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25화 (25/366)

25화

“갈림길이 보입니다!”

이상욱 헌터가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한쪽은 우리가 계속 걸어온 흙길이었고 다른 길은 붉은색 나무다리였다. 길을 비추는 자를 보니 화살표는 비탈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럼 저 나무다리는 주인이 건너겠구나.’

다리 위에는 안개가 자욱해서 다른 세계로 이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이따금씩 우우, 하고 짐승이 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귀신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일단 S급 이상이 한쪽에 몰리면 위험하니까 차도윤 헌터랑 신지의 헌터는 따로 행동하는 걸로 합시다. 어디로 가실래요?”

“제가 게이트 찾는 아이템을 갖고 있으니까 주인 쪽으로 갈게요.”

“그럼 저도 지의 쪽으로~”

지호 언니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이상욱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언니는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차도윤 헌터도 나를 한 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끼잉?

그때 주인이 한쪽 무릎을 꿇더니 하치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고 하치는 꼬리를 흔들며 입을 벌린 채로 웃었다. 제 주인에게 닥칠 일을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주인은 하치를 두고 나무다리 쪽으로 발을 돌렸고 하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주인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자 비탈길로 유유히 걸어갔다.

“그럼 여기서 갈라지죠. 신지의 헌터와 민지호 헌터는 주인 소멸 후 최대한 빨리 게이트 앞으로 합류해 주세요.”

“네. 좀 이따 봬요~!”

지호 언니가 차도윤 헌터 그룹에게 손을 흔들며 먼저 안개 속으로 들어갔고 나도 그의 뒤를 부지런히 따랐다.

‘생각보다 안개가 더 짙네.’

앞에 있는 하치 주인의 뒷모습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몬스터가 갑자기 튀어나오면 위험할 것 같았다.

“기습을 좀 조심해야겠네.”

촤아아―

지호 언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손을 뻗어 ‘비의 방패’를 주인의 주변으로 둘렀다. B급 스킬이니 S급 몬스터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지는 못하겠지만 즉사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쉬익.

방패가 둘러지기 무섭게 검은 나비가 하치의 주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타앙!

투명한 수룡과 새하얀 목소리탄이 나비를 동시에 맞히자 검은 날개가 사방으로 찢기며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하치…….”

“응?”

“…지금 저 아저씨가 말한 거지?”

시종일관 마네킹처럼 있던 하치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자동 통역기는 빼서 인벤토리에 넣어놨는데도 한국어로 잘 들렸다.

하치의 주인은 뒤를 돌아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안개 너머의 저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마 이 주인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넌 이상 더는 하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란 걸.

“날 너무 기다리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

“기다리는 건 내가 할 테니 너는 많이 놀고, 먹고, 후회 없이 오거라.”

하치의 주인이 검은 연기가 되었고, 그가 입고 있던 초록색 카디건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연약하게 흔들리던 검은 연기는 미련이 남은 듯 제자리를 맴돌다 이내 나비가 되어 느릿느릿 날아갔다.

난 무언가에 홀린 양 위아래로 위태롭게 비행하는 나비를 향해 권능을 들었다.

[F급 몬스터 미련]

[어둠 속성]

[공격성 없음]

[특이 사항 없음]

“지의~! 여기 와서 이거 봐봐.”

“아, 응! 아이템이야?”

“아이템이긴 한데…….”

지호 언니의 말에 손을 내리고 그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언니의 손에는 주인이 입고 있던 초록색 카디건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 손을 얹자 아이템 획득창이 떴다.

[아이템 획득]

[하치의 보물/방어구/F급]

이 F급 카디건이 ‘하치의 보물’. 왜 이런 아이템에 그런 이름이 붙은 거야.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일단 챙겨 놓을까? 부산물도 아니니까 규정 위반도 아니고.”

“그러지, 뭐.”

지호 언니는 인벤토리에 카디건을 넣은 후 내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맞다. 이제 돌아가야지.

손을 올려 길을 비추는 자를 보자 도저히 길처럼 안 보이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안개 살벌하네.’

철컥.

길을 비추는 자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자아를 쏘자 흰 빛줄기가 안개를 가르더니 이내 공기를 진동시켰다.

사아아.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던 비탈길이 나타났다. 나는 지호 언니와 함께 그 길을 따라 부지런히 내려왔다.

이 정도 속도면 사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합류할 수 있겠어!

한참 뛰어가자 삐죽 튀어나온 금색의 뒤통수가 보였고, 그 너머엔 게이트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지호 언니의 기척을 느꼈는지 뒤를 돌아본 채현민 헌터가 우릴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빨리 오셨네요! 사계절 1페이즈쯤에 오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의, 요 반지가 아주 끝내줘서 일찍 왔죠.”

지호 언니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즐거워했다. 하치는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파박.

모두가 하치에게 시선을 고정할 동안 녀석이 앞발로 게이트를 긁었다. 커다란 나무 게이트에 앙증맞은 발톱 자국이 남았지만 그것을 귀여워할 여유는 없었다.

지금부터 등장할 중간 보스는 총 네 마리, 그리고 최종 보스인 하치까지 쓰러트려야 한다.

게이트를 등 뒤에 둔 채 하치를 힐끔 내려다보자 아까 검은 해파리를 만났을 때처럼 망부석처럼 앉아서 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킁, 킁킁… 어디서 꽃 냄새 나지 않아요?”

“저도 나요. 1페이즈 시작인 것 같은데…….”

