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56화 (56/366)
  • 56화

    【개과천선】

    [퇴원 수속은 다 끝냈습니다. 리무진이 필요하시면 즉시 보내드리겠습니다. :) ―복지국 한기호]

    협회 직원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한 후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일주일간의 병원 신세가 오늘에서야 끝이 났다.

    한진우 헌터의 치유 스킬 덕분에 고비는 넘겼지만 치료 경과를 봐야 한다기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원했다. 1인실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따분할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고, 모두 정상 수치로 돌아왔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우으으……!”

    찌뿌둥한 몸을 쭉 늘린 후 원래 옷으로 갈아입었다. 세탁도 하고 방어 스킬도 새로 입힌 덕에 촉감이 전보다 더 부드러워졌고 가벼웠다. 나중에 시간 되면 S급 방어구를 새로…….

    ‘야, 얘기 좀 하자?’

    “아.”

    환자복을 개서 침대 위에 올려놓을 때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자아가 퇴원일이 돼서야 입을 열었다. 첫마디는 제법 쌀쌀맞았지만… 뭐, 이해는 간다.

    자아는 여전히 못마땅한지 한참 동안이나 말을 고르는 듯 침묵하다 얼마 안 있어 약한 진동과 함께 말을 걸었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전부 솔직하게 대답해, 알았어?’

    ‘네~ 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네.

    난 정리를 끝낸 병실 침대에 걸터앉으며 자아의 질문을 기다렸다.

    ‘이번 회귀가 첫 번째가 아니야?’

    ‘응.’

    ‘몇 번 했어?’

    ‘기억나는 것만 서른여섯 번.’

    ‘진짜 미치겠네…….’

    푸쉬이―

    자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내 옆에 앉았고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 보니 자아도 매번 이런 모양은 아니었지…….’

    처음 각성했던 시간선에선 확성기 형태가 맞긴 했지만 그 이후부턴 매번 모양을 바꿨다. 장검, 단검, 망치… 이것저것 써봤지만 역시 확성기가 제일 손에 익어서 한 스무 번 회귀했을 때쯤부터는 확성기로 돌아왔다.

    ‘사명 다시 보여 주라.’

    ‘알았어.’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자아가 입을 열었고, 난 상태창을 켜 사명을 확인했다.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달성도 : 29%]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달성도 : 62%]

    [살신성인]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지켜라.]

    [*살신성인의 사명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 대신 공격을 받았을 때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달성 완료]

    [사상 최강의 무기를 다루는 자]

    [무기를 길들여 능력을 해방하라.]

    [달성도 : 30%]

    [늑대의 동반자]

    [동반자를 성장시켜라.]

    [달성도 : 60%]

    [사령탑]

    [‘말의 씨앗’을 개화시켜 동료로 만들어라.]

    [달성도 : 5%]

    그새 많이도 채웠다. ‘살신성인’은 아예 달성 완료고.

    ‘음?’

    그때 사명 끝자락에 무언가가 반짝이는 걸 발견했다.

    <업적>

    [생명의 은인]

    [본인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업적]

    [업적 효과 : 누군가를 대신하여 물리적 공격, 또는 상태 이상에 걸릴 때 절대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업적이라는 상태창 자체를 처음 보긴 하지만 대충 어떤 건진 알겠다. 연계 패시브 스킬이랑 어느 정도 비슷한 거겠지.

    업적 ‘생명의 은인’은 사명 살신성인보다 발전된 형태였다.

    다른 사람 대신 걸리는 상태 이상에도 사망하지 않는다니……. 여러모로 쓸 만하겠네.

    ‘달성도 62%…….’

    내가 업적을 보는 동안 자아는 사명을 집요하게 읽고 있었고, ‘카르마를 밟는 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카르마를 밟는 자는 내가 기억을 되찾을 때마다 달성도가 쌓이는 사명이다. 분명 지난 시간선 전부를 기억하고 있는데 카르마를 밟는 자의 달성도는 전부 채워지지 않았다는 건…….

    ‘네 회귀가 서른 몇 번으로 끝난 게 아닌 것 같지?’

