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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55화 (55/366)
  • 55화

    [S급 이동계 스킬 ‘낮말을 듣는 새’]

    [스킬 설명 : 소리가 존재하는 공간을 밟을 수 있다. 밝은 공간일수록 이동 속도가 증가한다.]

    날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건 아니었다. 내 발은 허공을 단단히 딛고 있었고 계단을 오르듯 위로, 더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웅, 우웅.

    발을 뗄 때마다 호수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처럼 원형의 파동이 퍼져 나갔다.

    ‘자폭까지 얼마 안 남았다.’

    부서질 것 같은 다리를 움직여 최민 헌터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고 있어서일까, 최민 헌터가 있는 곳까지 금방 올라갈 수 있었다.

    녀석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한 채 나를 바라보는 최민 헌터는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신지의 헌…….”

    “당장 그 새끼 놔요!!”

    와드득.

    최민 헌터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어깨를 자아로 내리쳤다. 관절 빠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이 보기 좋게 밑으로 꺼졌고, 그 틈을 타 녀석의 머리를 발로 찼다.

    평온하던 녀석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몸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푹.

    “큭……!”

    녀석에게 뻗었던 발을 거두기도 전에 녀석의 손톱이 장검처럼 길어졌고, 결국 몇 개가 내 다리와 옆구리를 깊게 베었다.

    <사명>

    [살신성인]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100%]

    [달성 완료]

    [업적 ‘생명의 은인’ 개방]

    “신지의 헌터!”

    “컥, 허억…….”

    고통으로 눈앞에서 빛이 번쩍거리고, 비릿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폐엔 조금의 숨조차 들어오지 않아 몇 번이고 정신이 끊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비겁한 생각과 함께 사람을 찾는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바스락.

    나를 꿰뚫었던 녀석의 손톱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내 몸이 기억하는 어떤 시간선, 최민 헌터의 목숨을 앗아갔던 그,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완전히 소멸했다.

    ‘다행이다.’

    안도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아찔했던 고통이 어느 순간 무뎌지기 시작하며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 차리세요!!”

    그때 최민 헌터가 큰 소리를 냈다. 눈동자만 굴려 바라보자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찌푸린 얼굴이 있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뭐라고, 왜 이렇게까지…….”

    최민 헌터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뭐라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목구멍을 꽉 막은 핏물 때문에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난 그저 이 끔찍한 데자뷔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를 향해 웃어 보일 뿐이었다.

    키이이잉.

    [■■째 ■억을 계승■니다.]

    [■■째 ■■■의 ■■, ■의 ■이 해당 ■억을 삭■합니■.]

    [3■째 기억을 계승■니다.]

    [■■째 ■■■의 ■■, ■의 ■이 해당 기억을 삭제합니다.]

    갑자기 눈앞에 새하얀 글자가 떠올랐다. 기억을 계승하려는 자와 삭제하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과거의 기억을 찾을 때마다 나를 맹렬하게 방해하는 녀석이 있는 것 같던데, 이번에도 제법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커헉!”

    막힌 숨을 토해 내자 비릿한 액체가 한바탕 쏟아졌다.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내 정신은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37번째 기억을 계승합니다.]

    [해당 기억으로 ■■■의 정신을 전송합니다.]

    이긴 건 기억을 계승하려는 쪽이었다.

    “신지의 헌터, 신지의 헌터!”

    ‘죽었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애타게 나를 부르는 최민 헌터를 뒤로한 채, 난 과거의 시간선으로 내 정신을 던졌다.

    * * *

    서른일곱 번째 시간선, 경포대 A급 던전.

    “젠장!”

    병원에 도착하자 최민 헌터는 이미 사람을 찾는 나그네를 끌어안고 공중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자폭이 폭발 형태가 아니라는 걸 말해 주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민 헌터! 당장 그 새끼 놔요!!”

    소리를 빽 질렀지만 그의 귀엔 들어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이번에도 최민 헌터는 녀석한테 또 사지가 찢겨 죽을 거야.

    철컥.

