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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급 비명헌터-52화 (52/366)

52화

“제, 제가 한번 볼게요!”

진우가 미준과 미숙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약손’을 시전했다. 향기로운 풀꽃 냄새와 함께 새파란 나뭇잎이 지의를 맴도는 동안, 진우가 지의의 손목을 가만히 짚었다.

“이, 일단 목숨은 붙어 있어요. 다친 곳도 없고 호흡이랑 맥박도 전부 정상이에요.”

“정신계에 당했나? 지금 모습 감춘 놈들 있잖아.”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제 스킬은 외상 치유 특화라…….”

진우가 시선을 아래로 깔며 울상을 지었다.

쿵, 쿵, 쿵.

세빈은 그 모든 소란의 한 발짝 뒤에 서있었다.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하는데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는데 몸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그 꿈이랑… 닮았어.’

지의가 각성하기 일주일 전쯤 세빈은 기묘한 꿈을 꾸었다. 꿈의 주연은 자신과 지의였다. 지의는 세빈의 무기인 ‘영(影)’에 찔린 채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있었고, 세빈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지의의 피를 한바탕 뒤집어쓴 감각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꿈에서 깨자마자 속을 전부 게워냈다.

그리고 지금, 그 꿈과 비슷한 풍경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터벅.

떨어지지 않는 발을 겨우 떼서 더욱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그림자가 발바닥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강세빈 헌터.”

미준이 세빈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지의 옆에 앉아 그대로 지의를 안아 들었다. 고개를 숙여 지의의 숨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살아있는 걸 확인했음에도 세빈은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이쪽도 큰일이네.’

미준은 세빈을 바라보며 볼 안쪽을 씹었다. 그가 알고 있는 강세빈이라는 인간은 모든 일에 동요하는 편이 없었다. 그는 욕심이나 야망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검은 눈동자는 항상 권태에 젖어 있었다.

그런 세빈을 유일하게 사람답게 만드는 존재가 바로 지의였다.

지의 옆에서의 그는 잘 웃었고 어리광도 부렸으며, 누군가를 질투하기도 했다. 미준은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세빈이 그 나이대 여자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다시 괴물이 된 것 같지만.’

우주를 담은 세빈의 눈동자가 지의에게 멍하니 고정되었다. 세빈의 그림자는 크게 휘청거렸고 당장이라도 뿜어져 나올 것처럼 위협적으로 일렁거렸다.

“강세빈 헌터, 진정해.”

“…….”

미준이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한마디 뱉었다. 되도 않는 위로보다 따끔한 한마디가 더 좋다는 걸 미준은 알고 있었다.

세빈이 미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얼굴 위에 내려앉은 검은 그림자 때문에 얼굴의 굴곡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쿵.

“윽…….”

이질적인 위압감. 그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헌터들이 그에게 압도당해 순간 몸이 굳었다. 다행히 감각은 금방 돌아왔고 미준은 한 손으로 머리를 털며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 성가신 스킬이 있어서…….’

쿠구궁.

아슬아슬한 정적을 찢고 경계에 갑자기 낡은 나무 표지판 하나가 솟아났다. 모두가 그 쪽으로 무기를 겨눴고, 가장 가까이 있던 최민 헌터가 허리를 살짝 숙여 그것을 살폈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입니다.]

[맑아야 하는데]

[맑아야… 하는데……?]

[안 맑네요?]

“코빼기도 안 비치던 놈이 이제야 나타나는군.”

민숙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입니다’는 멀뚱히 서서 표지판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맑아야 해요!]

[맑아야 한다니까요?!]

[날씨를 흐리게 만든 사람을 찾아서 벌을 줄 거예요?!]

“다들 전투 준비해요.”

무언가를 느낀 민숙이 두심이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고 금방 방어 태세를 취했다.

콰과광!!

그때 세빈이 서있던 곳에 번개가 떨어졌다. 세빈은 간발의 차로 몸을 피했지만 ‘검은 뱀의 허물’의 끝이 약간 그을렸다.

쾅! 쾅! 쾅!

오늘의 날씨는 맑음입니다의 공격이 이어졌다. 새하얀 스파크가 집요하게 세빈을 쫓았고 세빈은 모든 공격을 빠르게 피하며 녀석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 수십 개를 뽑아냈다.

팅!

손이 나무 표지판을 찢어 놓으려 했지만 어쩐 일인지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강세빈 헌터, 일단 지의 양부터 최민 헌터한테 넘겨!”

세빈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방공호’ 안에 지의를 두고 전투를 하자는 말이라는 건 단번에 이해했다.

‘내가 왜?’

하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품 안에 들어온 지의를 다른 사람의 손에 넘기는 게 싫었다. 지의의 옆에 있어온 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그의 옆에 있을 자격이 있는 건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전부…….’

