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48화 (48/366)
  • 48화

    지지지직.

    세빈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노이즈 소리가 귀에 꽂혔다. 세빈이를 타기팅한 몬스터는 아마 ‘비디오 타워’.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몬스터는 아니지만 처치 조건이 까다로웠던 걸로 기억한다.

    콰그작!

    허공에서 갑자기 연갈색 트렌치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동시에 텔레비전 화면 하나가 새카만 도신(刀身)에 의해 파괴되었고 잔해가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지의야?!”

    수십 미터는 족히 될 높이에서 세빈이가 뛰어내렸고 내 그림자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도와주러 왔어.”

    “고마…….”

    치지직.

    “…잠깐만.”

    수십 개의 텔레비전 중 화면 하나가 갑자기 켜졌고 그 안에서 세빈이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쾅!!

    세빈이가 손을 뻗자 시커먼 그림자 손들이 튀어나와 그대로 화면을 찢어버렸다.

    “켜진 화면을 공격해야 체력이 깎이더라고. 10초 안에 공격하지 못하면 체력이 회복되고.”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38%]

    ‘아, 맞아, 그런 몬스터였지.’

    세빈이는 비디오 타워 쪽으로 몸을 돌린 채 TV가 켜지기를 기다렸다. 나도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귀를 기울였다.

    치지지직!!

    ‘전부 켜졌잖아?!’

    스파크 튀는 소리와 함께 비디오 타워의 모든 화면이 일제히 켜졌다.

    ‘야, 최대한 빠른 탄환으로 뽑아 줘!’

    ‘오케이.’

    타타타타탕!!

    방아쇠를 당기자 자아가 수십 개의 탄환을 순식간에 뽑아냈고 공기를 진동시키며 화면에 한 발씩 정확히 맞혔다.

    1층의 화면을 전부 파괴했을 때쯤 세빈이는 눈 깜짝할 새에 비디오 타워의 맨 꼭대기에 올라섰고, 얼마 안 있어 다시 지면으로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광!!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세빈이가 ‘영(影)’으로 비디오 타워의 몸 전체를 반으로 갈랐다. 그와 동시에 비디오 타워의 그림자에서 뿜어져 나온 그림자 손이 수십 개의 화면을 그대로 짓이겼다.

    쿵, 쿵.

    지면에 처박히는 TV들을 뒤로한 채 세빈이가 자기 그림자 위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편집 괴수 ‘비디오 타워’가 각성자 ‘강세빈’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시체 모빌’이 소환 대기 중입니다.]

    ‘내 편이라 다행이다.’

    정말 우습게도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세빈이가 영을 다시 팔찌로 돌려놓은 후 반쯤 녹아내린 검은 태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직 하미준 헌터 쪽이 해결이 안 됐나 보네.”

    “아, 그러게.”

    ‘행운의 인형 뽑기’. 2페이즈 몬스터의 특징답게 소멸조건이 아주 까다롭나 보다. 어떤 몬스터였는진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일단 가보자.’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달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 * *

    쾅―!

    “아니, 놔봐. 진짜 부수면 될 것 같다니까?”

    “하미준 헌터, 참으세요~! 우아악!”

    “…응?”

    눈앞의 광경은 다른 의미로 처참했다. 매력 있는 얼굴에 훤칠한 체격, 세계 재벌 순위 9위, 패션 센스 우수, 말과 행동에서 넘쳐나는 여유…….

    그 모든 수식어를 갖고 있는 하미준 헌터가 허름한 인형 뽑기 앞에서 이성을 잃었다. 그의 손에는 예쁜 은색 도끼가 들려 있었고 잘 갈린 날붙이의 끝은 인형 뽑기를 향했다.

    “하미준 헌터어~!”

    한진우 헌터가 하미준 헌터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그의 행동을 막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피지컬 차이에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와, 이거 누가 봤으면 진짜 신문 1면급이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최민 헌터 옆으로 가자 그가 나를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인형을 뽑아야 소멸하는 몬스터라고 하더군요.”

