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50화 (50/366)

50화

탕!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시체들의 발목을 터트렸지만 녀석들은 제법 끈질기게 나를 쫓았다. 다리가 없으면 팔로, 팔도 날아가면 머리로. 대단한 의지였다.

탕, 탕, 탕.

사지를 완전히 다 파괴시킨 후에야 시체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쿵!

“윽!”

[혹시 노래가 없어서 안 추는 거야?]

[까칠한 파트너네.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리 틀어주면 되지?]

[체력 : 4,200/5,000]

바로 앞에 나타난 ‘괴조의 호수’는 자기 멋대로 내 마음을 해석해 버리곤 정말로 음악을 틀었다.

♬♩♪

‘백조의 호수’. 아무리 클래식에 조예가 없는 나여도 한 번쯤은 들어본 음악이었다.

탕, 탕, 탕.

[앙, 되, 투아!]

[체력 : 3,501/5,000]

올라간 방어력 때문에 탄환을 제대로 맞혀도 한 번에 끝내진 못했다.

휘요오오!!

두심이가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내 머리 위를 지나쳤고, 곧바로 괴조의 호수의 목을 쪼았다.

[방해돼! 뭐야, 이거!]

[체력 : 3,107/5,000]

괴조의 호수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 몬스터가 없는 쪽으로 다시 발을 돌렸다. 한참 달리다 보니 슬슬 체력에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쿵!

[날지못하는것도서러워죽겠는데오늘은이상한애까지만나버렸어기분최악이야너도저매랑같이사라져버려다시는눈에띄지마]

[체력 : 10,450/12,000]

“으윽!”

이번엔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다. 종이로 된 날개가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중심을 잃은 몸이 붕 뜬 채로 몇 미터를 날아갔다. 흙바닥에 쓸려서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여전히 바닥을 기어 다니는 시체들 때문에 곧바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콰드득.

‘이건……?’

그때 땅에서 튀어나온 나무줄기가 종이학의 몸을 옭아맸다.

[괴로워이대로쥐어짜려는셈이야도대체나한테왜그러는거야]

[체력 : 9,402/12,000]

“하~ 녀석, 되게 빠르네.”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날지 못하는 종이학의 뒤로 하미준 헌터가 유유히 나타났다. 멋 내느라 입은 셔츠가 이제 슬슬 불편한지 소매가 걷혀 있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이네~ 다행이야. 귀여운 얼굴에 상처 날까 얼마나 노심초사했다고.”

“…하미준 헌터도 멀쩡해 보이네요.”

그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무꾼’을 고쳐 쥐더니 이내 팔을 높게 들었다.

쩌억!!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체력 : 8,994/12,000]

하미준 헌터가 도끼로 몸을 찍어 내릴 때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녀석의 말이 눈앞을 떠다녔다.

후드득.

도끼날이 결국 날지 못하는 종이학의 다리까지 잘라냈다.

[날지도못하는데이젠다리까지이렇게되어버렸어이래선빨리달릴수도없잖아너도대체뭐야왜나한테이러는거야]

[체력 : 8,206/12,000]

종이학이 억울해 죽겠다는 듯 바닥에서 파닥거렸다.

콰그작.

그 처절한 몸짓에도 하미준 헌터는 녀석의 목에 나무꾼을 꽂아놓곤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뱀처럼 쭉 찢어진 눈매가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일단 지의 양은 계속 도망가~ 저 천칭에서 쏟아지는 시체, 생각보다 속도가 빠르거든.”

“알겠어요! 나중에 봅…….”

[아이제정말로짜증나네전부다찔러서죽여버리고싶어]

[셋, 둘.]

[체력 : 7,428/12,000]

“뭐……?”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 갑자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저런 행동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

본능적으로 녀석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콰직!

말이나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자아를 작살총으로 바꿔 녀석이 엎어진 지면에 작살을 박아 넣었다. 앞으로 도약하는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고, 덕분에 내 몸은 빠르게 녀석과 하미준 헌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퍽!

“윽, 지의 양?!”

하미준 헌터를 온 힘을 다해 밀치자 그가 뒤로 밀려났다. 답지 않게 당황한 그의 얼굴을 뒤로한 채 날지 못하는 종이학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실드부터!’

[하나.]

[체력 : 7,428/12,000]

쨍그랑!!

“커헉……!”

<사명>

[살신성인]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지켜라.]

[*살신성인의 사명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 대신 공격을 받았을 때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달성도 대폭 상승]

[달성도 : 89%]

실드 덕에 급소는 피했지만 녀석의 긴 부리가 내 옆구리를 꿰뚫곤 다시 빠져나갔다.

후드득.

기막힌 사명 덕에 죽을 일은 없었지만 고통만큼은 분명히 느껴졌다. 폐부엔 제대로 된 숨이 들어오지 않았고 눈앞은 자꾸 새하얗게 물들었다.

서걱.

‘어라…….’

그때 시커먼 빛무리가 날지 못하는 종이학을 반 토막 냈다. 녀석의 몸 틈에서 새하얀 액체가 꿀렁거리며 치솟았고 그 액체 기둥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강세빈…….’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너무아파너무아파너무아파구원자차라리네가죽여줘너무아파]

[체력 : 5,286/12,000]

비명과 처절함으로 가득한 상태창 너머 차갑고 새까만 눈동자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이란 빛은 전부 흡수해 버릴 것 같은, 총기 없는 눈동자.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지만 이상하게도 척추를 타고 소름이 쫙 끼쳤다.

‘…무섭다.’

세빈이에게서 느껴진 감정은 공포였다. 차가운 옆얼굴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웅.

