연구는 지원을 안 해줘요.”

    “연구 지원금이 다른 길드원한테 먼저 가서 그런가 봐요…….”

    무하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단상 쪽을 바라보았다. 연구 발표를 준비 중인 다른 길드원을 보는 듯했다.

    아자디바르 남매가 이 연구를 그만두게 만들어선 안 돼.

    ‘하루 종일 던전만 돌아서 부산물 캐올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할 텐데…….’

    다른 투자자를 구해볼까? 이 남매의 연구에 관심을 가질 만한…….

    “…미래 씨?”

    “미래? 안미래 소장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미나가 내 쪽으로 고개를 쭉 뺀 채 되물었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반짝거렸다.

    “아, 아세요?”

    “당연하죠!!”

    이번에도 미나와 무하가 동시에 대답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미래 씨의 파급력은 이 정도구나.

    아무튼 미래 씨한테 이야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세기의 천재한테 이 연구가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혹시 이 내용, 미래 씨한테 전해도 될까요? 아이디어를 빼가겠다는 건 절대 아니고.”

    “아, 당연히 믿죠! 신지의 헌터가 그럴 사람 아니라는 건 5분 만에 이미 파악 끝냈어요!”

    미나가 내 팔을 가볍게 치며 호탕하게 대답했다. 미래 씨 이야기가 나와서 한껏 흥분한 모습이다.

    뭐, 이렇게까지 믿어 준다고 하니 마음은 든든하네.

    “꼭, 꼬옥~ 제발~ 저희 아이디어를 안미래 소장님께 전해 주세요!”

    “알겠어요. 최대한 긍정적인 반응 나오도록 설득해 볼게요.”

    “야호!!”

    미나와 무하가 하이파이브를 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짝.

    손뼉을 쳐서 남매의 주위를 내 쪽으로 끌었다. 둘은 똑같이 생긴 눈을 빛내며 내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미나와 무하의 이 배리어는 분명히 세상을 구할 거예요.”

    “와아…….”

    “그러니까 연구를 쉬지 말아주세요.”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이 배리어는 분명히 세상을 구할 거예요’의 씨앗을 각성자 ‘미나 아자디바르’에게 심겠습니까?]

    [‘이 배리어는 분명히 세상을 구할 거예요’의 씨앗을 각성자 ‘무하 아자디바르’에게 심겠습니까?]

    때마침 알맞은 씨앗이 튀어나와 줬다. 난 상태창을 향해 조용히 수긍했고, 그러자 이내 푸른 글자가 빠르게 바뀌기 시작했다.

    [각성자 ‘미나 아자디바르’에게 ‘이 배리어는 분명히 세상을 구할 거예요’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각성자 ‘무하 아자디바르’에게 ‘이 배리어는 분명히 세상을 구할 거예요’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어떻게든 성공해 보일게요.”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41%]

    아자디바르 남매의 눈에선 전과는 다른 결연함이 느껴졌다.

    “너무 감사해서 그런데 한번 안아도 돼요?”

    “푸흡.”

    엉뚱한 면은 여전히 있지만.

    미나는 나를 향해 팔을 벌렸고 난 그런 그를 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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