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신지의 헌터!”
“억!”
눈이 번쩍 떠졌다.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주위를 살피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지호 언니와 다른 헌터들이 보였다. 나뭇가지를 빼곡하게 채우던 단풍잎들도 어느새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은 눈이 올 것처럼 회색 구름만이 가득했다.
“허어, 허어.”
“괜찮아?”
“어, 응……. 나 얼마나 기절해 있었어?”
“얼마 안 지났어. 한 3분?”
“다행이다…….”
그렇게 짧은 순간에 주마등까지 겪은 걸 보면 아프긴 어지간히 아팠나 보다.
옷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만지자 상처 때문에 약간 거칠어진 피부가 느껴졌다. 그래도 고통은 완전히 사라졌고, 기력도 같이 회복이 됐는지 아까보다 정신도 또렷해졌다.
“아직 마지막 페이즈 들어가기 전이에요. 설 수 있겠어요?”
“네! 덕분에 쌩쌩해졌어요.”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자 관절 하나하나가 우두둑, 하고 소리를 냈다.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아팠는데 이렇게 멀쩡해지다니, 이래서 모든 파견 조에 치유계 헌터가 적어도 한 명씩은 들어가는 거구나.
“그나저나 그 몬스터는 왜 신지의 헌터만 쫓아갔을까요?”
“그러게요. 빛 속성이라 그런가.”
“아~ 까마귀라서? 그럴 수도 있겠네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스스로 귀걸이로 변했던 자아가 다시 내 손으로 들어오는 동안 던전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지호 언니는 허리에 묶어뒀던 남방을 다시 입었고 채현민 헌터는 방어용 스킬인 ‘쥐불놀이’를 우리의 몸에 미리 둘러 주었다.
이걸로 추위가 조금 막아진다면 좋을 텐데.
어느새 나무엔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채 비쩍 말라가고 있었다. 피부를 간지럽히던 시원한 바람은 한기를 가득 머금고 내 주변을 스쳐갔다.
구름이 짙고 낮게 깔려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솜털 같은 눈이 손끝에 닿았다.
휘잉.
‘어우, 추워.’
적당히 차갑던 바람이 이젠 살을 에는 칼바람이 되었다. 손으로 팔을 문지르며 한참 열을 내는데 길의 저편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뭐야, 저거?”
“인간형 몬스터네요. 긴장하세요.”
새하얀 기모노를 입은 창백한 피부의 여자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카락, 입술, 심지어 눈동자까지 전부 흰색이어서 잘 만든 석고상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딸랑, 딸랑. 녀석이 가까이 올수록 방울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눈보라도 더욱 거세졌다.
[S급 몬스터 유키온나]
[물 속성]
[영구동토, 고드름, 매혹, 눈보라]
[특이 사항 : 유키온나의 노랫소리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매혹 스킬을 가진 애들이 왜 이렇게 많아? 귓구멍을 막을 수도 없고.
쿠과과광!!
커다란 고드름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더니 어떻게든 우리의 몸을 꿰뚫기 위해 빠르게 쫓아왔다. 고드름을 전부 맞힌 후 도망치는 동안 광역 음파를 방출했다. 새하얀 음파가 유키온나와 우리 주변을 물결처럼 맴돌았고 바닥에 박힌 고드름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사명>
[사상 최강의 무기를 다루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16%]
그 틈에 지호 언니가 얼음판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더니 유키온나를 향해 도약했고 커다란 수룡을 만들어냈다. 수룡이 입을 쩍 벌리고 유키온나를 한입에 삼키려 하자…….
쨍그랑!
“윽!”
“머리 감싸세요!”
‘수룡이 얼었어!’
수룡의 겉 표면에 살얼음이 맺히더니 그대로 얼음 동상이 되어버렸고, 언니의 몸은 유키온나의 눈보라 때문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다행히 이상욱 헌터의 흙벽이 커다란 손 모양이 되어 그대로 언니를 받아 냈다.
“고마워요……. 에구.”
지호 언니가 머리를 붙잡으며 이상욱 헌터의 ‘광개토’에서 내려왔다. 언니의 얼굴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파바바박.