세빈이의 눈동자가 나를 향하기 직전 누군가에 의해 몸이 들렸고 순식간에 지면으로부터 멀어졌다. 이런 비행이 가능한 건 아무래도 딱 한 사람뿐이다.

“최민 헌…….”

“꺄아악! 신지의 헌터. 자, 잠시만 참으세요! 정신 꽉 붙잡아요!”

한진우 헌터의 비명이 귀에 파고들었다.

바스락.

“윽!”

“죄송해요! 치료되는 과정이니까 조금만 더……!”

‘더럽게 아프네…….’

치료가 될수록 감각이 더욱 예민하게 돌아와 통증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숨 쉬세요.”

최민 헌터의 옷을 꽉 움켜쥐고 온몸으로 고통을 버텨냈다. 옆구리에서 흐르던 피가 멎고 새살이 돋아나자 한결 호흡이 편해졌고, 그제야 손에 힘이 풀렸다.

“괜찮으십니까?”

‘이 사람한테는 늘 다치는 꼴만 보여주는 것 같네.’

최민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상처 부위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라락.

상처를 덮었던 마지막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며 흩어졌고, 내 복부도 흉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나았다. 한진우 헌터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전투에 복귀할 수 있겠습니까?”

최민 헌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천칭 빼곤 체력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주의를 끌어주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후웅―

최민 헌터가 다시 위로 날아올랐고,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밑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세빈이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시체들을 박살 낸 후 날지 못하는 종이학의 목에 영을 박아 넣고 있었다.

[어째서이런괴물같은게나온거야난너랑싸우고싶지않아내가원하는건오직구원자뿐이라고]

[체력 : 1,642/12,000]

내가 치료받는 사이에 체력을 거의 다 깎아 놓았나 보네.

수십 개의 검은 손이 녀석의 목을 비틀어 쥐자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복수할 타이밍을 만들어 주는군.

탕!!

자아의 방아쇠를 당기자 소리 탄환이 녀석의 몸을 정확히 꿰뚫었다. 녀석이 내 배에 구멍을 만들었던 것처럼 녀석의 몸에도 커다란 상처가 생겼고, 이내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라졌다.

[체력 : 0/12,000]

[고마워이제나도이렇게자유로워지는구나]

[편집 괴수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고맙다고 하니까 오히려 더 짜증 나네.’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 완전히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쯤 지면에 다다랐다.

탁.

최민 헌터가 나를 바닥에 내려주곤 곧바로 괴조의 호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퍼버버벙!!

시뻘건 불길이 괴조의 호수를 삼켰고, 새어 나간 불꽃은 두심이의 바람으로 다시 한곳으로 모였다.

[나 무서워! 무섭다고!]

[체력 : 730/5,000]

탕!

새까맣게 익은 괴조의 호수가 연기 속에서 나오자마자 방아쇠를 당겼다. 새하얀 탄환이 녀석의 몸통을 맞히는 것과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달했다.

[체력 : 0/5,000]

[잠, 잠깐. 싫어! 구원자! 가기 전에 한 번 합이라도 맞추게……!]

머리에 달린 세 개의 부리가 서로 부딪치며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다가 바닥 위로 툭 떨어졌다.

[체력 : 0/5,000]

[저 파동에… 몸을 맡기고 싶었는데…….]

[편집 괴수 ‘괴조의 호수’가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건 저 ‘기울어진 천칭’뿐이군.

호흡을 고르며 다른 사람들을 살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하미준 헌터가 괜찮은지 확인을 못 했네.’

눈앞에서 자기 대신 누군가가 다치는 모습을 봤으니 충격받았을 수도 있을 텐데.

날지 못하는 종이학의 잔해 옆에 서있는 하미준 헌터를 향해 발을 돌렸다.

“하미준 헌터! 괜찮아요?”

“…….”

“하미준 헌터?”

뭐야, 이 사람.

하미준 헌터가 약간 넋이 나간 채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지의 양.”

“괜찮아요? 아까 놀랐죠.”

“…아.”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각성자 ‘하미준’이 동요한다.]

동요했다고? 도대체 뭐 때문에?

대답도 영 석연치 않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미준 헌터는 눈을 내리깔고 씁쓸하게 웃었고 한 손으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분한 얼굴이다. 능글맞은 웃음도, 뱀같이 야살스러운 눈웃음도 지금은 없었다.

“멀쩡해. 지의 양이 구해 줬잖아.”

“다행이네요.”

“지의야!”

그때 세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자 약간 흐트러진 모습의 세빈이가 내게 달려왔다. 그는 양 어깨를 잡은 채 내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치료 제대로 했지? 괜찮아?

“응. 멀쩡해.”

“우리끼리 해볼 테니까 지금이라도 방공호 안에 있는 게 어때?”

“유난은……. 괜찮아.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잖아.”

세빈이의 팔을 두드리자 슬픈 강아지 같은 얼굴이 물끄러미 나를 향했다.

‘아까 봤던 얼굴이랑은 완전 딴판이네.’

거의 인격을 갈아 끼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정한 얼굴이다. 아까 종이학을 썰어버릴 땐 소름이 돋을 정도였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건 덩치만 큰 강아지다.

[죄를 심판하겠다!]

[체력 : 7,192/10,000]

‘쳇, 얘기할 틈도 없네.’

쿵.

자아와의 대화를 끊어버리며 하늘에 떠 있던 천칭이 땅으로 추락했고, 지면 전체를 울릴 정도로 큰 진동과 함께 한쪽 저울판에 있던 시체 더미들을 밑으로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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