    ‘…응.’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이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럼 다음 질문. 이전에도 창조자의 사도였던 적이 있어?’

    ‘응. 가장 첫 번째 시간선이랑… 그 이후에도 몇 번.’

    맨 처음의 시간선에서 각성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창조자가 내게 다가왔다.

    “소원을 들어줄 테니까아 내 사도가 되어 주라아~ 세상이 망할 거야아~”

    그 기분 나쁜 말투가 아직도 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무슨 소원을 빌었더라.

    죽은 사람의 부활은 안 된다길래 지유를 다시 살리는 덴 실패했지만, 어쨌든 지유와 관련된 소원을 빌긴 빌었다.

    그렇게 바보같이 창조자의 사도가 되어 녀석의 파편을 소중히 지켜주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마자 파편들은 지옥도가 되었고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너 괜찮아?’

    ‘아, 어, 응.’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시금 떠오른 끔찍한 풍경을 고개를 세차게 털며 애써 잊었다.

    ‘첫 번째는 실수라고 치고, 그다음엔 또 왜 한 거야?’

    ‘전략이었어. 파편을 얻자마자 바로 부쉈는데 파편 안에 있던 게이트 때문에 또 죽을 뻔했지, 뭐.’

    ‘쯧.’

    자아가 혀를 찼다. 창조자의 파편은 사도와 창조자 사이의, 일종의 계약서다. 파편을 파괴함으로써 창조자와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을 경우엔 그 파편으로 만들어진 던전에 떨어지게 된다.

    ‘그 던전에 혼자 떨어지게 돼서 10분도 못 버티고 목숨이 날아가서 바로 회귀했지.’

    짝.

    ‘그건 그렇다 치고.’

    자아가 박수를 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기억이 왜 사라진 거지?’

    지금 자아와 내가 마주한 가장 큰 의문이었다.

    회귀 페널티로 나와 자아의 기억이 날아간 건 이번이 처음이고, 명백하게 내 기억을 삭제하려는 녀석이 존재하고 있다.

    ‘사실 기억 지우는 놈도 수상하지만 너한테 자꾸 돌발 지령 주는 놈도 수상해.’

    자아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새하얀 인영이 일렁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갑자기 날아오는 돌발 지령은 명백하게 내 성장을 도와주고 있었고, 사명은 내가 가야 할 길을 잡아주고 있었다.

    ‘창조자와 조율자 외에 다른 절대자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어.’

    “하아아아…….”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리에 들어와서 뒤통수가 지끈거렸다.

    끼익.

    아예 침대 위로 몸을 뉘어버리자 침대가 가볍게 울었다. 자아도 나랑 똑같이 침대에 눕더니 천장을 본 채 다시 말을 걸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잠깐 눈을 감았고 지난 시간선들을 천천히 회상했다. 지옥도를 본 횟수, 해결하기 위해 반복했던 수많은 시도들……. 결국 종말을 막는 건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얻어 낸 중요한 정보들이 있다.

    끼이익.

    다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달라진 건 없어. 사도들이랑 배신자 찾아서 창조자의 파편을 부술 거야.’

    ‘그럼 지옥도가 안 열려?’

    ‘아니, 지옥도는 무조건 열리게 되어있어. 그래도 파괴력이 반 토막 나니까.’

    ‘사도들이 누군지는 기억하고?’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서로의 존재는 인식하고 있다. 난 자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동시에 말할래?’

    ‘오케이, 좋아.’

    자아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인 후 하나씩 접어갔다.

    ‘쿠마리, 가면, 탕자, 너, 영능.’

    ‘영능, 가면, 쿠마리, 탕자, 그리고 나.’

    순서는 다르게 이야기했지만 자아가 알고 있는 사도도 내가 기억하는 것과 일치했다.

    ‘내가 사도가 아니었던 시간선에서 나 대신 사도가 된 인간은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아예 뽑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바로 이전 시간선에서도 쟤네들 정체는 못 밝힌 거지?’

    ‘응. 이명(異名)이랑 살고 있는 곳 아는 게 전부야.’

