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59화 (59/366)
  • 59화

    장거리 비행의 다른 말은 사육이다. 타자마자 웰컴 드링크를 주길래 쿠키랑 같이 마셨더니 이륙하자마자 바로 점심을 줬다. 불을 끄고 잠깐 재운 후에는 얼마 안 있어 저녁을 줬고 또 재웠다.

    ‘이 정도로 먹이는 건 거의 고문 아닐까…….’

    승무원이 중간중간 각종 간식이 나와 있는 메뉴판을 내밀었지만 난 기꺼이 사양했다.

    여기서 더 먹으면 진짜로 역류한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전용 게이트를 나와 던전 학회의 직원과 합류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스트레칭을 하자 모든 관절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울었고 내 입에서도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괜찮아?”

    “엄청 뻐근하네…….”

    세빈이가 퍽 심각한 얼굴로 나를 살필 때쯤 하미준 헌터가 자동 통역기를 내밀었다. 통역기를 귀에 꽂자 영어로 들리던 안내 방송이 똑같은 목소리의 한국어로 들리기 시작했다.

    ‘이건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현대 문명에 감탄하며 직원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기분 좋게 따뜻한 햇살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김강희 회장님 맞으시죠?”

    엄마 나이 정도로 보이는 흑인 여자가 기둥에 기대서 있다가 우릴 발견하곤 밝게 웃으며 회장님과 악수를 나눴다.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윈디’ 길드 소속 조앤 펠트입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장 김강희입니다. 여긴 협회 소속 S급 헌터들이고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피곤하실 테니 일단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조앤이 가리킨 곳에는 리무진 세 대가 쪼르르 서있었고, 우리가 가자마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무슨 변신이라도 할 것처럼 생겼네.

    “두 분씩 호텔로 이동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호텔에서 보지.”

    회장님이 가장 앞에 있는 차에 타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진우 헌터와 하미준 헌터가 같은 차에 올라탔다.

    “지의야, 우리도 타자.”

    “아, 응.”

    세빈이의 손에 이끌려 차에 타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에 훅 끼쳤고 운전석에 앉은 기사님의 친절한 인사가 돌아왔다. 창밖으로 펼쳐진 넓은 도로와 새파란 하늘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우리나라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반갑습니다! 윈디 길드 소속 폴입니다. 호텔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폴은 밝게 인사하며 엑셀을 밟았고 한 손으로 라디오를 켰다. 매장에서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팝송이 흘러나오고, 리무진은 물가를 따라 시원하게 달렸다. 모든 게 너무나도 평화로워서 종말은커녕 게이트 하나 터질 것 같지 않은 분위기다.

    Wise, Will, Windy

    하늘을 날아다니는 커다란 LED 광고판에 윈디 길드의 광고가 걸려 있었다. 남색의 책 엠블럼 옆에 적힌 슬로건이 길드의 정체성을 보여 주고 있었다.

    미국은 헌터 협회가 따로 없고 지역별로 설립된 길드가 헌터들을 관리한다. 길드장은 주로 S급 헌터들이 맡았고 길드장의 성향에 따라 길드의 성격은 천차만별이었다.

    그중 우리를 초청한 윈디 길드는 연구 중심 길드, 즉 던전을 공략하는 것보단 부산물을 연구하거나 공략에 필요한 다양한 아이템들을 개발하는 것에 특화된 길드다.

    “윈디 길드는 연구 중심 길드라고 했죠?”

    “네! 던전 부산물과 게이트 폭발 시기에 관한 걸 연구하죠.”

    폴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가 이 길드에 얼마나 애정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희 길드엔 전투에 특화된 헌터는 거의 없어요. 창조계가 제일 많고 비각성자들의 숫자도 꽤 되죠.”

    “흥미롭네요.”

    “직접적으로 던전 안에서 몬스터를 잡기보단 그 안의 물질로 어떻게 던전 밖을 보호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다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있어요.”

    ‘던전 안의 물질로 던전 밖을 보호…….’

    신기한 접근이다. 그런 기조 아래 세상을 보호하기 위한 배리어가 나온 거겠지.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 헌터 협회에는 안미래 소장이 있죠?”

    “어, 맞아요.”

    “던전 연구에 그 사람의 논문과 실험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현대 기술은 안미래 소장의 등장 전후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미래 씨의 명성은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잘 안 된다.

