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31.
‘너가 왜 여기 있냐.’
세빈이는 나보다도 더 놀란 눈치였다. 눈을 크게 뜨고 잠시 버벅거리더니 이내 평소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왔다.
“지의야, 여기 왜 왔어?”
“어? 나… 그냥 궁금해서.”
“궁금?”
세빈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최재윤 헌터 때문에 왔다고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아무 핑계를 댔고, 그럴수록 세빈이의 표정은 더욱 경직되었다.
“두 분은 여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강세빈 헌터랑 나는 회장님 특명으로 왔지~”
“회장님 특명이요?”
지호 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미준 헌터는 능글맞게 웃으며 기본 안주로 나온 치즈과자 하나를 집어 먹었다. 세빈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아마 빠르면 올해 말에 국내에서 월드 랭킹전을 개최하려고 하거든요.”
“헐. 월드 랭킹전이요?! 대박.”
“본격적으로 기획하기 전에 비공식 랭킹전인 파이트 클럽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나 궁금해서 왔는데…….”
또다시 시선이 꽂혔다.
세빈이가 잔소리하기 전에 빨리 주제를 바꿔야 하는데.
“눈에 힘 좀 풀어, 강세빈 헌터~ 신지의 헌터가 직접 싸우려고 온 것도 아니고.”
“그래도 위험하잖아요.”
세빈이는 필드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툭 뱉었다.
풀어주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덜그럭.
세빈이의 팔을 잡아 밑으로 끌어당기자 세빈이가 못 이기는 척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럴 때 보면 꼭 나보다 동생 같다니까.
‘저거 고단수네.’
‘지금 세빈이한테 하는 소리야?’
‘어우, 알아서 생각해.’
자아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제멋대로라니까.
또 세빈이가 한 소리 할까 싶어 세빈이의 입에 미리 멜론을 쑤셔 박았다. 세빈이는 눈으로는 날 빤히 바라보면서 입은 열심히 우물거렸다.
좀 귀엽네.
“아무튼 상황 돌아가는 거 봐서 월드 랭킹전을 할 거다~ 이 말이지.”
랭킹전, 이미 몇몇 국가는 시행하고 있는 헌터 랭킹 시스템이다. 헌터들 몸값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자국 헌터들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전 세계에 방송으로 송출하기도 했다.
세빈이의 옆자리에 앉은 하미준 헌터가 흥미로운 눈으로 필드를 바라보았다.
“근데 국내 랭킹전도 없는데 왜 월드 랭킹전을 먼저 해요?”
“민지호 헌터도 우리 회장님 성향 알잖아? ‘그 사건’ 이후로 자국 헌터들끼리 싸우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시는 거.”
“아~”
지호 언니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은 역시 헌터들과 미등록 각성자들이 싸웠던 그 일을 말하는 거겠지.
“지의 양은 관심 없나? 공격계잖아.”
“아유, 없어요.”
‘하지만 랭킹전을 위해 오게 될 헌터들한테는 좀 관심이 있지.’
내가 만약 세상의 종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 계획에 방해가 되는 강한 헌터를 미리 제거하거나, 아니면 그 헌터를 회유해서 내 계획에 동참시킬 것이다. 배신자에게 있어 강한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월드 랭킹전은 그 무엇보다 달콤한 장소일 테니까, 난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배신자를 찾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민지호 헌터 오랜만이네? 우리 파클계의 전설!”
하미준 헌터가 몸을 앞으로 쭉 빼곤 지호 언니를 향해 느끼하게 윙크를 날렸다.
“하하, 안녕하심까. 인사가 늦었네요.”
언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파클계의 전설이라고?”
“파클 사업 초기에 선수 등록하는 사람이 없어서 꽤 애먹었거든. 근데 웬걸? 갑자기 A급 헌터가 파클에 선수 등록을 했다고 하네? 그것도 공격과 방어 스킬을 두루 갖춘 하이브리드계 헌터가?”
“하미준 헌터…….”
지호 언니는 나와 하미준 헌터를 번갈아 쳐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꼭 무슨 이중생활을 들킨 것처럼…….
“다른 헌터들은 그 헌터랑 한 번이라도 붙어 보려고 선수 등록하고, 민간인들은 A급 헌터 스킬 한 번 보겠다고 줄을 섰지. 그 헌터가 바로! 지금 지의 양 옆에 있는 민지호 헌터 되시겠습니다.”
“와우…….”
지호 언니는 부끄러운 듯 테이블에 얼굴을 묻은 채 발을 굴렀다.
