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아메리칸 드림】
시카고 던전 컨퍼런스, 세계 3대 던전 컨퍼런스 중 하나다. 미국의 연구 중심 길드인 ‘윈디’ 길드가 주최하는 것으로, 각국의 상급 헌터와 유명 학자들이 주로 참여한다.
공부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 학회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 하나.
‘윈디 길드의 아자디바르 남매를 만나기 위해.’
미나 아자디바르, 무하 아자디바르. 이 쌍둥이 남매는 윈디 길드의 촉망받는 인재다. 그들은 이전 시간선에서 던전의 첨단 물질을 이용한 초경량 액체형 배리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그 배리어 덕분에 지옥도가 열렸을 때 미국은 그나마 오래 버텼다.
이들의 배리어 연구는 이 시카고 던전 컨퍼런스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그 후 얼마 안 있어 실용화에 성공했다. 실용화 성공 이후엔 수많은 헌터 협회와 길드로부터 주문 요청이 들어왔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는 납품 국가 순위에서 많이 밀렸다.
‘이번엔 발표 끝나자마자 바로 계약하자고 해야지.’
회장님을 설득해서 가계약을 맺으라고 하는 게 제일 최선이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하미준 헌터한테 돈을 꿔서라도 그들의 배리어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
이건 단순한 연구 지원이 아니라, 나중에 지옥도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보험이다.
우우웅.
어느새 고속도로에 진입한 리무진이 인천 공항을 향해 부드럽게 나아갔다.
‘미친, 저게 다 뭐야.’
창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인천 공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미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중에는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뭐, 그, 팬클럽 그런 건가?’
하긴, 나 혼자만 가는 거면 그냥 기자들 몇 명 오고 말겠지만 현역 연예인 겸 헌터인 한진우 헌터에 다른 사유로 방송에 자주 나오는 하미준 헌터, 그리고 세빈이까지 뜬다고 하니 저만큼 모일 만하겠네.
“기사님, 혹시 제가 1등으로 도착한 건가요?”
“그런 것 같은데요? 회장님 차는 지금 막 톨게이트 빠져나왔다고 했고……. 아, 다른 분들은 거의 다 오셨네요.”
“저, 저 지금 내릴게요.”
더 관심받기 전에 빨리 들어가자. 누구 한 명이라도 도착 시간 겹치는 순간 출국 사진으로 같이 박제당한다!
“아하하, 너무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기자들 일일이 상대하시지 말고 그냥 안으로 쭉!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기사님은 트렁크 버튼을 누른 후 운전석에서 내렸고 나도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었다.
“누구야?”
“아, 신지의 헌터다!”
기자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터지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속에는 사람들의 말소리도 섞여 있었다. 기사님이 건네주는 캐리어를 받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신호등 앞에 섰다.
“나 실물 처음 봐.”
“인상 되게 좋네.”
지난 시간선까지 포함하면 이미 수백 번은 더 기자들 앞에 서본 것일 텐데도 여전히 부끄러웠다.
찰칵, 찰칵, 찰칵.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사람들과 나의 기묘한 대치 구도가 이루어졌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네. 신호는 또 왜 이렇게 안 바뀌어?
끼익.
그때 또 다른 리무진이 도착했다. 열심히 나를 찍던 카메라 렌즈가 리무진 쪽으로 향하자 나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같이 고개를 돌렸다.
“세빈 누나~!”
“세빈아! 세빈 언니!”
차에서 내린 주인공을 눈으로 확인하기도 전에 이미 행복에 겨운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플래시가 터졌다.
차 문을 닫다가 내가 있는 걸 알아챈 세빈이가 손을 흔들었다.
“X발, 미친 거 아니야? 방금 웃은 거 봄?”
“사복 돌았다. 걍 흰 티에 청바지인데 뭔 저런 핏이 나와.”
횡단보도 너머에 있는 나한테도 다 들릴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크게 얘기하고 있는 거야?
카메라를 든 사람들 입에서 온갖 소리가 튀어나왔다.
“지의야!”
챠챠챠챠챠챠챠.
‘뭔 장마 때 빗소리가 나네.’
세빈이가 산뜻하게 웃자마자 카메라 셔터 소리가 공항을 가득 채웠다. 정작 화제의 주인공인 세빈이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캐리어를 끌며 내 옆으로 왔다.
“관심 쏠릴까 봐 빨리 들어가려 했는데.”
“응?”
챠챠챠챠챠챠.
‘아이고야.’
세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또다시 셔터 장마가 내렸다.
“미친, 방금 봤어?”
“X나 귀여워, 뭐야~”
셔터 소리 사이로 적나라한 표현이 귀에 꽂혔다. 다행히 세빈이는 못 들었는지 여전히 나를 보며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아니야……. 얼른 가자.”
마침 신호가 바뀌어 세빈이와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이번에는 리무진 한 대와 딱 봐도 연예인이 탈 법한 밴 한 대가 동시에 도착했다. 저런 연예인 차를 탈 사람이라면…….
‘아, 제대로 망했다.’