    괜히 세기의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겠지. 성격이 괴팍한가 싶으면 또 마냥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 슈뢰딩거의 츤데레지만.

    “윈디 길드에도 유명한 연구원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네? 하하, 띄워 주시니 부끄럽군요.”

    폴의 입에서 아자디바르 남매의 이야기가 나오도록 슬쩍 떠봤다.

    배리어 연구 발표를 했을 당시에도 이미 주목받는 연구원이었으니까 아마 술술 얘기해 주겠지.

    “나오미 박사의 기력 회복제 논문이랑 크리스 씨의 부산물 가공법이 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긴 했죠. 그 연구 덕분에 생산 기간이 반으로 줄어들었으니까요.”

    “네, 네, 그리고 다른 연구도 많이 진행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왜 있잖아요……?”

    “아! 그거 말씀하시는 거군요!”

    폴이 손가락을 튕기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얼른 배리어 연구 이야기를…….

    “맷 씨의 인챈트 연구!”

    “…네?”

    “아~ 그거 대단했죠. 부산물 가공액을 세제처럼 사용해서 옷의 내구성을 높이는 아이디어! 실제로 상용화되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폴은 입에 모터가 달린 양 난생처음 듣는 인챈트 연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뭐지? 왜 아자디바르 남매 얘기를 안 하는 거지? 설마 이번 시간선에 그들이 없나? 그러지 않고서야 그들의 이름이 안 나올 리가 없는데.

    “윈디 길드 조사해 왔어? 엄청 많이 아네.”

    “어? 어어… 어떤 길드인지는 알아야 하니까.”

    세빈이의 말에 대충 둘러댄 후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던졌다. 미래 씨 같은 세기의 천재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자디바르 남매는 분명히 윈디 길드 내에서 엄청난 관심을 받아왔다. 배리어 연구 발표 전에도 이미 꽤 괜찮은 성과를 내던 사람들이었는데…….

    끼이익.

    그때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던 차가 속력을 줄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도로가 텅 비어 있었는데 창밖을 보니 꽤 많은 차들이 있었고, 앞을 보자 차가 늘어난 이유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뻗은 빌딩들과 오래된 것 같은 건물이 들쑥날쑥하게 솟아있었고, 도시의 시작이라는 걸 알려주듯 터널 입구에 ‘CHICAGO’라는 글자가 반짝거렸다. 투박하고 촌스러운 디자인이었지만 그것마저도 멋스럽게 보였다.

    커다란 쇼핑몰을 지나 다리를 건너고 빌딩 숲 한가운데에 있는 호텔 앞에 도착했다.

    “짐은 나중에 방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머무는 동안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차에서 내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세련된 로비가 우리를 반겼다.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과 친절한 직원들. 평범한 호텔 풍경이었다.

    “신지의 헌터~”

    “아, 저기다.”

    로비에 멍하니 서 있자 소파에 앉아 있던 하미준 헌터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앤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소파에 둘러앉아 있었고 나도 한진우 헌터 옆자리에 앉았다.

    “다 오셨죠? 그럼 다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전 윈디 길드 소속 D급 헌터, 조앤 펠트입니다. 컨퍼런스 일정을 도와드릴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히 박수를 치자 조앤이 싱긋 웃었다. 그는 바로 들고 있던 태블릿을 보며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우선 일정부터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호텔에서 쉬면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내일은 오전부터 참여하는 거죠?”

    “네. 컨퍼런스 오프닝 행사가 열 시이기 때문에 아홉 시까지 로비로 와주시면 됩니다. 오프닝 행사 참여 후에 학술 발표나 기타 행사는 자율이니 편하게 즐겨 주세요.”

    조앤이 품에서 카드키 다섯 개를 꺼냈고 하미준 헌터가 그것을 건네받았다.

    “전부 이그제큐티브룸으로 준비해 드렸습니다. 라운지 이용도 가능하니까 마음껏 이용하세요~”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지내겠어요.”

    “별말씀을요! 전 이만 가볼게요. 내일 아홉 시에 로비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앤이 서둘러 호텔을 나서자 회장님이 소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나이가 들면 장거리 비행은 좀 힘들군.”

    “한창 때면서. 아무튼 카드 받으세요.”

    하미준 헌터가 여행 가이드처럼 카드키를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신지의 헌터는 809호, 그리고 내가 808…….”

    탁.

    난데없이 등장한 손이 하미준 헌터 손에 있던 카드키를 낚아챘다.

