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57화 (57/366)

57화

‘별 경험을 다 해보네.’

음식에서 시선을 떼고 하미준 헌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직원이 썰어 주는 북경오리를 전병에 싸 먹으며 차분히 맛을 음미하고 있었고, 중간중간 식재료를 물어보기도 했다.

“저런, 지의 양. 입맛에 안 맞아?”

“네? 아뇨. 맛있어요.”

“다행이네.”

음식이 맛있는 거랑 별개로… 그냥 이 상황 자체가 당황스럽다. 방금 막 퇴원한 사람을 최고급 중식 레스토랑에 데려오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보니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래도 엄청 맛있네.’

아는 중국요리라곤 짜장면이랑 탕수육 정도가 전부였는데 테이블엔 처음 보는 냉채와 고기요리가 한가득 올라와 있었다.

“각성하고 나서 게이트 폭발은 처음 수습해 본 거지?”

“네? 아, 네.”

‘이번 시간선‘에선 처음이다. 하미준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직원에게 손짓했고, 곧바로 직원이 고개를 숙인 후 룸 밖으로 나갔다.

“어땠어?”

“정신없었죠, 뭐.”

“푸흡.”

솔직한 대답에 하미준 헌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입가를 한 번 닦은 후 다시 채소볶음을 먹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생선요리를 야금야금 베어 먹으며 내가 기억하는 하미준 헌터를 떠올려보았다.

창조계 S급 헌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 재벌, 카사노바. 뭐 이런 건 안 변한 것 같은데. S급 헌터로서 실력도 좋았고 동료로서도 무난했다.

그런데 그것 말고 내가 기억 못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단 말이지…….

“아, 눈에 뭐가 들어갔나?”

왼쪽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다 완전히 감아버렸다. 동시에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가 반응했고, 하미준 헌터의 주변에 황금색 글자가 떠다녔다.

[하미준 헌터]

[S급 대지 속성에 창조계?]

[개~~~~부자]

[카사노바]

[키 진짜 크네]

[미자 때 세빈이 후견인]

잡다한 말들 사이에 눈에 띄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속세에 너무 찌들었어]

‘아, 그런 사람이었지.’

하미준 헌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오직 쾌락만을 좇는 사람이었다. 손해 보고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고 모든 행동에는 대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의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이 인간에게 있어 가치 없는 말이었다.

그럼 지금 날 데려온 것도 뭔가를 얻기 위해선가?

“내가 왜 지의 양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궁금하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하미준 헌터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쭉 찢어진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그냥 한 번쯤 이렇게 지의 양과 얘기해 보고 싶었거든.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다고 해야 하나?”

“저를요?”

“응. 내가 아는 지의 양은 강세빈 헌터로부터 조금 들었던 게 전부라서.”

이번 시간선에서도 세빈이 후견인이었구나.

세빈이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각성을 해서 던전에 갈 때마다 후견인과 함께 가야 했는데, 그가 바로 하미준 헌터였다. 다른 S급들에 비해 같이 시간을 많이 보냈을 테니 친구인 내 얘기도 나왔을 것이다.

“지의 양이 ‘시체 모빌’에 당했을 때, 강세빈 헌터가 그러더라. 지의 양은 희생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제가요?”

하미준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빈이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나? 뭔가를 희생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그건 둘째 치고, 일단 길을 잃은 대화 주제를 다시 바로잡았다.

“근데 그게 하미준 헌터가 절 알고 싶어 하는 거랑 무슨 관련이 있어요?”

“좋은 질문이야, 지의 양.”

달그락.

그는 나이프로 가지를 썬 후 조용히 음미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가만히 생각해 봤어. 진짜로 지의 양이 희생에 익숙한 사람인가 하고.”

나이프를 든 하미준 헌터의 오른손이 천천히 들리더니, 그가 갑자기 나와 눈을 마주쳤다.

후욱.

“지금 뭐 하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이프를 든 하미준 헌터의 오른손이 본인의 왼손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난 급하게 뻗은 내 손을 그의 왼손 위에 덮었다.

“허억, 헉!”

나이프는 내 손등 바로 위에서 멈췄다. 서늘한 기운이 손가락 끝에서부터 죽 퍼졌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만큼 모든 감각이 예민해졌다.

“미, 미쳤어요?”

하미준 헌터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가 내 손등에서 시선을 떼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결론은 금방 났지.”

“…….”

“지의 양은 아무런 조건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할 사람이라는 결론이.”

탱그랑.

그가 나이프를 테이블 저 멀리 던져버렸다. 나이프는 테이블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지금도 봐. 지의 양은 나이프를 쳐내는 대신 내 손등을 덮었잖아.”

“아…….”

“마치 경계에서 나를 밀치고 공격을 대신 맞은 것처럼.”

난 하미준 헌터에게서 손을 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도 내가 이런 줄 몰랐네.’

전에도 앞뒤 안 재고 달려가는 경향이 있었는데 ‘살신성인’이 생긴 이후부터는 부상에 대해 아예 생각을 안 하게 되었다. 사실 쇼크로 100% 죽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데도.

“그래서 지의 양이 궁금했던 거야.”