    ‘역시나.’

    하미준 헌터는 인형 뽑기 뚜껑 위에 양손을 댄 채 그대로 몸을 기댔고, 난 그런 그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우리 지의 양 왔어~?”

    그가 나를 흘끔 보며 웃어 보였지만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서 모든 설득력을 잃었다.

    행운의 인형 뽑기는 길거리에 자주 보이는 평범한 인형 뽑기였다. 낡은 기계에선 어울리지 않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고, 유리로 된 창 너머로 아까까지 나왔던 경계 몬스터들의 헝겊 인형이 쌓여 있었다.

    “누구든지 뽑으면 그만 아니에요? 꼭 하미준 헌터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게 하다 보니까 오기가 생기더라고. 어떻게든 내가 뽑아야겠어.”

    조이스틱을 뽑아버릴 것처럼 움켜쥔 하미준 헌터를 보니 도저히 인형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일단 머리 좀 식히고 다른 사람들 시켜 봐요.”

    잔뜩 흥분한 하미준 헌터를 뒤로 치워 두고 기계 앞에 섰다.

    인형 뽑기……. 고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심지어 한창 하러 다녔을 때도 인형을 뽑아 본 적은 손에 꼽았다.

    “도전하는 거야?”

    “소멸 조건이니까 누구든 뽑아봐야지.”

    세빈이가 인형 뽑기에 살짝 기댄 채 사르르 웃었다.

    “고2 때로 돌아간 것 같네. 너가 그때 토끼 인형 뽑아서 나 줬잖아.”

    “아, 그랬어?”

    “누구한테 줬는지 기억도 못 해? 서운하네.”

    세빈이가 입을 비죽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인형이 갖고 싶기보단 뽑았다는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뽑는 족족 친구한테 선물로 줬던 것만 기억난다.

    세빈이한테도 하나쯤 줬겠거니 했는데, 진짜 줬구나.

    “…이거라도 뽑아서 줄까?”

    “으음… 갖고 싶은 비주얼은 아니네.”

    인형 뽑기 안에 있는 인형들은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주받을 것처럼 생겼다. 아까 내가 잡은 요정왕 티타니아의 구두 인형도 있었다. 저건 비디오 타워고 뒤에 있는 건 힘찬 연어 어쩌구. 토끼 머리가 칼날에 붙어있는 단두대 인형까지 있었다.

    삐로롱.

    ‘시작’이라고 쓰인 버튼을 누르자 집게가 요란한 빛을 냈다. 조이스틱을 옆으로 당기자 인형들이 쌓인 곳으로 집게가 움직였다.

    “일단 가장 가까운 것부터…….”

    삐죽 튀어나온 비디오 타워 위에서 멈춘 후 버튼을 누르자 집게가 천천히 인형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집게가 비디오 타워의 옆구리를 콱 잡아 위까지 올라간 순간 집게가 흔들리면서 비디오 타워 인형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으으… 그래도 잡히긴 하네. 몇몇 기계는 아예 잡히지도 않았는데.”

    “신지의 헌터, 인형 뽑기 잘해요?”

    “예전에 자주 했어요. 잘하는 건 아니지만……. 한진우 헌터도 한번 해보실래요?”

    한진우 헌터는 사뭇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버튼을 꾹 눌렀다. 끼기긱, 하며 집게가 이동했고 단두대 인형을 향해 쭈욱 내려갔다.

    “어! 걸렸다!”

    “제발 끝까지 가라, 끝까지!”

    열린 단두대 틈에 집게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는데 아까 내가 비디오 타워를 잡았을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래, 그 상태로 골인만 해라!

    여섯 개의 눈동자가 집게를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집게는 우리의 기대를…….

    툭.

    저버렸다.

    “아악! 아까워 죽겠어요! 진짜 거의 다 왔는데!”

    “하미준 헌터! 저거 그냥 뒤집어서 꺼내면 안 돼요?!”