    Room 807

    카드 마술인가?

    하미준 헌터가 들고 있던 808호의 카드키가 807호로 바뀌었다. 그리고 808호의 카드키는…….

    “제가 808호 쓸게요.”

    세빈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

    “이 한창 때의 청년 때문에 미치겠군. 마음대로 해~”

    “이따가 방에 놀러가도 돼?”

    “어? 그래!”

    ‘수학여행 느낌이라도 내고 싶었나?’

    생각해 보니 얘랑 어디 나가서 잔 건 중학교 수학여행 때가 마지막이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긴 했지만 세빈이는 나온 날보다 결석한 날이 더 많기도 했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 행동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크흠.”

    그때 회장님이 헛기침과 함께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럼 오늘은 쉬고, 내일 보도록 하지.”

    “네!”

    * * *

    “진짜 안 나오잖아…….”

    인터넷에 ‘미나 아자디바르’, ‘무하 아자디바르’를 검색해 봤지만 그들에 대한 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동명의 연예인만이 가끔 뜰 뿐이었다.

    ‘야, 너도 아자디바르 남매 기억하지?’

    ‘아자디바르?’

    ‘왜, 그 배리어 만든 쌍둥이 남매.’

    ‘아, 그 건물 전체 감싸는 형태로 액체형 배리어 만든 애들?’

    ‘그래. 걔네!’

    자아도 기억하고 있는 거 보면 바로 지난 시간선까지는 있었어. 근데 지금 시간선엔 왜 없지? 차도윤 헌터 성격이 좀 싸가지 없게 변한 거랑은 차원이 다른 변화잖아.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였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우리 집보다 넓을 것 같은 룸에 나 혼자 누워있으니 적막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엄마랑 아빠가 지유 병원에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잠드는 건 익숙했지만, 이렇게 조용한 곳에서는 유독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TV라도 틀어 놓고 자야 하나.’

    딩동.

    TV 리모컨으로 손을 뻗으려고 한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슬리퍼에 대충 발을 끼워 넣고 방문을 열자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비누 냄새가 훅 끼쳤다.

    “역시 안 자고 있었네.”

    세빈이였다. 세빈이는 배시시 웃으며 방 안으로 슥 들어왔고 자연스럽게 침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엉. 잠이 안 오더라. 시차 적응 못 했나 봐.”

    “나도.”

    끼익.

    세빈이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고 나도 다시 침대로 돌아와 일단 이불을 덮었다.

    “근데 왜 왔어? 잠 안 와서?”

    “응. 몸은 좀 피곤한데 정신이 너무 맑아.”

    틱.

    세빈이가 TV를 틀었다.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빈이가 볼륨을 낮추며 입을 열었다.

    “너무 조용하면 잠 안 오지 않아?”

    “어, 맞아. 나도 그래서 아까 TV 틀까 생각하고 있었어.”

    “생각해 보니까 우리 고등학생 때 비슷한 일 있지 않았나?”

    갑자기 추억팔이를?

    세빈이가 고등학생 때 있던 일을 이야기하며 혼자서 피식 웃었다. 헌터 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느라 별 추억이 없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얘기를 듣다 보니까 공유하고 있던 일화가 꽤 많았다.

    내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 선배 쥐어 팬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육상 대회에서 우승한 일까지. 세빈이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었다.

    ‘슬슬 졸리네.’

    세빈이의 이야기와 뉴스 소리가 적당히 섞여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푹신한 침구가 몸을 꼬옥 끌어안는 듯한 기분과 함께, 모든 소리가 내게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 * *

    “지의야.”

    “…….”

    세빈의 부름에 지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사르르 잠에 들어 일정한 속도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세빈은 그제야 TV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과 다르게 지의가 지나치게 조용한 곳에서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는다는 걸 증명하듯, 자신이 왔을 때 지의는 깨어 있었다.

    탁.

    세빈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껐다. 창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야경의 불빛을 제외하고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겼다.

    그는 지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두근.

    순간 꿈에서 본 지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영(影)’에 찔린 채 후련한 듯 웃고 있던 꿈속의 지의와 제 눈앞의 지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세빈은 손을 뻗어 지의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따뜻한 숨이 제 손에 닿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끼익.

    그는 불안을 그림자 속에 꾹 감춘 채 지의의 방을 나섰다. 시커먼 그림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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