    최민 헌터를 향해 자아를 겨눴다. 녀석과 그를 떨어트려 놓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우우우우웅.

    방아쇠를 길게 당기자 병원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평소 같았으면 최민 헌터에겐 전혀 영향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난 최민 헌터까지 적으로 인식한 채 그를 공격했고, 덕분에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휘이이잉―

    최민 헌터가 결국 사람을 찾는 나그네와 함께 추락했고, 난 떨어지는 그의 몸을 받으려 부서질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타닥.

    발 없는 말로 도약해 최민 헌터의 몸을 잡았을 때.

    푹.

    “아.”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손톱이 이번엔 내 몸을 관통했다.

    쿵.

    녀석은 그 공격을 끝으로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졌고, 동시에 나도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로 쓰러졌다.

    내 바로 앞에 쓰러졌던 최민 헌터가 몸을 파들파들 떨며 겨우 일어서더니 나를 보자마자 새하얗게 질렸다.

    “신지의 헌터!!”

    처절한 비명이 고막을 찢는다. 붉게 물드는 시야 너머로 최민 헌터의 얼굴이 보인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이내 내 몸을 안아 든다. 먼지가 된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난 그제야 안도감을 느끼며 온몸에서 힘을 푼다.

    철컥, 철컥.

    병원을 보호하던 몬스터 방어용 철창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안에 있던 의료진이 나올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최민 헌터가 죽었던 바로 지난 시간선, 그리고 그전 시간선도 저 병원에서 의료진이 나왔던 적은 없었다.

    “곧, 곧 의사들이 올 겁니다. 한진우 헌터도 합류할 거고요. 그러니까…….”

    “됐어요…….”

    나를 안은 최민 헌터의 팔이 덜덜 떨렸다.

    “왜 자꾸 무모한 짓을 합니까!”

    화를 내는 모습은 또 처음 보네.

    최민 헌터는 이를 문 채 몸을 내 쪽으로 천천히 숙였다. 이내 눈물이 내 얼굴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제가 뭐라고, 왜 이렇게까지…….”

    “하하…….”

    바보 같은 소리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내게 있어 최민 헌터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그는 회귀 이후의 모든 시간선에서 나를 구한 사람이다. 각성하자마자 정체불명의 던전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생명의 불씨를 켜주러 온 사람이다.

    회귀 후에 얻은 내 모든 삶은, 이 사람에게 빚을 지면서 시작한다.

    “이제 저한테 의지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왜 자꾸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 하시는 겁니까!”

    “…….”

    “도대체… 당신한테 저는 뭡니까?”

    ‘내게 있어 최민 헌터의 존재?’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피를 뱉어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이제 저는… 제가 누굴 믿어야 할지도 잘 모르겠거든요.”

    “…….”

    “하지만 최민 헌터는…….”

    이제 시야도 점점 어둠에 물들기 시작한다. 최민 헌터의 얼굴이 스케치북 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부옇게 흐려지고, 귀도 서서히 먹먹해진다.

    “당신만큼은 변하지 않는 제 편이었어요.”

    눈앞이 암전되기 전, 결국 최민 헌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

    [세상이 당신을 원한다.]

    [세상이 당신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삼는다.]

    다시 기회를 얻을 시간이다.

    [구원자의 권능]

    [말의 힘]

    [세상의 종말을 맞이한 구원자에게 주어진 일생일대의 순간]

    [구원자의 말은 현실이 됩니다.]

    ‘시간을 한 번 더 돌려 줘.’

    [‘말의 힘’ 발동 시 구원자의 인과율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말의 힘’ 발동]

    [범위 : 이 세상의 모든 시간선]

    [시간선 되감기]

    [구원자의 능력을 삭제]

    [구원자의 인과율 증가]

    [구원자 인과율 37% 달성]

    [생태계 변화]

    [시간선 초기화]

    .

    .

    .

    [구원자의 죽음을 목격한 자의 인과율 증가]

    * * *

    현재.

    “커헉!”

