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히든 몬스터 사람을 찾는 나그네]
[불 속성]
[특이 사항 :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한다.]
[목적지에 도달하여 ■■할 때까지 절대 무적 상태를 유지한다.]
누군가 억지로 편집해서 끼워 넣은 것 같은 모습이다. 글자의 크기는 제각각이었고 이따금씩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흐려지기도 했다.
녀석은 매우 천천히, 그리고 일정한 보폭으로 우리를 향해 조용히 걸어오고 있었다.
“먼저 공격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군.”
김민숙 헌터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사람을 찾는 나그네’는 온화한 얼굴을 한 채 그저 천천히 걸을 뿐이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뭘 한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설마…….”
한진우 헌터가 내 말에 대꾸를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흘끔 보자 큰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자폭… 아닐까요?”
“흔한 공격 패턴이긴 하네요.”
세빈이가 말을 덧붙이며 ‘영’을 빼 들었다. 날카롭고 두꺼운 눈매가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근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폭을 한다면 내부 팀 앞에서 터졌어야 하는 거 아녜요?”
“아, 그렇네요. 그럼 자폭이 아닌가…….”
우리가 녀석을 향해 한마디씩 얹는 동안 사람을 찾는 나그네는 제법 우리와 거리를 좁혔다.
자폭이라면 내부 팀에서 터졌어야 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 녀석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찾아야 한다.
뭐라도 기억나면 좋겠는데…….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49%]
[*달성도를 더 올리려면 업을 청산해야 합니다.]
‘젠장할.’
이젠 더 기억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이구나.
적게나마 상승은 했지만 위험했던 감각만 떠오를 뿐이었다.
저벅, 저벅.
사람을 찾는 나그네는 우리를 지나쳐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잠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질 정도로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게이트 밖엔 내부 팀보다 사람이 많은 외부 팀이 있다. 만약 그 외부 팀마저도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목적지가 아니라면…….
“병원으로 가야 돼요!”
쾅!
내 말에 갑자기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높이 도약하더니 사방으로 불을 뿌렸다.
“큿!”
철컥.
피부 위를 덮치는 거센 열기를 이겨내고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다.
투웅.
“시, 신지의 헌터 공격도 튕겨 냈어요!”
젠장, S급 보스 몬스터인 ‘하치’의 무적 스킬도 파훼했는데 이 몬스터한테는 통하지 않는다니.
콰드드득.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내 공격을 튕겨내자마자 검은 손과 굵은 나무줄기가 녀석을 옭아맸고 그대로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몸이 바닥에 벅벅 쓸렸고 녀석은 게이트 쪽으로 기어가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을 쳤다.
“병원으로 가야 한다니, 무슨 소리야?”
“녀석은 게이트 밖으로 나갈 생각이에요! 내부 팀보다 사람이 많은 곳이면, 외부 팀 아니면 사람들이 대피한 병원인데…….”
찌직.
아오, 말할 틈도 안 주네!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손톱이 길게 자라나더니 나무줄기들을 전부 뜯어냈고, 녀석이 하늘을 향해 다시 날아올랐다.
쾅!!
공중에서 대기하고 있던 최민 헌터가 녀석의 목을 잡아 다시 바닥에 처박았지만, 공격 자체가 통하지 않아 오히려 피를 본 쪽은 최민 헌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무표정을 유지하며 녀석을 불로 휘감았다.
탕, 탕, 탕.
녀석의 몸이 고정된 틈을 타 방아쇠를 다시 한번 당겼다. 새하얀 탄환이 녀석의 몸에 박히긴 했지만 금세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쟤가 병원 쪽으로 갈 거라는 거야?”
“응.”
그때 세빈이가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난 사람을 찾는 나그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만 열었다.
“자폭이 아니길 바라야 하는데, 만약 자폭이면 좀 골치 아파지…….”
치지지직.
[히든 몬스터 사람을 찾는 나그네]
[불 속성]
[특이 사항 :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자폭한다.]
[목적지에 도달하여 자폭할 때까지 절대 무적 상태를 유지한다.]
‘망할.’
녀석의 상태창이 바뀌었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투쾅!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다시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녀석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고는 게이트 쪽으로 총알처럼 날아갔다.
콰과광!
때마침 녀석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검은 손이 녀석의 몸을 꽁꽁 옭아맸고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갈아버렸다.
서걱―
그림자의 주인인 세빈이가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목을 가로로 벤 후 녀석의 몸 위에 섰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빨리 병원으로 가죠. 외부 팀 중 방어계 스킬이 있는 사람들도 얼른 그쪽으로 보내…….”
퍼버버벙!!
“세빈아!!”
“강세빈 헌터!”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만큼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시뻘건 불기둥이 세빈이를 집어삼킨 채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불기둥의 한가운데엔 갓을 쓴 인영만이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세빈아!! 강세빈!!”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비명이든 뭐든 좋으니까 살아있다는 것만 보여줘, 제발!
펄럭.
그때 내 옆으로 연갈색 코트 자락이 흩날렸다.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입을 틀어막은 채 주저앉아 있는 세빈이가 눈에 들어왔다.
“방심했네.”
표정과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괜찮냐는 질문조차 할 수 없었다.
“꺄아악! 가, 강세빈 헌터! 조금만 참으세요!”
세빈이의 복부가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쓰러질 뻔한 세빈이의 몸을 그림자 손들이 단단히 지탱하고 그 틈에 ‘약손’이 상처를 꼼꼼히 감쌌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풀냄새가 애써 피 냄새를 지우는 동안, 세빈이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분노인지 뭔지 모를 감정이 몸을 차게 만들었고 속을 뒤집어놓았다.
설마, 설마 여기서 세빈이가? 이렇게 허무하게?
텁.