직원들이 그렇게 매달렸던 이유가 있구나.
“민지호 헌터가 쓰던 파이터 네임이 뭐였더라? 스플래시 좀비?”
“아악! 쪽팔리게 왜 그런 것까지 얘기해요!”
“아무리 눕혀도 계속 살아나서 생긴 별명이지. 심지어 아직까지 파클에서 진 적도 없어. 대단하지 않아?”
하미준 헌터는 지호 언니의 절규에도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언니는 이미 귀를 막은 채로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툭.
“오오오!!”
이 작은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조명이 꺼졌고, 동시에 사람들이 공간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렀다. 그때 필드의 한가운데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남자가 튀어나와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오늘도 MAD DOG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경기의 사회를 맡은~”
“속! 사! 포!”
“이야~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트로트 가수처럼 반짝이 양복을 입은 남자가 우스꽝스럽게 허리를 크게 접어 인사했다.
“왜 속사포야?”
“파클 전문 MC인데 말을 속사포처럼 빠르게 해서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
특이하네.
심지어 꽤 유명한 듯 관객 모두가 속사포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오늘도 정~말 많은 분들이 MAD DOG에 방문해 주셨네요! 박진감 넘치는 경기,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 그리고 폭발적인 전율을 느끼고 싶으신가요?!”
“와아아악!!”
“좋습니다!! 바로 선수 소개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속사포는 위로 날아올랐고 필드 위쪽에 설치된 의자에 앉았다. 필드를 비추던 조명은 노래의 빠른 비트에 맞춰 색이 바뀌더니, 이내 어느 한곳을 딱 비췄다.
조명을 받은 바닥이 좌우로 갈라졌고 호랑이 가면을 쓴 헌터가 그 속에서 올라왔다. 커다란 몸집에 우락부락한 근육,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 때문에 그는 방금까지 야생에서 살다 온 사람 같았다.
“신장 190센티미터! 몸무게 95킬로그램! 내 안엔 호랑이의 피가 흐른다! 야수화 스킬을 보유한 초괴력 헌터~ 타이거 S!!”
“와아아아!!”
“S!! 이겨라!!”
속사포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타이거 S가 정말로 짐승처럼 포효했고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시끄러운 노래의 중간중간에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고 그는 당장이라도 변신할 것처럼 몸의 모든 관절을 꺾었다.
탁.
조명이 맞은편으로 옮겨졌고 아까처럼 바닥이 갈라졌다. 안에서 나온 건 작은 체구의…….
‘최재윤 헌터다.’
어제 봤던 바로 그 체형과 눈이었다. 그는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 천으로 된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런 타이거 S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민 건~ 신장 160센티미터! 몸무게 52킬로그램! 겉모습에 속지 마시라~ 광폭화 스킬을 보유한 쁘띠 버서커, 어둠의 요정 J!”
“J! 이번엔 보여 줘라!”
“지지 마!!”
최재윤 헌터는 평범하게 손을 들어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했고, 만족스러울 만큼 큰 함성 소리를 듣고 나서야 팔을 내렸다. 어제 잔뜩 풀 죽은 채로 옷을 털던 사람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면 승리입니다! 아, 당연히 죽이시면 안 됩니다?”
“S!! 가라! 너한테 전 재산 꼴아박았다!”
“요정! 보여줘라!!”
관객석에선 저마다의 염원을 담은 포효가 들려왔다. 파이트 클럽의 열기는 점점 더 더해졌다.
“자, 그럼 양 선수 준비하시고~”
쿠구구궁.
“파이트!!”
S의 척추가 위로 솟더니 이내 팔과 다리가 사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두꺼워졌다. 주황색 털이 덮이고 날카로운 발톱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와아아!!”
호랑이도 사람도 아닌, 괴상한 모습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S에게 열광했다. S가 거친 숨을 내쉬며 최재윤 헌터에게 달려들자 최재윤 헌터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타이거 S! ‘호랑이 기운’과 함께 어둠의 요정 J에게 달려듭니다! J, 이에 지지 않고 곧바로 은신 스킬 ‘암연’ 발동!”
속사포라는 이름 한번 잘 지었네.
그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고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완벽하게 중계를 이어 나갔다.
“민지호 헌터,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당연하죠. 뭔데요?”
내 옆에서 얌전히 전투를 지켜보던 세빈이가 지호 언니 쪽으로 고개를 살짝 뺐다.
“저 MC는 헌터들 스킬을 어떻게 다 알고 있는 거죠?”