연둣빛 바람화살이 유키온나의 머리와 심장을 노렸지만 녀석은 빙그르르 돌아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사방으로 날카로운 고드름을 날렸다. 실드에 박힌 고드름은 유리처럼 깨졌고 차가운 냉기만을 남겼다.
‘빨리 잡아야 할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추위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몸 주위를 떠다니는 채현민 헌터의 쥐불놀이도 이 살인적인 추위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유키온나가 갑자기 하늘 위로 둥실 떴다. 그러곤 양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더니 사람으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크기로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아― 히힉, 하, 아― 아아아악!!”
“윽!”
노랫소리 한번 그로테스크하다. 유키온나는 노래라기보다는 비명이나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기괴한 목소리는 고막에 그대로 꽂혀 눈앞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쉬이익.
이리저리 흔들리는 시야를 비집고 고드름이 날아왔다. 이동 스킬로 큼지막한 공격은 회피할 수 있었지만 자잘한 고드름까지는 피하지 못했다.
“아오, 머리 아프네.”
지호 언니가 중얼거리며 수룡을 다시 날렸다. 하지만 제대로 된 위치를 잡지 못하고 애꿎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일단 이 소리부터 밀어내자.’
우우우웅.
자아의 방아쇠를 길게 당겨 공기 전체를 진동시켰다. 유키온나의 노랫소리는 순식간에 흩어졌고, 우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렸다.
쨍그랑.
“끼야아아악!!”
유키온나의 귀가 터져 나갔다. 녀석은 양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사방으로 고드름을 다시 방출했고, 그 틈을 비집고 연둣빛 화살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푹!
그것이 정확히 녀석의 미간에 명중했다.
‘아예 끝장을 보자.’
탕!!
녀석이 화살을 뽑아버리기 전 자아의 방아쇠를 당겼고 새하얀 소리 탄환이 유키온나의 이마에 박혔다.
“하아, 하…….”
푸른색 보석 하나가 밑으로 뚝 떨어지고 나서야 땅 위에 소복이 쌓였던 눈이 사르르 녹았다.
“추워 뒈지는 줄 알았네.”
지호 언니가 몸을 웅크리며 양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방어력 자체가 크게 높지 않아서 공격 찬스만 있으면 쉽게 잡을 수 있었지만 패턴이 꽤 성가신 편이었다.
“중간 보스는 다 끝난 것 같네요. 어디 보자, 하치는…….”
“여전히 멀쩡하네요. 게이트에 손을 대야 보스로 변하는 걸까요?”
채현민 헌터가 하치를 건드려 보았지만 하치는 밀랍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그렇게 기다려도 주인은 오지 않을 텐데. 하치의 기다림의 끝에는 허무함만이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보니 마음 한편이 아려 왔다.
“보스전 돌입하기 전에 잠깐 쉬죠. 회복 스킬을 쓰겠습니다.”
“또 다치신 분 계세요?”
차도윤 헌터의 하늬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채현민 헌터도 부지런히 움직이며 고드름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료했다. 다행히 많이 다친 사람은 없었다. 나도 발목 언저리에 작은 고드름 몇 조각이 박혀서 피부가 조금 찢긴 정도라 그렇게 큰 부상은 아니었다.
“기력 많이 떨어진 분 계시면 회복 알약도 가져왔으니 좀 드세요.”
“아, 저 하나 주세요! 지금은 괜찮은데 보스전 하다가 뻗을지도 모르니까요.”
지호 언니는 이상욱 헌터가 건넨 기력 회복 알약을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고, 동시에 미간을 잔뜩 구겼다.
맛이 별론가? 한 번도 안 먹어 봐서 모르겠네.
“아니… 왜 홍삼 맛을 들고 다니세요…….”
“건강해지는 맛이라서 좋지 않나요? 하하핫!”
“다음엔 초코우유 맛 사서 드셔 보세요. 그건 좀 괜찮더라고요!”
지호 언니는 인벤토리에 알약 봉지를 쑤셔 박은 후 물로 입을 헹궜다.
“읏차, 슬슬 마무리해 볼까요?”
이상욱 헌터와 채현민 헌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고, 이어 차도윤 헌터도 하늬바람을 거두며 하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적이 되기 전에 빠르게 끝내죠. 민지호 헌터는 하치의 시야를 봉쇄하고 주의를 끌어 주세요.”
