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9화 (29/366)
  • 29화

    【세상에 나쁜 늑대는 없다】

    “어으으…….”

    얼마나 잔 거야?

    시부야에서 온 이후로 거의 한 번도 안 깨고 잠들어 있었다. 뻥 안 치고 한 30시간은 잔 것 같다.

    꺄아―웅.

    “엥.”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술떡…이 아니라 새하얀 술떡 같은 녹두였다.

    “굳이 내가 소환하지 않아도 그냥 나올 수 있구나?”

    녹두는 자그마한 혀로 내 얼굴을 핥더니 이내 품 안으로 쏙 들어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묘하게 억울한 이목구비 때문인가, 아무리 편하게 있어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이는 얼굴이었다.

    캬르릉…….

    목 부근을 긁어 주니 기분 좋은 듯 그릉거렸다.

    [속마음 전화기]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활성화하겠습니까?]

    “엇.”

    ‘맞다, 이게 있었지.’

    인벤토리에 붙박이처럼 박혀 버린 아이템. 소환수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아이템이라곤 했는데…….

    갸르릉…….

    녹두의 속마음에 상처받는 건 아니겠지.

    약간 두려운 마음과 함께 상태창을 향해 대답했다.

    ‘예.’

    [속마음 전화기]

    [활성화되었습니다.]

    ‘행복해.’

    “어?”

    캬웅?

    앳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놀라서 녹두 쪽으로 고개를 내리자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털 뭉치가 있을 뿐이었다.

    ‘뭐야? 뭐야? 언니, 왜 그래?’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 이 목소리는 녹두의 속마음이다.

    ‘언니?’

    쿡.

    녹두가 나를 부를 때마다 자꾸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주책맞게 진짜…….’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뜬 후 다시 녹두를 쳐다보았다.

    지난 시간선뿐만 아니라 이번 시간선에서도 나를 만나러 온 이 존재가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애틋했다. 지난 시간선의 기억이 있었다면 더 반가워해 줬을 텐데.

    “못난 주인 때문에 고생이 많다, 너가.”

    ‘알면 됐어.’

    ‘깜짝이야.’

    녹두가 대답한 줄 알았네.

    갑자기 튀어나온 자아의 목소리 때문에 몸까지 떨어가며 깜짝 놀랐다.

    ‘녹두 스킬 아직 하나도 안 열렸지?’

    ‘응. 교감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랬나 봐.’

    ‘으으음…….’

    자아가 한참 고민에 빠졌다.

    ‘던전을 돌든 하루 종일 놀아주든, 아무튼 같이 시간 좀 보내.’

    ‘알겠어.’

    녹두 데리고 하급 던전이나 좀 돌아볼까. 헌터넷으로 던전 공략 상황을 살펴보니 구로 C급 던전이 비어 있던데.

    핸드폰을 다시 인벤토리에 넣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으윽.”

    현기증이 나서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밥도 안 먹고 잠만 잔 대가가 너무 큰데…….

    웬만하면 집에 있을 땐 배달음식을 먹지 않으려 했지만 지금은 예외다. 대충 핸드폰으로 아무거나 시킨 후 다시 쓰러지듯 이불 위로 몸을 뉘었다.

    * * *

    “들어가셔도 됩니다.”

    구로 C급 던전의 커다란 게이트를 밀고 들어가자 잿빛 하늘과 잿빛 공장, 그리고 그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회색 연기가 나를 반겼다.

    ‘온 세상이 무채색이네.’

    이 던전 안에서 오직 나만이 색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주변에 몬스터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무 구슬을 쓰다듬었다.

    “녹두야, 나오자.”

    내가 녹두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섭게 초록빛이 튀어 올랐고, 공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내 발 앞에 착지했다.

    ‘놀 거야? 놀러 나온 거야?’

    녹두가 헥헥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들뜬 목소리가 정말로 놀러 나온 어린아이 같아서 웃음이 샜다.

    ‘아직까진 그냥 강아지 같은데, 언제 성체가 되려나.’

    녹두를 향해 권능을 써보았다. 보랏빛 글씨가 살랑거리는 녹두의 꼬리 주변을 떠다녔다.

    [S급 소환수 태양을 삼킨 늑대]

    [유체]

    [미개방 소환수 스킬]

    [S급 공격계 스킬 ■■■]

    [S급 이동계 스킬 ■■■]

    [S급 방어계 스킬 ■■■]

    ‘S급 스킬이 세 개? 완전 소환수계의 강세빈이네.’

    “녹두야. 오늘은 놀러 나온 거 아니고 훈련하러 온 거야.”

    ‘어? 언니, 내 말 들려?’

    나와 말이 통하는 게 신기한지 녹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내가 속마음 전화기 갖고 있는 걸 모르는구나.’

    녹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녹두의 꼬리가 더욱 힘차게 흔들렸다.

    ‘알았어! 언니 실망 안 시킬게!’

    기특해 죽겠네, 아주 그냥.

    경쾌한 발걸음으로 던전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철컥.

    그때 가장 가까운 공장에서 커다란 복사기가 튀어나왔다.

    공장이 있던 곳이라 기계들이 몬스터인가 보군.

    으르릉.

    녹두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전투태세를 취했고, 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아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컹!!

    녹두가 먼저 복사기 쪽으로 도약했다.

    콰그작.

    그러곤 인쇄물이 나오는 부분을 물어뜯은 후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다가 곧바로 다시 달려들었다.

    ‘녹두 맨몸인데 괜찮을까?’

    ‘당연하지. 애기처럼 보여도 녹두도 S급이야. 잊지 마라.’