“목숨에 지장 없습니다.”
큰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따뜻한 기운이 끊어질 뻔한 이성을 붙이고 나를 진정시켰다. 뒤로 물러나자 손의 주인, 최민 헌터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겨우 고르며 다시 세빈이를 바라보았다.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의식도 붙어있고, 한진우 헌터의 스킬로 상처가 서서히 봉합되고 있었다.
다시 최민 헌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이미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발을 묶어 놓으려 튀어나간 지 오래였다.
“…한진우 헌터, 부탁할게요.”
“걱정 마세요! 금방 치료될 거예요!”
떨어지지 않는 걸음과 세빈이에게 꽂힌 시선을 겨우 떼고 사람을 찾는 나그네를 향해 달렸다.
콰과과광!!
“큿!”
나무줄기를 전부 뿌리친 사람을 찾는 나그네가 결국 먼저 게이트를 열었다. 놈은 자신의 주변으로 아무도 못 오게 하려는 듯 더욱 맹렬히 불꽃을 뿜어 댔고, 그 열기가 기도로 들어와 순식간에 숨을 막았다.
근접 전투라면 절대 밀리지 않는 세빈이에게 중상을 입힌 자식이다. 만만하게 생각해선 안 되었다.
탕!!
녀석의 머리를 맞히자 불이 잠깐 사그라들었고, 그 틈에 하미준 헌터가 녀석의 몸을 던전 안쪽으로 멀리 던졌다. 녀석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병원에 도착하기 위함이었다.
“먼저 가! 내가 최대한 시간 벌어 볼 테니까!”
“알겠어요!”
콰과광!!
굵직한 나무줄기가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몸을 다시 한번 묶었다. 온몸이 기괴하게 비틀린 녀석을 뒤로한 채 난 곧바로 게이트 밖으로 뛰어나왔다. 경계 태세를 갖추던 외부 팀 헌터가 나를 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해, 해치우신 겁니…….”
“지금 당장 방어계 스킬이 있는 헌터들은 전부 병원으로 보내주세요! 몬스터가 그쪽으로 갈 겁니다!”
쾅!!
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을 찾는 나그네도 곧바로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녀석은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둥실 날아 병원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젠장, 이렇게 금방 나올 줄은 몰랐는데.’
“어, 어어?!”
투두두두두.
당황한 외부 팀 헌터들이 녀석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지만 당연히 작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덕분에 헌터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그럴 시간에 병원으로 가라고, 좀!’
‘발 없는 말’로 가속하고 작살총으로 바꾼 자아를 땅에 꽂아가며 녀석을 따라잡았다. 목이 칼칼해지고 기침이 자꾸 터져 나왔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후우웅.
최민 헌터는 하늘을 가로지르며 병원으로 날아갔고 전방에서 사람을 찾는 나그네의 경로를 계속해서 파악했다.
휘요오오오―
두심이도 빠르게 저공비행을 하며 녀석의 발을 걸었다. 덕분에 녀석의 얼굴이 아스팔트 바닥에 몇 번이고 갈렸다. 좁혀지지 않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마침내 내가 녀석을 따라잡았다.
‘이 속도면 이 자식보다 더 먼저 병원에 도착할 수 있겠어!’
쿠당탕.
“우윽!”
하지만 내 몸도 슬슬 한계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다 못해 내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다시 일어나 다리에 힘을 주었고 낮은 주택 너머로 보이는 새하얀 병원을 향해 달렸다. 병원에서도 바깥의 상황을 알아챘는지 꽤 단단해 보이는 철판이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더!’
병원 철창을 뛰어넘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자마자 공중에 떠있는 시뻘건 불길이 보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안엔 최민 헌터가 있었다.
“최민 헌터! 녀석이 오면 최대한 지면에서 멀리 떨어뜨려 주세요! 이 포인트에 오면 몇 초 이내로 자폭할 거예요!”
“제가 데리고 날아가겠습니다.”
S급 미만 화염 스킬에 면역이 있으면서 비행이 가능한 S급 헌터, 최민 헌터가 이 상황을 가장 빠르고 쉽게 종료시킬 수 있을 것이다.
‘됐다, 이제 해결됐어.’
콰광!
마침 사람을 찾는 나그네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헤벌쭉 웃으며 병원 로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쿵!
최민 헌터가 운석처럼 내리꽂히더니 녀석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공중으로 날아갔다. 녀석의 몸은 정말로 곧 폭발할 것처럼 점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이제 진짜로 끝…….”
쿵, 쿵, 쿵.
‘…어?’
머릿속에서 비상등이 켜졌다.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속이 울렁거린다.
불길한 예감, 아니 정확히는 이미 겪어 본 적 있는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야금야금 나를 집어삼켰고, 결국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게 만들었다.
“제가 데리고 올라가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최민 헌터!”
덤덤한 말과 함께 그는 하늘로 날아올랐었다. 그걸로 모든 상황이 종료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을 찾는 나그네를 끌어안고 병원의 옥상쯤 올라갔을 때, 녀석은 예상대로 자폭했다.
그리고 시커먼 연기 속에서 내 발 앞으로 떨어졌던 건…….
녀석의 손톱에 온몸이 찢긴 최민 헌터의 시체였다.
쾅!!
“최민 헌터!! 당장 그 새끼한테서 떨어지세요!!”
막아야 해. 무조건 막아야 해.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최민 헌터를 구하기 위해 발 없는 말로 도약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최민 헌터를 향해 손을 뻗어도, 자아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또 당신을 잃을 순 없다고!!”
[스킬 개방]
[S급 이동계 스킬 ‘낮말을 듣는 새’]
[스킬 설명 : 소리가 존재하는 공간을 밟을 수 있다. 밝은 공간일수록 이동 속도가 증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