쾅!!

“헉.”

날것의 감정이 흘러나오기 직전, 정신이 돌아왔다. 세빈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았고, 자신이 민의 방공호 안에 있음을 깨달았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일 텐데, 방금 전의 자신은 위험한 상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마치 전에 해봤던 것처럼.

“강세빈 헌터……?”

그때 진우와 미준이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다. 진우의 품에 안긴 녹두가 제 주인을 보자마자 낑낑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혹시 신지의 헌터 좀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계속 보고 있게요…….”

진우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세빈에게 부탁했다. 그가 자신을 해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본능적인 공포가 전신을 야금야금 씹어갔다.

“…네.”

세빈이 픽 웃은 후 자신의 그림자에서 손을 뽑아냈고 그 위에 지의를 잠시 올려두었다.

툭.

입고 있던 검은 뱀의 허물을 바닥에 깔자 그림자 손이 지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끼잉… 낑. 끼우―!

“괜찮아, 녹두야. 네 주인님은 곧 깨어나실 거야. 착하지~?”

진우가 녹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봤지만 녹두는 여전히 불안한 듯 지의의 주변만 빙글빙글 돌았다. 지의의 얼굴을 한 번 봤다가 고개를 들어 세빈을 보았고, 다시 지의의 얼굴을 보는 것을 쉴 새 없이 반복했다.

‘계속 옆에 있었어야 했는데.’

제 눈이 닿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보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누구도 아닌 강세빈 자신만이, 지의를 보호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빈은 자신의 오만을 저주했다.

“밖에 있던 몬스터는 방공호만 계속 공격하는 중이야.”

미준이 세빈의 옆으로 슥 다가왔다. 매캐한 경계의 공기를 집어삼킬 만큼의 시원한 민트향이 그의 코를 찔렀다.

“…그런가요.”

“오, 이제 대답해 주네.”

미준은 세빈을 흘끔 쳐다보았다.

‘여전히 죽상이구만.’

퍼억.

그는 꽤 힘을 실어 손바닥으로 세빈의 등짝을 때렸고, 세빈은 아픈 내색도 하지 않으며 지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미준은 잘 빚어낸 세빈의 옆얼굴에서 지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세빈 헌터에게 있어 지의 양이란 어떤 존재길래 그런 거지?’

소꿉친구라고 해도 그가 지의에게 보이는 반응은 평범하지 않았다. 집착이라 부르기엔 그 마음이 순수했고, 애정이라 부르기엔 병에 가까워 보였다.

미준은 저 기이한 감정에 정의를 내리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지의 양을 싸고도는 거야?”

“…….”

“다 큰 성인이잖아. 각성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SS급이고.”

세빈이 그제야 미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의는 희생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애예요.”

“…….”

“하미준 헌터도 보셨잖아요.”

두근.

세빈의 말에 미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불과 몇 분 전에도 지의는 자신을 대신해서 공격을 맞았다.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고, 몸이 꿰뚫리는 순간에도 그의 눈에 후회는 깃들지 않았다.

“하미준 헌터! 괜찮아요?”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에는 자신을 걱정하러 왔다. 정작 다친 건 지의 본인이면서.

계산되지 않은 선(善), 그것 때문에 미준은 지의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예전부터 그랬다고 했지?”

“네. 어려운 사람을 본다면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죠.”

세빈이 천천히 눈을 내리깔자 그의 그림자가 또다시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게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더라도.”

세빈의 눈이 완전히 감기자 그의 머릿속에 장면 몇 개가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학교에 온 모습, 아픈 동생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애정을 못 받았지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습, 그럼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만큼은 다정했던 제 소꿉친구.

까득.

세빈이 이를 꽉 물었다. 지의의 올곧은 모습을 사랑하는 그였지만, 결국 그 곧은 모습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지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다 큰 성인이고, SS급 헌터라서 더 문제인 겁니다.”

세빈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리다 이내 제 눈을 가렸다.

“남들보다 더 큰 힘이 생긴 지금, 얼마나 더 큰 희생을 할 각오가 되어있을까요?”

미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세빈의 짐작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였다. 세빈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지의마저 자기를 안 돌보니까, 제가 보살펴야 해요.”

‘그게 지의가 원하는 게 아니더라도.’

세빈은 뒷말을 삼켰다. 손가락 틈새로 보이는 검은 눈에 오랜만에 빛이 깃들었다.

“어, 어?!”

그때 진우가 몸을 파드득 떨었다. 모두의 시선이 세빈에게서 진우로 옮겨가자,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편집 괴수 ‘시체 모빌’이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두가 조용해졌다. 눈앞에 뜬 상태창만을 멍하니 응시한 순간.

“커헉!”

지의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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