    자아가 내 불안을 잠재웠고 난 녹두의 움직임을 잠자코 지켜보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르르……!

    쩌적!

    이번엔 녹두가 복사기의 몸체를 들이받았다. 복사기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뒤로 넘어갔고 바닥에 한참 쓸렸다.

    파사사삭.

    복사기에서 A4용지가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종이는 일제히 공중을 떠다녔고 날아다니는 것처럼 허공에 한참 머물렀다.

    ‘잠깐, 저거 그냥 종이가 아닌데?’

    공중으로 흩뿌려진 A4용지가 일제히 바닥을 향해 쏟아지더니 모서리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이런, 씨. 녹두야 피해!!”

    아―우?

    타앙!

    녹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 실드를 뽑아냈다.

    “녹두야! 괜찮아?”

    파아앗.

    그때 눈앞에서 말도 안 되는 장면이 펼쳐졌다.

    녹두가 날고 있었다. 아니, 날고 있다기보단 공중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연둣빛 궤적이 녹두를 따라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주변 공기도 조금씩 진동했다.

    파바박.

    날카로운 A4용지는 녹두에게 조금의 상처도 내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땅에 처박혔다.

    아우―!

    쾅!!

    허공을 디딘 녹두가 아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달려가 총알처럼 빠르게 복사기를 들이받았다. 복사기는 결국 산산조각이 났다.

    [소환수와의 교감도가 상승]

    [소환수 스킬 개방]

    [S급 이동계 스킬 ‘공중 도약’]

    [공중을 자유롭게 이동한다.]

    ‘까불고 있어!’

    녹두가 위풍당당한 목소리로 말할 동안 난 그냥 넋이 나간 채 눈앞에 어지러이 뜨는 상태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명>

    [늑대의 동반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42%]

    글자는 곧 사라졌고, 공중에 서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녹두와 눈이 마주쳤다.

    “녹두야!”

    명백하게 칭찬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에 녹두를 냅다 끌어안았고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잘했어, 녹두야!”

    꺄우―!

    녹두의 턱과 이마를 마구 긁어주며 잔뜩 이뻐해 주자 녹두는 혀까지 내밀며 온몸으로 내 손길을 즐겼다.

    내 품에서 빠져나온 녹두가 허공으로 높게 도약하자 연두색 빛의 잔상이 옅게 남았다.

    ‘나 잘했어? 나 멋있어?’

    “그럼! 우리 녹두 멋있어!”

    내 이동계 스킬보다도 훨씬 깔끔하고 성능이 좋은 스킬이었다. 녹두는 내 칭찬에 더 기가 살았는지 빠르게 게이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쾅! 쾅!

    그러곤 온몸으로 몬스터를 들이받고 물어뜯으며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내가 자아를 든 게 우스울 정도로 멋진 모습이었다.

    끼잉! 끼앙!

    “게이트 찾았어?”

    아까 내가 열고 온 철문이 공장 지대 한가운데 떠있었다.

    “녹두, 이번에도 잘할 수 있지?”

    ‘나만 믿어!’

    녹두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은 후 게이트에 손을 댔다.

    쿠구구궁.

    지금까지의 몬스터로 봤을 때는 공장에서 흔히 볼 법한 사물들이 몬스터로 등장할 것 같긴 한데.

    지면이 약간 울리더니 이내 나와 녹두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걸렸다.

    “녹두야, 피해!”

    쾅!!

    옆으로 몸을 피하자마자 게이트 앞에 커다란 유압 프레스기가 떨어졌다. 얼마나 무거운지 프레스기가 떨어진 곳의 지면이 한 1미터는 낮아졌다.

    사라락.

    유압 프레스기 옆으로 전선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컹!

    녹두가 전선을 입으로 물고 그대로 잡아 뜯었다. 고무 조각이 되어버린 전선이 땅을 뒹굴었고 녹두는 곧장 목표를 바꿔 다른 전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팍!

    꺙!

    “녹두야!”

    그때 전선 하나가 녹두의 몸을 낚아채 프레스기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저게 미쳤나!’

    탕!!

    곧장 자아의 방아쇠를 당겨 전선을 맞혔다.

    콰과과광!!

    “아.”

    힘 조절을 잘못했는지 소리 탄환이 전선을 넘어 유압 프레스기까지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탱그랑.

    쇳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녹두는 그것들을 피하며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언니가 나 구해 줬어! 언니가 최고야!’

    녹두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는데도 마냥 해맑았다.

    [소환수와의 교감도가 상승]

    ‘이대로 쑥쑥 잘 크면 된 거지, 뭐.’

    속마음 전화기 덕분에 녹두랑 대화도 하고 이동 스킬도 열리고…….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녹두를 품에 안은 채 등으로 게이트를 밀어 던전 밖으로 나왔다.

    끼익.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오니 어느새 새까만 밤이 되어 있었다.

    ‘언니, 나 졸려…….’

    “아, 들어가서 자. 수고했어.”

    톡.

    녹두는 촉촉한 코를 내 입술에 툭 대곤 다시 팔찌 안으로 들어갔다.

    하여간 귀엽다니…….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응?”

    난데없이 ‘카르마를 밟는 자’가 눈앞에 떴다. 돌발 지령도 아니고 달성도가 상승한 것도 아닌데, 조금 갑작스러운 현상이다.

    [청산할 수 있는 업이 감지되었습니다.]

    [해당 위치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업이 감지되었다고?’

    이 사명은 나의 기억, 그리고 지난 시간선에서 내가 범했던 실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기억을 찾으려면 역시 이동할 수밖에 없겠지.

    ‘예.’

    상태창을 향해 대답하자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과 함께 눈앞이 잠깐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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