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폭풍전야】
―신지의 님, 확인되셨습니다.
인공 지능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회의실 문이 열렸다. ‘게이트 폭발 비상 대책 회의’라는 글자가 박힌 커다란 스크린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회의실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저마다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지의 헌터, 이쪽이에요!”
스크린 앞쪽에 있던 한진우 헌터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잠깐 꽂혔지만 금방 다시 자기 할 일을 했다.
‘아직 세빈이는 안 왔나 보네.’
한진우 헌터 주변에는 최민 헌터와 차도윤 헌터뿐이었다. 최민 헌터는 날 슬쩍 본 후 고개만 숙여 인사했고 차도윤 헌터는 늘 그렇듯 눈길조차 주지 않고 헌터넷에 올라온 문자만 확인하고 있었다.
“경포대 A급 던전이 폭발한다는 게 진짜예요?”
“회장님이 ‘천명’으로 보셨다니까 100%일 거예요.”
대답은 침착하게 했지만 한진우 헌터의 얼굴엔 그림자가 껴있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게이트 폭발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어서 사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적인 피해자인 한진우 헌터랑 최민 헌터는 느낌이 다르겠지.’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더니 회장님과 세빈이가 들어왔다.
덜컹.
“어?!”
의자에서 냅다 일어나 눈으로 세빈이를 좇았다.
‘세빈이 다친 거 아냐?!’
세빈이의 왼쪽 볼에 커다란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던 트렌치코트도 약간 찢어져 있었다.
“신지의 헌터.”
“아.”
한진우 헌터가 내 팔을 끌어내리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하지만 세빈이에게 꽂힌 시선은 좀처럼 옮길 수가 없었다.
세빈이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후 회의실을 눈으로 훑었고 이내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향해 가벼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헌터넷으로 다들 확인했듯이 경포대 A급 던전에서 3일 내로 게이트 폭발이 발생할 예정이네. 오늘 내가 자네들을 소집한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고.”
회장님은 단상에 올라가기도 전에 말을 시작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회장님이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내가 경포대 던전의 게이트가 폭발할 거라고 예측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네. 하나는 내 스킬 천명, 그리고 경포대 던전의 환경 변화.”
회장님이 공중으로 손을 뻗자 손에 있던 반지가 눈부신 푸른 빛을 내뿜더니 한자가 가득 쓰인 마법진이 나타났다.
“천명은 이 세상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스킬이네. 주로 부정적인 미래를 보여 주지.”
사라락.
災
마법진에서 왠지 익숙한 한자가 튀어나왔다.
“재앙 재군.”
“와 씨, 깜짝이야!”
몸을 흠칫 떨며 뒤를 돌자 하미준 헌터가 씩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네.
“위치나 시기는 대략적으로만 알려 줘서 아쉬운 스킬이기도 하네.”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이미 엄청난 스킬 아닌가? 일단 S급 점성계 스킬 자체가 전 세계 유일이라던데.
회장님이 손을 내리자 마법진은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이번에 감지된 위협은 강원도 쪽이었고 여의도 S급 게이트 폭발 때에 비해 위험 정도가 낮은 걸로 보아 A급 던전으로 판단했네. 그래서 강세빈 헌터를 경포대 던전에 단독으로 파견 보냈지.”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세빈이에 관한 것이었다.
“A급 던전을 혼자서 갔다고?”
“아무리 DF랭킹 3위여도 그렇지, 그건 좀 힘들지 않나?”
‘세빈이가 DF 3위인 건 또 처음 알았네.’
S급과 A급의 차이가 상당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던전 하나를 깰 수 있는 레벨 차는 아니다. A급 헌터들이 서포트를 해줘야 안정적으로 클리어가 가능했을 텐데… 세빈이는 그런 A급 던전을 혼자 클리어했다.
세빈이가 무대 위로 훌쩍 뛰어 올라가 단상에 똑바로 섰다.
“던전에 관한 건 강세빈 헌터가 말해 주게.”