지호 언니의 말대로 달큼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약간 싸늘한 바람이 불던 던전 내부에도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었고 비탈길에 있던 가로수도 분홍색 물감을 푼 양 서서히 벚꽃색으로 물들어 갔다.

어디선가 바람이 훅 불자 분홍색 꽃잎이 새처럼 날아다녔다. 그 꽃잎들은 세상을 뒤덮기 시작하더니 새파랗던 하늘과 우리가 서있는 거친 흙길마저 모두 꽃밭으로 만들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 그 모습에 눈이 잠깐 멀었다고 생각한 순간 꽃잎 더미를 가르고 굵은 나무줄기가 내게 달려들었다.

“크, 윽!”

팔을 꿰뚫기 전에 줄기를 끊었지만 팔뚝 언저리가 찢겨 핏방울이 꽃밭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아파할 틈도 없었다. 곧바로 꽃잎들이 나를 향해 날아오더니 이내 커다란 낫이 되어 내 목을 노렸다.

탕, 탕, 탕!

발 없는 말로 꽃잎 낫의 뒤쪽으로 도약하고 목소리 탄환을 세 발 박아 넣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벚꽃잎에서 시선을 떼고 나무줄기가 날아왔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가 너무 많잖아?!

비탈길에 있던 모든 가로수가 벚꽃으로 변해서 어떤 나무가 날 공격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권능으로 볼 틈도 없이 내 앞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피하기 급급했고, 그건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광역 공격하겠습니다! 뒤로 물러나세요!”

이상욱 헌터가 커다란 방패를 펼쳐 차도윤 헌터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감쌌고, 차도윤 헌터는 바로 활시위를 당겼다.

피이잉!

화살 한 발이 꽃밭을 가르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 초록빛 폭풍은 주변에 있는 모든 걸 집어삼키며 벼락을 내리꽂았다.

“신지의 헌터, 괜찮으세요? 지금 치료해 드릴게요.”

“네, 네…….”

왼쪽 팔을 채현민 헌터에게 맡긴 채 이상욱 헌터의 방패 너머로 차도윤 헌터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고유 스킬 ‘천재지변’.

훈련할 때 잠깐 봤던 천재지변은 진짜 스킬 능력의 10분의 1도 안 보여 준 거였구나.

모든 벚꽃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중 몇 개는 뿌리째 뽑혀 공중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 맞다. 이참에 권능이나 보자.

[S급 몬스터 핏빛 벚나무]

[대지 속성]

[꿰뚫기, 흡혈, 매혹]

[특이 사항 : 핏빛 벚나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면 그대로 피를 빨아 먹힌다. 매혹된 대상을 물리적으로 공격하면 매혹은 해제된다.]

특이 사항이 너무 소름 돋는다. 매혹을 피할 방법은… 뇌에 힘주는 방법밖에 없나?

채현민 헌터 덕분에 피가 멎었고 상처도 깔끔하게 아물었다. 일단 저 벚나무들은 파괴력으로 찍어 누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방패에서 나와 차도윤 헌터와 함께 공격을 퍼부었다. 내 목소리가 박힌 벚나무들은 붉은 액체를 내뿜으며 터져버렸고, 어떻게든 그 폭풍 속에서 빠져나오려던 나뭇가지들은 벼락을 맞고 새까맣게 탔다.

“안 힘드세요?”

“…….”

“…차도윤 헌터?”

설마 매혹당한 거야?!

상황을 파악하기가 무섭게 땅속에서 날카로운 나무줄기가 튀어나와 곧장 차도윤 헌터의 심장으로 향했다.

‘다 그쪽 살리려고 하는 거니까 악감정 갖지는 마쇼!’

콰앙!!

“커헉!”

탕!!

한 손으로 차도윤 헌터의 옷 목덜미 부분을 잡아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피를 빨아먹으려는 핏빛 벚나무의 탐욕스러운 줄기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줄기는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고 폭풍에 삼켜졌던 벚나무들도 형체를 서서히 잃어 갔다.

“방금… 뭐였나요?”

“매혹 스킬에 당했던 것 같아요.”

차도윤 헌터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아, 제가 그쪽 좀 눕혔기로서니 뒤끝 있게 행동하진 마세요?”

“제가 공과 사도 구분 못 하는 줄 아세요?”

‘구해 준 사람한테 되게 앙칼지네.’

차도윤 헌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바닥에서 일어났고 옷에 붙은 꽃잎을 털어냈다.

‘이제 1페이즈는 끝이 난 것 같고……. 다음은 여름인가?’

미리 옷소매를 걷으며 다시 대열로 복귀했다.

매앰, 매앰, 맴맴…….

“뭐 쉴 틈도 없이 바뀌네.”

“그러게.”

지호 언니도 입고 있던 남방을 허리춤에 묶었고 반팔을 돌돌 말아 민소매로 만들어 버렸다. 뜨거운 햇빛이 지면을 태울 것처럼 무섭게 내리쬐고, 매미의 울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힘차게 울던 매미 소리가 둘이 되고, 그 위에 다른 매미의 소리가 겹쳐졌다. 필사적인 울음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내 고막을 울리고 등줄기를 타고 뜨거운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첨벙.

그리고 갑자기 눈앞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생겼다.

‘물은 사람을 부른다고 했던가?’

당장에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시원해 보였다. 자아를 웅덩이를 향해 겨눈 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을 때쯤, 물갈퀴가 달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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