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외부 팀에 배정된 헌터들은 주민들 대피를 마무리 짓고 있었고, 게이트 앞에는 내부 팀과 경계 팀이 모였다.
“지의야!”
“아, 언… 컥!”
지호 언니가 ‘수룡’까지 써가며 내게 날아오더니 격하게 끌어안았다. 파이트 클럽 간 후로 처음 봐서 반갑긴 하지만, 반가움의 표현이 꽤 거칠었다.
“푸하!”
품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언니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음, 아픈 곳 없고 멀쩡해 보이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언니는?”
“며칠 전에 베트남 파견 다녀왔어. 왜 그, 다낭에 게이트 하나 터졌잖아.”
지호 언니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곤했겠다.”
“이번 게이트만 수습하면 휴가 좀 써야겠어.”
생각해 보니 아까 대피를 도와주던 이동계 헌터 중에 인도네시아 국기가 붙어있는 옷을 입은 사람도 있었지. 헌터들끼리는 정말 서로 돕고 사는구나.
“언니는 내부 팀이야?”
“엉. 넌 경계?”
고개를 끄덕이자 지호 언니가 약간 측은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금방 입을 뗐다.
“나도 경계는 한 번도 맡아 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을 못 해주겠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맞아! 바로 그 마인드야!”
“내부 팀 들어가겠습니다!”
직원의 외침에 언니는 게이트 쪽을 슬쩍 본 후 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근, 두근.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심장 박동과 코끝을 간지럽히는 비 냄새가 묘하게 긴장을 풀어 주었다.
‘지유가 안아 달라고 할 때마다 나도 이렇게 안아 줬는데.’
감상에 젖을 때쯤 언니는 나를 다시 떼어 놓고 푸른 눈을 빛냈다.
“A급 경계는 그렇게 안 위험하대. 너무 걱정 말고!”
“고마워. 언니도 조심해!”
“엉~”
지호 언니가 다시 수룡과 함께 내부 팀 대열에 합류했다. 어느새 게이트는 활짝 열려 있었고 내부 팀이 먼저 던전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 아직 폭발 전이라 경계처럼 보이는 공간 없이 바로 내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경계 팀은 이쪽입니다, 고객님~”
“왁, 깜짝아!”
능글맞은 목소리가 오른쪽 귀에 꽂혔다. 바로 뒤를 돌자 하미준 헌터가 웃으며 선글라스를 벗고 있었다.
“하미준 헌터도 경계 팀이에요?”
“아쉽게도 그렇게 됐어. 차도윤 헌터가 내부 팀으로 갔고 나랑 민숙 언니가 경계 팀으로 합류했습니다~”
“민숙… 언니요?”
내가 아는 그 김민숙 헌터인가 싶어 경계 팀 쪽으로 발을 옮기자 두심이를 어깨에 얹고 있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김민숙 헌터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아, 네! 근데 두 분… 아는 사이세요?”
김민숙 헌터와 하미준 헌터가 서로를 슬쩍 쳐다보았다. 김민숙 헌터는 한숨을 푹 쉬며 픽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사이가 됐네요.”
“문화센터 동기라고 들어봤어?”
“문화센터요?”
백화점 같은데서 여는 강좌 같은 거 말하는 거겠지? 내가 일했던 옷가게 지하에도 있던 것 같은데.
“나랑 민숙 언니랑 같이 쿠킹 클래스 들었었거든.”
“그때부터 지독하게 따라붙더라고요.”
“당연하지. 언니가 결혼만 안 했어도 내가 어떻게 해봤, 악!!”
김민숙 헌터가 하미준 헌터의 등을 때리자 그가 손으로 등을 싹싹 만지며 호들갑을 떨었다. 하미준 헌터가 호들갑을 떠는 동안 난 두심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심이는 오늘도 우람하고 멋있구나.’
날 기억하고 있는 건지 그냥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멍하니 응시하며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 다들 도착하셨네요.”
김민숙 헌터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최민 헌터와 세빈이도 합류했다. S급 위주로 편성했다고 하던데 정말로 A급은 김민숙 헌터밖에 없나 보다.
“경계 팀 이동하겠습니다!”
“늦어서 죄송해요오!”
한진우 헌터가 급하게 뛰어와 마지막으로 도착했고, 우리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휘이잉―
“기와집?”
남원 던전이랑 겹쳐 보여서 갑자기 소리꾼이 튀어나와 판소리를 부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내부에는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길게 쭉 뻗은 흙길을 따라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고 예쁜 정원 안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몬스터만 튀어나오지 않으면 꽤 훌륭한 피크닉 장소가 될 것 같았다.
“여기 과거 던전이에요?”
“맞아. 신화와 동화 던전이 판치는 상급 던전 중 몇 안 되는 과거 던전이지~”
“99칸짜리 양반집이 배경이야. 클리어하려면 모든 방을 다 열어서 몬스터를 해치워야 해.”
김민숙 헌터의 대답에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럼 몬스터를 최소 99마리를 잡아야 한다는 얘긴가?
여기로 파견 나오기 전에 던전이 소멸할 예정이라 다행이다.
우우웅.
그때 팔찌가 진동했고 익숙한 초록색 빛줄기가 튀어나와 그대로 내 품으로 달려들었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포근한 솜이불 냄새가 얼굴 위로 훅 끼쳤다.
꺄아우! 아우우―!”
“녹두야!”
던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녹두가 튀어나왔다.
“오늘은 위험할 텐데…….”
아우― 컁! 커, 컹!
내 속도 모른 채 녹두는 컹컹거리며 내 어깨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제법 길어진 꼬리가 살랑거릴 때마다 약한 바람이 일었다.
“하하, 같이 싸워야 이 귀여운 친구도 빨리 성장할 거예요.”