달그락.

그가 몸을 앞으로 숙여 내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가 오늘따라 더욱 위험한 인상을 풍겼다.

“어떻게 사람이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구해 줄 수 있을까.”

“…….”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쉽게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을까.”

계산만 하며 살던 그가 변했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그가, 손해만 보며 사는 내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건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이번 시간선의 하미준 헌터는 지금까지의 그와는 확실히 다르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탁하지 않았고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를 회유해서 종말에 맞설 동료로 만들 기회는 지금뿐이다.

“…하미준 헌터.”

“응?”

“하미준 헌터는 만약에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뭘 할 것 같아요?”

내 질문에 하미준 헌터가 천장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나 보다.

“글쎄. 귀여웠던 애인이랑 한 번 더 좋은 시간 보내기?”

‘어련하겠어.’

쾌락주의자의 기본 성향은 어디 가지 않는 건지, 그의 대답은 세속과 쾌락 그 자체였다.

“저는 제 실수를 바로잡을 것 같아요.”

“실수?”

“네. 지금까지 살면서 꽤 많은 실수를 했거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지유의 마지막 약속을 들어주지 못한 것, 창조자의 사도가 돼서 세상의 종말에 일조한 것, 최민 헌터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 그리고 최민 헌터의 눈앞에서 죽은 것까지.

아마 그동안 저지른 실수만 쌓아도 바다 하나쯤은 금방 메울 것이다.

숙였던 고개를 살짝 들어 하미준 헌터를 바라보았다.

‘내가 스스로를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이유…….’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후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쉽게 스스로를 내던질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응. 나로선 이해가 안 가는 일이라서.”

그의 검은 눈을 똑바로 쳐다본 후 숨을 들이마셨다.

“그렇게 수십 번씩 내던지다 보면, 언젠가 모든 일이 올바르게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발언 결과 : 혼란]

최재윤 헌터, 연우, 그리고 최민 헌터까지. 수십 번의 시도가 없었다면 구하지 못했을 사람들이다. 내 모든 시간선엔 다 의미가 있었고,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그리기 위한 발판이 되어 주고 있다.

“하미준 헌터 대신 공격을 맞은 것도,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동료잖아요. 하미준 헌터가 살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연계 패시브 스킬 발동]

[‘말이 씨가 된다’]

[‘동료잖아요’의 씨앗을 각성자 ‘하미준’에게 심겠습니까?]

‘예.’

[각성자 ‘하미준’에게 ‘동료잖아요’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지의 양은 꼭 이미 삶을 한 번 살았던 사람처럼 이야기를 해.”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야.”

정곡을 찔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그냥 입꼬리를 씩 올렸다.

“하지만 지의 양이 나를 동료라고 생각해서 구한 거라면.”

[각성자 ‘하미준’의 ‘동료잖아요’의 씨앗 개화]

[각성자 ‘하미준’은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나도 신지의 헌터의 동료가 돼볼게.”

상태창 너머로 보이는 하미준 헌터의 눈엔 전에 없던 총기가 깃들었다. 날 부르는 호칭도 ‘지의 양’에서 ‘신지의 헌터’로 바뀌었다.

<사명>

[사령탑]

[‘말의 씨앗’을 개화시켜 동료로 만들어라.]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25%]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39%]

‘세상을 구원하는 자’까지?

하미준 헌터가 S급이라서 그런가, 그를 내 동료로 만든 것만으로 세상의 구원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상태창이 바쁘게 떠오르는 동안 하미준 헌터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을 덧붙였다.

“신지의 헌터의 말을 믿을 거고, 신지의 헌터를 대신해서 몸도 날려 볼게.”

“아니, 그렇게까진…….”

“신지의 헌터만큼 무모하게는 못하겠지. 그래도 신지의 헌터가 내게 등을 믿고 맡길 만큼은 행동할게.”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과 함께 하미준 헌터는 완전히 내게 감화되었다. 그는 후련하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고 술잔 대신 나를 향해 찻잔을 들었다.

“건배 한번 해주겠어?”

“당연하죠.”

팅.

찻잔을 마주치자 꽤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이번 시간선은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 새로운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 * *

덜컹.

“하아아아…….”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보일러를 켜지 않아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타고 전해졌지만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벌써 한 사람 포섭했네.’

‘동료가 됐다고 말해 주라…….’

자아의 표현을 지적하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미준 헌터를 제일 먼저 개화시킬 줄이야.’

그나마 나랑 친분이 있는 세빈이나, 아니면 과거에 어느 정도 친했던 최민 헌터한테 먼저 씨앗을 심을 예정이었는데 난데없이 하미준 헌터가 엮여 왔다.

누가 됐든 개화를 하기만 하면 되니까, 뭐 상관없겠지.

‘이다음은 어떻게 할 거야? 최민한테 씨앗 심기?’

‘아니. 일단 이 시기에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어.’

‘행사?’

우우웅.

헌터넷용 핸드폰이 진동했다. 인벤토리에서 핸드폰을 꺼내 열자 헌터넷의 알림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제목 : 시카고 던전 컨퍼런스 초대의 건]

‘여기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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