“시간이 없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경포대 A급 던전의 일반 몬스터 개체수가 현저히 증가했으며 드롭되는 아이템의 설명창도 제대로 출력되지 않았습니다.”
세빈이는 뭔가를 떠올리려는 듯 잠깐 위쪽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보스 몬스터의 경우 공격력은 동일했으나 체감상 방어력이 급격히 상승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보스 몬스터 처리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게이트 폭발의 전형적인 징후이기에 경포대 A급 던전 역시 게이트 폭발의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상입니다.”
세빈이가 고개를 숙이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러곤 내가 있는 책상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한진우 헌터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볼에 붙어있던 반창고를 떼어내자 가로로 길게 찢어진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너…….”
“그냥 찢어진 거야. 괜찮아.”
세빈이는 멋쩍은 얼굴로 내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걱정도 되고 속상하기도 한데 누굴 탓할 수도 없고…….
“한진우 헌터, 치료 좀 부탁드릴게요.”
“맡겨만 주세요!”
한진우 헌터가 손을 펼치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상처 위로 나뭇잎이 날아들었다. 나뭇잎이 상처를 어루만질 때마다 세빈이의 미간이 움찔거렸고, 어느새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는 스킬이라 그런지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강세빈 헌터의 브리핑대로 경포대 A급 던전이 폭발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네. 던전 내부 상황에 따라 지금 당장이라도 터질 수 있지.”
스크린에 떠있던 ‘게이트 폭발 비상 대책 회의’가 사라지고 강원도 지도가 나타났다. 스크린의 한가운데에는 경포대 A급 던전의 게이트가, 그리고 그 밑쪽으로 병원과 학교 사진이 있었다.
“인근 지역 주민들은 강릉 병원과 초등학교에 있는 지하 벙커로 대피시킬 것이고, 우린 몬스터들이 시내까지 가지 않도록 토벌에 총력을 다할 걸세. 전투 기간은 던전 내부 시간으로 최소 3일로 보고 있다네.”
“3일? 은근히 기네.”
“A급치고는 꽤 기네요.”
하미준 헌터가 중얼거렸다. 던전 안 시간으로 3일이면 정말로 긴 시간이다.
하미준 헌터랑 한진우 헌터가 말하는 걸 들어보면 경포대 던전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화면은 어느새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고, 커다란 사각형 세 개가 나란히 놓였다.
[내부] [경계] [외부]
“게이트 폭발 대응 매뉴얼대로 게이트 내부 팀, 경계 팀, 외부 팀으로 나눌 걸세. 내부 팀은 내부에서 리스폰되는 일반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경계 팀은 경계 자체에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와 내부 팀이 처리하지 못한 몬스터들을 맡을 예정이네. 외부 팀은 게이트 밖에서 도시를 보호하게 될 거고.”
내부와 외부까지는 대충 이해가 가는데, 경계는 좀 낯설었다.
“한진우 헌터.”
“네?”
“혹시 경계는 그냥 내부랑은 다른 건가요?”
“아, 게이트가 폭발할 때 생기는 틈새 같은 거예요.”
한진우 헌터에게 귓속말로 물어보자 그도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대답했다. 한진우 헌터는 양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던전 내부에서 게이트로 나가기 전에 완전 엉망진창인 공간이 있거든요. 거기를 경계라고 불러요.”
“뭐 어떻게 엉망진창이길래…….”
“진짜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에요.”
한진우 헌터는 보기 드물게 인상까지 찌푸리며 입을 비죽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이상해진 모양이었다.
“무슨 추상화에서 나올 법한 몬스터들이 날아다니지를 않나, 난데없이 자유의 여신상이 말을 걸지를 않나……. 아무튼 굉장히 이상한 공간이었어요.”
“그런 몬스터들이 바로 회장님이 말씀하신 경계 자체에서 흘러들어 오는 몬스터들이야. 정말 난생처음 보는 비주얼일걸?”