김민숙 헌터가 내 쪽으로 다가와 녹두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녹두는 나와 김민숙 헌터를 번갈아 보았고 이내 천천히 눈을 감으며 그의 손길을 즐겼다.
덜컹.
“야, 보급 받아라.”
그때 게이트 쪽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상자를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는 미래 씨가 보였다.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에 헐렁한 반팔 티셔츠, 그리고 양팔에 뒤덮인 의미 불명의 타투들까지.
평소 연구실에서 입는 가운이 없으니까 완전 백수 같네.
“보급? 먹을 거라도 들어 있어요?”
“태평한 소리한다. 기력 회복제, 마취제, 에너지바, 물. 그게 끝이야.”
“먹을 거 맞잖아요.”
미래 씨는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미간을 찌푸리며 깊게 들이마셨다.
“근데 넌 첫 폭발에 경계 팀이냐? 운도 지지리 없다.”
“그렇게 힘들어요?”
미래 씨가 희뿌연 연기를 뱉었다.
“너 멘털 세?”
‘갑자기?’
“약…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짧은 고민 후 바로 대답하자 미래 씨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럼 이번에 깨질 거다.”
“아이 씨, 불길하게…….”
미래 씨는 게이트에 기대어 선 채 바닥에다 재를 털었다.
“경계 자체가 상식 밖의 공간이라 그렇습니다.”
내 등 뒤로 누군가 슥 나타나서 상자 안으로 손을 뻗었다.
최민 헌터였다.
그는 묵묵히 자기 몫의 보급을 인벤토리에 넣더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경계의 몬스터들은 말을 걸기도 하고 상태창에 마음대로 간섭하기도 합니다.”
“상태창에 간섭이요? 그게 가능해요?”
“경계니까요.”
상식 밖의 공간. 사실 던전도 그렇게 일반적인 공간은 아닌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공간이라고?
자신밖에 볼 수 없는 상태창에도 간섭한다고 하니 정말로 이 세상의 법칙이 통하지 않는 곳임에는 분명했다.
“게이트가 폭발하면 경계가 사람들에게 말을 걸 겁니다. 너무 놀라지 마시고 몬스터들을 처리하시면 됩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민 헌터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내게서 멀어졌다.
‘저 사람은 조율자의 사도로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최민 헌터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이익을 좇는 사람 같지도 않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는 느낌이다.
“도대체 당신에게 저는 뭡니까?”
나도 그쪽이랑 무슨 사이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최민 헌터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을 때쯤 하미준 헌터가 보급 상자 앞으로 다가왔다.
“아직도 이거 맛 안 바꿨어?”
“바꿀 필요가 뭐가 있냐. 어차피 위장에 바로 때려 박는 거.”
“그래도 혀에 닿는 느낌이 별로잖아~”
하미준 헌터는 끔찍한 맛을 내는 기력 회복제를 마지못해 챙겼다.
나도 나중에 저거 마셔야겠지? 벌써 내 혀에게 미안해진다.
“아, 미래 씨! 오랜만이네요.”
세빈이가 보급 상자 앞에 가볍게 착지했다. 김민숙 헌터도 에너지바와 물 정도만 챙겨서 인벤토리에 넣었고 전투를 치르기 전 두심이에게 몬스터고기를 먹였다.
그때 미래 씨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한진우는?”
“알면서 물어? 너 와서 부끄러우니까 숨었지.”
‘와, 돌직구.’
하미준 헌터의 대답을 듣자마자 미래 씨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왜 부끄러운데? 하여간 이상한 새끼네.”
“하~ 남자의 섬세한 마음도 몰라주는 저 나쁜 여자 같으니라고~”
하미준 헌터는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근데 하미준 헌터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한진우 헌터는 정말로 안쓰러운 짝사랑을 하고 있나 보다.
미래 씨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게이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무튼 난 간다. 한진우한테도 죽지 말라고 전해줘.”
미래 씨가 발로 담배를 비벼 끄곤 던전 밖으로 나갔다.
‘한진우 씨는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좋아하게 된 거야……. 취향 한번 독특하네.’
“한진우 헌터~ 미래 나갔다!”
“정말요?”
한옥 담벼락에 숨어있던 한진우 헌터가 고개를 쭉 빼더니 주변을 살폈고 보급 상자 쪽으로 부지런히 달려왔다.
“미래가 죽지 말라고 전해 달래.”
“저, 정말로요?! 막 걱정해 주는 그런 말투였어요? 그거 말고 제 얘기한 거는요?”
“하하. 있었을까, 없었을까~”
하미준 헌터가 말을 얼버무리며 보급 장소를 떠나자 한진우 헌터가 방방 날뛰며 그 뒤를 쫓았다. 김민숙 헌터와 세빈이, 그리고 나만 덩그러니 남은 채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저희도 슬슬 자리를 잡아볼까요.”
“김민숙 헌터도 경계 팀이었던 적 있으세요?”
“네. 지금처럼 S급이 많이 없었을 땐 원로 A급들이 다 경계 팀으로 갔으니까.”
김민숙 헌터는 하늘로 두심이를 날려 보낸 후 장갑을 든 손을 높이 들었다.
휘이이―
손끝에 모인 바람이 김민숙 헌터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경건한 의식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쿠구구궁.
그때 땅이 엄청나게 흔들렸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아를 손에 꽉 쥐었고 점점 일그러져 가는 던전 내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뭔가 시작되는군.’
옆에 있던 기와집은 누가 억지로 잡아 늘린 것처럼 길게 늘어났고 새파란 하늘은 새카맣게 물들었다.
서걱.
높게 떠있던 태양이 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이내 그 속에서 용암 같은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굳이 누군가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곡, 무질서, 혼돈의 공간]
[경계에 입장하셨습니다.]
내가 지금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