    자아는 한숨을 쉬며 말을 덧붙였다. 창조자는 자신의 사도들에게 이명을 붙여 주었다. 처음엔 쓸데없이 왜 그런 짓을 하나 했지만 몇 번의 회귀 끝에 이유를 알아냈다.

    ‘사도들끼리 접촉할 수 없게 하려고.’

    창조자는 사도들끼리 만나는 걸 극도로 꺼렸다. 어쩔 수 없이 만남이 필요한 상황이면 본인의 개입하에 만나게 했다. 덕분에 서로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살고 있는 곳과 목소리가 전부였다.

    아마 사도들끼리 모였다가 뭔 일을 꾸밀까 봐 두려웠던 거겠지.

    ‘이번엔 금방 찾을 수도 있어. 사명이 나한테 제법 좋은 눈을 줬거든.’

    ‘어떤 놈은 기억 지우고, 어떤 놈은 선물 주고 난리다, 난리.’

    자아의 말을 뒤로한 채 그대로 짐을 챙겨 병실을 나섰다. 다시 피어싱의 모습으로 돌아온 자아도 내 귀에 붙어 작게 웅웅거렸다. 난 복도를 쭉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내 계획은 간단해.’

    ‘얘기해 봐.’

    띵.

    자아가 대답하자마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1층을 누른 후 곧바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지금까지의 기억을 기반으로 배신자를 찾아내서 진짜 동료들을 만들 거야. 그리고 사도들을 만나 파편들을 파괴할 거고.’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알고 있어.’

    ‘그 정도는 뼈저리게 알고 있다고.’

    동료가 되고 싶어서 급하게 행동했다가 오히려 신뢰를 잃고 고독한 싸움을 했던 시간선이 몇 번 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도 이번엔 변수가 있잖아.’

    ‘변수?’

    난 상태창을 켜 내 스킬을 다시 살폈다.

    [연계 패시브 스킬]

    [‘말이 씨가 된다’ : 말로 상대방을 동요시켰을 때 상대방에게 강력한 암시를 담은 ‘말의 씨앗’을 심는다. 상대방이 시전자에게 ‘감화’되면 ‘말의 씨앗’이 개화하고 시전자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개화한 ‘말의 씨앗’만큼 고유 스킬의 파괴력이 증가한다.]

    ‘아, 그 이상한 스킬.’

    자아가 중얼거렸다. 자아도 나도 초면인 연계 패시브 스킬, ‘말이 씨가 된다’.

    자아의 발언력과 이 스킬이 합쳐지면 사람들은 내 말에 더 귀를 기울여줄 것이다. 그렇게 한 명씩 씨앗을 심고 개화시키면 지옥도에 충분히 맞설 수 있겠지.

    ‘지금까지는 몸 풀기였고, 고생길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1층입니다.

    안내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협회 직원이 이미 퇴원 수속을 밟아놓은 터라 그대로 로비를 지나 병원 밖으로 나서자 동시에 따뜻한 공기가 폐부에 스몄다.

    끼이익.

    “응?”

    그때 웬 외제차 한 대가 내 앞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협회 차는 아닌 것 같은데… 뭐지?

    지잉.

    조수석 쪽 창이 부드럽게 내려갔고 뜻밖의 인물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지의 양. 몸은 좀 어때?”

    “…하미준 헌터?”

    ‘이 인간이 여길 왜 왔지? 오늘 퇴원하는 걸 알고 있었나?’

    약간 벙찐 채로 운전석에 앉은 하미준 헌터를 빤히 쳐다보자 그가 씩 웃으며 선글라스를 고쳐 꼈다.

    “지의 양이랑 단둘이 오붓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말야.”

    “좀… 갑작스럽네요.”

    “어라, 로맨틱하지 않았어?”

    이건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네.

    모든 시간선에서 하미준 헌터와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인 태도로 나온 건 처음이다. 눈빛을 보니 단순히 꼬시려고 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 말 없이 차를 쳐다보고 있자 하미준 헌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면 억지로 데려가진 않을게. 하지만 지의 양과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위이잉.

    조수석 문이 위쪽으로 부드럽게 열렸다. 당장 날아다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하미준 헌터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맨 눈을 보였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혹시 중국 음식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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