“아~ 그거요? 헌터들 선수 등록할 때 자기가 쓸 스킬 전부 작성해서 제출해야 하거든요.”
“속여서 쓰면 바로 실격이지.”
하미준 헌터도 말을 얹었다. 세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 메모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쾅!!
최재윤 헌터를 찾으려는 듯 S의 커다란 팔이 검은 연기를 헤집었고, 이내 금방 최재윤 헌터의 어깨가 잡혔다.
“아~! J! 금방 들키고 맙니다!”
“쿠오오오!!”
“타이거 S, 그대로 어둠의 요정 J를 바닥으로 메다꽂는데요!”
콰앙!
엄청난 힘 때문에 바닥으로 떨어졌던 최재윤 헌터의 몸이 다시 튀어 올랐다. S는 그의 몸을 다시 잡아 벽으로 던졌다. 방어를 할 새도 없이 최재윤 헌터의 몸이 벽에 부딪쳤다가 바닥 위로 엎어졌다.
“그것밖에 못 하냐!”
“J! 포기하지 마! 뭐든 해보라고!”
‘S한테 죽는 건 아니겠지?’
어디 하나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괴력이지만, 다행히 최재윤 헌터는 잘 버텨 주고 있었다.
콰앙!
“아악!”
“J!! 힘내라!!”
“타이거! 끝내버려!!”
비틀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은 최재윤 헌터가 품 안에서 작은 단검 두 개를 꺼내 손에 쥔 후 곧바로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아앗, 이때 어둠의 요정 J! S를 향해 달려듭니다! 두 번의 공중 베기 이후 폭풍같이 쏟아지는 찌르기 공격!”
키이잉!
최재윤 헌터의 칼끝과 S의 발톱이 소름끼치는 마찰음을 냈다.
“아~ 타이거 S!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네요! 속수무책입니다!”
최재윤 헌터의 단검이 저글링 공처럼 S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발톱으로 튕겨내며 뒤로 물러나던 S의 발이 꼬이더니 결국 그의 육중한 몸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으랴아!!”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최재윤 헌터가 S의 옆구리를 찌르자 새빨간 피가 필드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우오오오!!”
“드디어 첫 유효타~! S가 쥐고 있던 초반의 주도권이 J에게 넘어갔습니다!”
“좋았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내버렸다. 깨달았을 땐 이미 세빈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후였다.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미간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어딘가 모르게 심사가 뒤틀린 것 같았다.
“쿠오오오오!!”
그때 씩씩거리며 옆구리를 움켜쥔 S가 검은 연기 속으로 도망치려는 최재윤 헌터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호랑이 기운의 지속 시간은 30분! 얼른 시간 안에 끝내 버려야 할 텐데요?”
최재윤 헌터는 그의 손을 피해 오른쪽으로 피하려 했지만 S의 커다란 발에 걸려 넘어졌다. S는 그를 다시 움켜쥐었고 쥐어짜 내듯 그의 몸을 양손으로 눌렀다.
“아으, 아아악!!”
“어둠의 요정 J의 회피 실수! 타이거 S에게 다시 잡힙니다!”
최재윤 헌터의 비명이 경기장 전체를 울리자 그를 향한 응원의 목소리가 또다시 이어졌다.
“아~ 이렇게 되면 S, 절대 안 놓아줄 것 같은데요?”
S가 손을 놓자 최재윤 헌터의 몸이 힘없이 필드 위로 떨어졌다. 첫 유효타를 먹였어도 실수 한 번에 다시 주도권이 넘어갔다.
“어둠의 요정 J가 10초 안에 일어나지 못한다면 이대로 승리는 S의 것이 됩니다. 아~ 리벤지 매치가 이렇게 끝이 나나요~”
“일어나라, 일어나라……. 이렇게 경기 끝내면 재미없잖아.”
지호 언니는 맥주잔을 꽉 움켜쥔 채 최재윤 헌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중얼거리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최재윤 헌터가 빨리 일어나기를 바랐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겠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마저 패배하면…….
두근.
안 좋은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5! 4!”
카운트다운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3! 2! 1…….”
속사포의 카운트다운이 끝을 알리려는 그 순간.
[각성자 ‘최재윤’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의 씨앗 개화]
[각성자 ‘최재윤’은 각성자 ‘신지의’의 말에 영향을 받는다.]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의 파괴력 증가]
<사명>
[사령탑]
[‘말의 씨앗’을 개화시켜 동료로 만들어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