기자들과 카메라를 든 일반인들이 더욱 전투적으로 렌즈를 바꿔 끼웠고, 그러는 동안 그들 주변으로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챠챠챠챠챠챠챠.
밴 문이 열렸고 예상대로 한진우 헌터가 발랄하게 내렸다.
“아아악! 진우야!!”
“진우야, 잘 갔다 와!”
“진우야, 조심히 다녀와야 돼~”
목청 한번 끝내줬다. 한진우 헌터는 익숙한 듯 망원경에 가까운 카메라 렌즈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귀엽게 웃으며 횡단보도 쪽으로 총총 뛰어왔다.
“어, 신지의 헌터! 강세빈 헌터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어라, 신지의 헌터. 어디 안 좋으세요?”
“아뇨, 멀쩡합니다. 하하…….”
한진우 헌터의 매니저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올 때쯤, 뒤에 있던 검은 차에서도 누군가의 긴 다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야…….”
어이없음과 순수한 감탄이 섞인 반응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검은색 슬랙스 밑으로 드러난 날렵한 발목과 광이 나는 구두, 명품 로고와 함께 새빨간 꽃 프린팅이 크게 들어간 반팔 셔츠까지. 굳이 얼굴까지 보지 않아도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하미준 헌터! 이쪽도 한번 봐주세요!”
“미준 누나!!”
“미친. 기럭지 뭐임?”
온갖 감탄사와 환호성, 그리고 플래시 세례를 온몸으로 받으며 하미준 헌터가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손가락으로 살짝 내려 맨 눈으로 나를 보더니 다시 올려 쓰며 내 옆에 바짝 섰다. 시원한 박하향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우, 향수 냄새.”
“다들 잘 있었나~?”
“오랜만이네요, 하미준 헌터! 잘 지내셨어요?”
“한진우 헌터는 오늘도 아~주 귀여워?”
한진우 헌터는 입꼬리만 올리며 사회인의 기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오히려 인상이 구겨진 건 나였다. 하미준 헌터가 기자들과 자신을 보러 온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횡단보도 너머에서 여러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준아, 네 캐리어!!”
“아. 맞다, 맞다~ 고마워, 언니!”
리무진 기사님이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하미준 헌터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캐리어를 받아 들었고,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 진짜로 헌터가 아니라 연예인으로 사는 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신지의 헌터도 잘 지냈어?”
“네, 잘 지냈어요.”
찰칵, 찰칵, 찰칵.
엄청난 플래시 폭탄을 맞으며 횡단보도를 건넜고 그대로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월요일 점심쯤이라 그런지 내부는 꽤 한산했다.
“짐은 저 주시면 됩니다~”
협회에서 나온 직원들이 어느새 공항 안으로 들어와 능숙한 몸짓으로 캐리어를 전부 챙겨갔다. 그들은 전용 수속대의 컨베이어 벨트에 캐리어를 올려놓았고 얼마 안 있어 우리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엄청 스무스하네.’
모든 과정이 물 흘러가듯 자연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직원이 우리들의 여권과 표를 정중하게 내밀었다.
“퍼스트라운지를 이용하실 수 있으며 탑승 시간 전에 제가 전용기까지 인도를 도와드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두 손이 가벼워지자 진짜로 출국하는 느낌이 들었다.
출국 시간까지 여유도 있으니까 한진우 헌터 따라서 면세점 구경이나 할까?
“아무래도 내가 제일 늦었나 보군.”
“아,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하미준 헌터는 회장님 앞에서도 능글맞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회장님은 익숙하다는 듯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직원에게 여권을 건넸다.
“그나저나 오늘 회장님 엄청 젊어 보이시는데요? 저기서 오시는데 제 친구인 줄 알았지 뭡니까.”
“하하, 고맙네. 자네는 컨퍼런스가 아니라, 어디 밀라노라도 가야 할 것 같군.”
하미준 헌터를 빤히 바라보던 회장님이 살풋 웃자 동시에 눈동자 옆의 주름이 깊게 파였다.
“하지만 컨퍼런스는 패션쇼가 아니지. 제대로 된 정장 하나는 챙겼길 바라네.”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게 저런 거구나.’
차분하게 할 말만 한 건데도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미준 헌터는 입을 삐죽 내민 채 나와 회장님을 번갈아 보았고 옆에 있던 한진우 헌터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투덜거렸다.
“오늘 첫 개시한 옷인데 다시 캐리어 속에 들어가야 할 처지라니, 너무합니다~”
“저… 하미준 헌터랑 이상한 소문나고 싶지 않으니까 떨어져주시면 안 될까용.”
애교 가득한 목소리에 그렇지 못한 태도다. 하미준 헌터는 상처받은 듯이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곧 극복하곤 다시 한진우 헌터에게 기댔다.
“소문날 거였으면 진작에 나지 않았겠어? 우리 둘이 오붓한 저녁을 보낸 게 벌써 몇 번째인데.”
“그건 같이 쇼핑 간 거잖아요~ 저 이따가 가방 하나 살 거니까 같이 좀 골라주세요.”
“우리 진우 왕자님 말대로 하지.”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하미준 헌터를 내버려 두고 나는 먼저 전용 출국 게이트 쪽으로 발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