“네~”
“신지의 헌터와 저는 공격을 최우선으로 하겠습니다. 이상욱 헌터는 저희들의 방어 보조와 채현민 헌터의 보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하치를 눈앞에 둔 채 대열을 맞췄고, 어그로 담당인 지호 언니가 수룡과 함께 게이트 앞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아무 말 없이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린 언니는 차도윤 헌터가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주자 붉은색 나무 게이트에 조심스럽게 손을 댔다.
아우― 우우―
인형처럼 서있던 하치가 움직였다. 고개를 높이 빼고 구슬픈 울음소리를 낸 하치의 눈에서 이내 붉은 액체가 왈칵 흘러내렸다.
콰그작.
피눈물을 흘리는 하치의 몸에서 와드득, 하고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나더니 녀석이 평범한 강아지의 모습이 아닌 다른 존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척추뼈가 높게 솟아오르고 동그란 발은 울퉁불퉁하게 변했다. 발톱도 낫처럼 길고 위협적으로 자라났고 그 위로 하치의 피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귀여웠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건 보스 몬스터 ‘하치’였다.
쿠과광!!
“우왁?!”
땅이 요동치더니 쩌적 갈라졌다. 갈라진 틈새로 나무가 솟아나 사방으로 뻗었다. 난 내 몸을 찢어놓으려는 줄기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딱 봐도 대지 속성 몬스터다. 지호 언니는 수룡과 하나가 되어 하치에게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하며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촤아악.
물을 가르고 하치의 앞발이 지호 언니를 향했지만 언니는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갈라진 물 틈새로 내가 공격을 밀어 넣었다. 하치는 수십 개의 소리 탄환을 피하려 몸을 재빨리 돌렸지만 몇 개는 어깨에 박혀 그대로 터져버렸다.
깨갱! 끼잉!
“헉!”
“집중하세요, 신지의 헌터!”
‘아니, 왜 요괴가 됐으면서 울음소리는 평범한 강아지인 건데?’
하치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자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광역 음파를 방출하면 저 소리가 좀 안 들릴까 싶어 방아쇠를 계속 당겨 봤지만 그럴수록 하치는 더욱 강하게 낑낑거렸다.
“와, 진짜 힘들다…….”
차라리 귀신을 때려잡는 게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다.
콰드득.
“윽!”
갈라진 땅 사이로 솟아오른 나무줄기가 내 발을 잡아, 그대로 위로 던져버렸다.
탱그랑!
붕 뜬 몸을 향해 유리 조각 같은 나뭇잎이 날아왔고 내 이마에 박히기 전에 실드를 펼쳐 겨우 막았다.
이상욱 헌터의 방어 스킬, 광개토 위로 착지하자마자 화살 하나가 연두색 궤적을 남기며 빠르게 날아갔다. 평범하게 날아가던 화살은 바람을 탄 양 더욱 가속하더니 이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하치의 목에 박혔다.
끼, 깨앵!
“으……!”
“신지의 헌터!”
“아, 알았다고요!”
‘정말로 미안하다, 하치야…….’
덜덜 떨리는 앞발로 화살을 뽑으려는 하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커다란 소리탄이 녀석을 집어삼켰다.
콰과과광!!
주변에 있던 나무들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미처 파괴되지 못한 잔해들만 먼지처럼 떠다녔다. 엄청난 폭발에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나는 연기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게이트 주변을 지켜보았다.
“해치웠나?”
‘부활 주문을 외치면 어떡합니까, 이상욱 헌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술을 깨물어서 겨우 참았다. 일단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게이트 주변을 향해 조심스럽게 권능을 들었다.
만약 뭐가 보이면 하치는 살아 있는 것일 거고, 아니라면 그대로 클리어인 거겠지.
손가락으로 만든 작은 원 너머로 보랏빛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S급 보스 몬스터 하치]
[대지 속성]
[할퀴기, 대지 파괴, 옭아매기, 꿰뚫기, 충견]
[특이 사항 : 충견 상태의 하치는 그 어떤 공격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지속 시간은 24시간. 오직 하치의 주인만이 이 스킬을 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