    “신지의 헌터!”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잔뜩 쪼그라들었던 심장이 다시 원래의 크기를 되찾고 온몸으로 산소를 받아들이려 힘겹게 움직인다. 불안정한 호흡이 서서히 일정한 속도를 찾아갈 때쯤, 완전히 정신이 들었다.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29%]

    [카르마를 밟는 자]

    [업이 청산되었습니다.]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62%]

    [달성도 보상 : ‘회귀자의 오른쪽 눈동자’ 획득]

    “허어, 허… 하하하…….”

    ‘망할, 진짜 망할.’

    기억났다. 처음 각성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 전부가.

    S급 헌터로 각성했고 창조자의 사도가 돼서 세상이 망했다. 그렇게 죽나 싶었는데 난데없이 구원자가 됐고, 결국 ‘말의 힘’이라는 기묘한 권능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그 짓을 반복하기를 수십 번, 세상의 종말을 막는 건 번번이 실패했고 그 반증으로서 지금의 내가 있다.

    “저, 정신이 좀 드세요? 저 누군지 알겠어요?”

    그때 한진우 헌터가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잔뜩 울상이 된 채로 나를 내려다보았고, 내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길 기다리는 듯 양손까지 얌전히 모으고 있었다.

    이 사람도 참 한결같이 선하고 다정하구나.

    난 입꼬리를 씩 올려 보이며 힘겹게 입을 뗐다.

    “네……. 고마워요, 한진우 헌터.”

    “하아아아. 다행이다. 곧 의료진들이 나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오.”

    한진우 헌터가 가슴을 쓸어내린 후 내 다리와 배에 ‘약손’을 하나 더 얹어주었다. 상처 위에 묽은 소독약을 얹은 것처럼 알싸한 상쾌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한진우 헌터가 여기 있다는 건…….

    “세빈이…는 괜찮아요?”

    “응. 괜찮아.”

    “아.”

    ‘어쩐지 아늑하더라니.’

    정수리 쪽에서 세빈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내 몸이 누구에게 안겨 있는 건지 알아차렸다.

    “세빈아…….”

    “쉿.”

    이름을 부르자 세빈이가 내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며 여린 숨을 내쉬었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세빈이의 갈색 머리카락에 은근한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배에 난 상처 때문에 눈앞이 아찔했었는데 다행히 치료가 잘 끝났나 보네.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뜨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셔츠를 펄럭거리며 땀을 식히는 하미준 헌터부터 뒤늦게 합류한 것처럼 보이는 외부 팀 헌터들, 그리고 인파들 사이에서 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최민 헌터.’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있고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지만, 최민 헌터만큼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회귀를 몇 번이나 반복해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존재들이 있다. 첫 번째 회귀부터 지금까지, 그는 모든 시간선에서 나를 구하러 왔다. 그에게 느꼈던 꺼림칙함과 두려움이, 사실은 익숙함에서 온 기시감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지직.

    그때 눈앞에 노이즈가 낀 것처럼 주위가 크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사명 보상으로 뭔가 받았는데…….’

    왼쪽 눈만 살며시 감자 내 시야에 있는 모든 것들의 주위에 황금색 글자가 떠다녔다. 우습게도 글자는 내가 직접 쓴 것 같은 생김새였다.

    [최민 헌터]

    [가장 믿음직한 동료]

    [‘방공호’ 스킬 보유자]

    [조율자의 사도]

    [나랑 닮았어]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생명의 은인]

    [지옥도에서 세 번, 게이트 폭발로 한 번 사망]

    [이 사람이 살아있어야 지옥도 앞까지는 갈 수 있어]

    글자들을 천천히 읽어 내리니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동안의 내 기억이다.’

    수십 번의 회귀를 반복하고 나서야 얻을 수 있던 정보들이 내 오른쪽 눈에 담겨 있었다. 왼쪽 눈을 다시 뜨자 글자는 사라졌다.

    치지직.

    ‘회귀가… 이번 한 번이 아니라고?’

    아, 자아를 까먹고 있었네.

    자아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아니…….’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럼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건 도대체 뭐지?’

    ‘이따 설명해 준다니까.’

    일단 지금은…….

    “너무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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