    “이미 해봤어. 흔들어도 보고 박살도 내보고 다 해봤는데 ‘집게로 뽑아 주세요~’라는 멘트만 계속 뜨더라.”

    하미준 헌터는 어느 틈에 만들었는지 모를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이마를 부여잡고 있었다. 아직까지 화가 안 가신 모양이다.

    “그럼 다음은 내가 해볼게.”

    인형 뽑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빈이가 호기롭게 조이스틱을 잡았다. 뾰로롱, 하는 소리와 함께 집게는 연어 인형을 향해 나아갔고 두 팔을 넓게 벌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아.”

    “연어 등만 긁어 주고 끝났네.”

    내 말에 세빈이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로 물러났고 집게는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이렇게 된 이상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한테 다 시켜 보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시리얼바를 먹던 최민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최민 헌터, 한번 해보실래요?”

    “자신은 없습니다.”

    “아, 괜찮아요!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최민 헌터가 성큼성큼 걸어와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는 조이스틱을 조심스럽게 잡고 옆으로 쭉 밀었고 아까 한진우 헌터가 놓쳤던 단두대 인형 위에서 멈췄다.

    덜컹.

    초심자의 행운을 기대하며 집게를 집요하게 쳐다봤지만 끝이 단두대의 틈에 살짝 걸렸다가 입구 주변에서 다시 힘없이 떨어졌다.

    “이제 슬슬 리스폰 시간이라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하아아… 제가 진짜 마지막으로 해볼게요.”

    쾅!!

    나는 주먹으로 시작 버튼을 내리치고 다시 단두대 인형을 향해 조이스틱을 당겼다.

    그래도 다른 인형보다 이게 그나마 가능성 있었어.

    ‘제발 좀 돼라, 좀!’

    내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밑으로 내려간 집게가 아까처럼 단두대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무사히 가라, 무사히 가라…….”

    손까지 모은 채로 계속 중얼거리며 집게 끝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단두대 인형만 뚫어져라 보았다. 움직일수록 자꾸 인형이 휘청거려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느낌 좋은걸.”

    어느새 합류한 김민숙 헌터까지 인형 뽑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감상을 덧붙였다.

    고작 체력 1짜리의 인형 뽑기인데 이렇게 가슴 졸일 일이야?

    집게는 단두대를 잡은 채 털털거렸고 그대로 출구 쪽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덜컹.

    [편집 괴수 ‘행운의 인형 뽑기’가 ‘신지의’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편집 괴수 ‘기울어진 천칭’이 소환 대기 중입니다.]

    “됐다!”

    출구에서 단두대 인형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행운의 인형 뽑기가 녹아내렸다.

    ♪♩♬♪

    그때 예능 방송에서 들어본 적 있는 트럼펫 효과음이 이 공간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42%]

    엄청나게 불길한 예감과 본능적인 불안이 과거의 기억을 무의식의 저편에서 끄집어내고 있었다. 내가 숨을 죽인 채 주위를 둘러볼 동안 단두대 인형이 번쩍거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신지의’ 님!]

    [편집 괴수 ‘행운의 인형 뽑기’를 소멸시킨 당신에겐 축복이 내려집니다!]

    “축복?”

    인형은 내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 그럴 때마다 단두대에 걸린 토끼의 목이 덜렁거렸다.

    [축복 ‘행운의 당첨자!’]

    [편집 괴수 ‘행운의 인형 뽑기’를 소멸시킨 생명체에게만 내려지는 특별한 축복]

    [다음에 소환될 몬스터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쿵!

    흘러내리던 태양이 결국 땅 위로 떨어졌고, 그 속에서 형형색색의 물체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편집 괴수 ‘오늘의 날씨는 맑음입니다’가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기울어진 천칭’이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날지 못하는 종이학’이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시체 모빌’이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편집 괴수 ‘괴조의 호수’가 ‘신지의’를 타기팅합니다.]

    “…아,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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