듣고 있던 하미준 헌터가 한마디 거드는 동안, 회장님은 화면을 끄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내부 팀은 A에서 B급 헌터, 경계 팀은 S급 헌터 위주로, 그리고 외부 팀은 B급과 C급 헌터로 구성할 걸세. 각자 어느 팀으로 배정할지는 회의가 끝나고 헌터넷을 통해 통지하겠네.”
권능 덕분에 웬만한 몬스터들은 다 쉽게 공략했는데 경계 몬스터도 정보가 뜰지 모르겠네.
“폭발 예상 시간은 내일 오후 두 시. 다들 내일 아침 여섯 시까지 경포대 A급 던전 앞으로 집합해 주길 바라네. 그럼 해산!”
* * *
“초당동 주민 대피소는 이쪽입니다!”
“경포동 주민분들은 병원 지하 벙커입니다! 단독행동하지 마시고 헌터들의 안내에 따라 움직여 주세요!”
“세! 줄! 씩! 서주세요~!”
[발언력 상승]
[각성자 ‘신지의’의 말은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힘을 갖는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동요한다.]
[발언 결과 : 수용]
‘자아를 진짜 확성기로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
내 한마디에 사람들이 일제히 질서정연하게 섰고 대피소행 버스에 올랐다. 해변을 따라 쭉 선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순간 이동 스킬이 있는 헌터들 덕분에 이만큼 한 거지만, 전부 다 대피시키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아니, 우리 집이 게이트 바로 앞인데 부서지면 책임질 거야? 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
“발생하면 어쩔 거냐고. 내가 지금 네 다짐 듣자고 물어본 줄 알아?”
‘뭔 소란이야?’
줄 뒤쪽에서 웬 남자 헌터와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남자 헌터는 피곤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자동응답기 같은 대답만 반복했고, 남자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락바락 화를 냈다.
진상은 정말 어디에나 있다.
한숨을 길게 쉬며 남자 헌터의 옆으로 가자 남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넘어왔다.
“엇…….”
“무슨 일이시죠?”
나를 알아본 건가?
진상남의 태도가 갑자기 눈에 띄게 누그러지더니 그가 아까보다 훨씬 온화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넸다.
“아이고, 그, 엄청 강한 양반 되시죠? 저희 집이 저~기 보이는 파란 지붕인데 게이트랑 너무 가까워서 말이죠.”
“아… 네.”
“만약에, 아 물론 우리 헌터님께서 잘 해주시겠지만 혹시 부서지면 보상은 어디서……?”
‘목숨이 걸린 마당에도 저런 소리가 잘도 나오네.’
나이가 있는 사람 중엔 헌터를 몬스터 처리 직원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렇게 진상을 부리는 케이스가 꽤 있다고 들었다.
저 남자 헌터한테는 그렇게 성질을 부리다가 나한테는 꼬박꼬박 존댓말하는 걸 보니, 내가 딱 싫어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그건 시민분 보험사가 처리해 줄 겁니다.”
“아하하… 아, 그래도 그건 제 보험이고 협회 쪽에선…….”
“없습니다.”
[각성자 ‘신지의’의 발언에 비각성자 ‘강환인’이 동요한다.]
“일단 헌터들을 믿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 주세요.”
“아, 예, 예…….”
[발언 결과 : 수용]
남자는 어느새 잔뜩 기가 죽어서 다시 대피 줄에 합류했다. 대피소에 갔다 온 버스가 돌아오자 줄이 금방 줄었고 어느새 그 진상남도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하아아아… 감사합니다. 신지의 헌터.”
남자 헌터는 한숨을 길게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영화관에서 도와줬던 그 직원이랑 묘하게 겹쳐 보이네.
우우웅―
“어, 핸드폰.”
그때 업무용 핸드폰이 진동했다.
[게이트 앞으로 집합해 주십시오.]
긴급 공지 메시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게이트 폭발을 앞둔 던전으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