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왁!”
“어이쿠, 조심!”
게이트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바람에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몸이 밑으로 훅 꺼졌고, 덕분에 지호 언니의 등에 코를 박았다.
‘아 씨, 처음부터 코피 날 뻔했네.’
언니는 날 보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입술을 꽉 물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럴 거면 그냥 웃어…….”
“내가, 큽, 어떻게, 그, 래!”
언니가 웃음을 삼키는 동안 나는 한 손으로 코를 만지며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비탈길과 그 주위에 나있는 가로수들이 보였다. 그리고 한 10미터쯤 앞에는 어떤 남자의 뒷모습과 귀엽게 생긴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둘이 하치와 그 주인인가 보네.
“일단 저 둘을 보호하는 걸 우선으로 하죠.”
발걸음을 재촉해 그들을 둘러싼 채로 걸음을 맞췄다. 그들은 우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앞만 보며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자 제 주인을 향해 환한 미소를 보여 주는 하치가 보였다.
위험할까 싶어 녹두를 소환하진 않았는데, 나중에 상황 좀 보다가 불러내야겠다.
“아, 채현민 헌터는 안쪽으로 오세요! 제가 방어계 스킬이 있으니까 뒤로 가고…….”
지호 언니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정리했다. 치유계 헌터인 채현민 헌터는 무리의 가운데, 폭발적인 공격력을 가진 나와 차도윤은 가운데 양 날개, 방어와 공격이 둘 다 되는 지호 언니는 후방, 그리고 방어 스킬에 특화된 이상욱 헌터는 전방에 섰다.
‘가장 정석적인 대열이네.’
몬스터 잡느라 날뛰다 보면 보통 대열이 흐트러진다고는 하지만, 초기 대열을 잡고 안 잡고의 차이는 크다고 들었다. 자기가 맡은 구역에 들어온 몬스터는 확실하게 처리하되 다른 헌터의 구역으로 넘어가면 그를 믿고 대열을 유지한다. 그게 상급 던전의 정석 공략 방법이었다.
쉬이이익.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새의 형상을 한 검은 그림자들이 하치와 주인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왔다. 나무로 된 거대한 방패가 그림자를 막자 유리창에 비바람이 치듯, 검은 그림자들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다시 튕겨 나갔다. 그러고는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왔다.
자아를 높이 들고 음파를 내보내자 그림자들이 갑자기 속력을 늦추더니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푹.
차도윤 헌터의 바람화살이 허공을 가르더니 그림자들의 개수만큼 늘어났고 그들의 심장을 동시에 꿰뚫었다. 그림자들은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고 시뻘건 부산물만을 남겼다.
‘저 나무로 된 국궁이 차도윤 헌터의 무기군.’
이름이 ‘나팔꽃’이라던데, 정말로 활에 나팔꽃 줄기와 꽃이 주렁주렁 매여 있었다. 길이가 거의 차도윤 헌터의 키만큼이나 길었지만 많이 무겁지는 않은지 잘만 들고 다녔다.
“지의야, 아까 그 스킬 뭐였어? 무슨 흰 물결처럼 나가던 거!”
“어, 그냥 고유 스킬 활용한 거야. 음파로 어지러움을 유발하는 거.”
“무기 생긴 것도 특이하네……. 확성기인데 총처럼 소리를 쏘고.”
지호 언니의 입이 쉰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지의가 스물한 살이라고 했지? 와, 내가 각성한 게 스물세 살 때였는데……. 아, 맞다. 그리고~”
언니는 자기가 어떻게 각성했는지, 고유 스킬이 뭔지, 그리고 자취방에서 고양이를 한 마리 키운다는 것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살짝 올라간 눈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수다스러운 고양이와 함께 있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쿠구궁.
“땅 밑에 뭔가 있어요. 조심하세요!”
채현민 헌터가 말한 이후에도 땅은 계속해서 울렸고, 당장이라도 무언가가 솟구칠 것처럼 진동이 커지기 시작했다.
다리가 한참 후들거릴 때쯤 갑자기 내 몸이 위로 훅 올라갔다.
“뭐야, 이게?!”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나를 받친 채로 하늘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고 지면에 있는 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뛰어내리려 해도 바람이 내 몸을 짓눌러서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오, 진짜!”
타앙!!
자아를 그림자에 딱 붙인 후 방아쇠를 당기자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쨍그랑.
“크읏!”
그림자가 산산조각 난 동시에 내 몸도 엄청난 속도로 떨어졌다. 바람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온몸이 얼얼했다.
우웅.
다시 공기를 진동시켜 떨어지는 속도를 잠깐 줄였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다간 100% 전신 골절이다.
채현민 헌터의 기력을 이런 데 소비시키고 싶지 않은데.
그때 갑자기 커다란 물줄기가 내 몸을 집어삼켰다.
촤아악.
엄청난 속력으로 입수하는 바람에 만들어진 기포들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게 느껴지더니 이내 누군가가 내 목덜미를 잡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월척이요!”
“푸하! 콜록, 콜록!”
“괜, 괜찮으세요?!”
“어우, 어이구, 네…….”
온몸이 흠뻑 젖었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이게 언니 스킬이야?”
“응. 고유 스킬 ‘수룡(水龍)’! 물을 내 맘대로 다루는 스킬이야~”
언니의 손에서 물로 된 용의 머리가 나타났다. 지호 언니가 신나게 자기 스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제자리에서 콩콩 뛰며 귀에 들어간 물을 뺐다. 이 소동에도 하치와 주인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방심하면 아까처럼 당합니다. 이제 아마추어적인 실수는 하지 마세요.”
“아, 예, 예.”
도대체 저 인간이랑 어떻게 친해지냐.
차도윤 헌터의 말에 대충 대꾸하며 더욱 깊은 곳으로 갈수록 우리 주위를 맴도는 그림자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모여들던 그림자는 커다란 원이 되었고 촉수 같은 검은 줄기들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약간 해파리 같기도 하고…….
“어우, 징그러워.”
해파리라는 말 취소.
비교한 것만으로도 해파리한테 사과하고 싶어지는 외형이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말을 뱉자 다른 헌터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치와 주인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검은 해파리를 응시했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쉬익.
해파리의 촉수들이 하치와 주인을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자 이상욱 헌터가 아까보다 견고해 보이는 나무 방패를 세웠다.
우지끈!
엥?
공격을 튕겨 내나 싶더니 촉수가 그대로 방패를 뚫고 안으로 파고들어 하치의 목을 휘감았다.
‘안 돼!’
철컥.
촉수가 하치를 끌고 가기 전에 자아를 겨눴고, 내 목소리 탄환이 촉수를 단번에 끊었다. 하치는 다시 제자리에 착지했지만 끊어진 촉수는 다시 꾸물거리며 원래의 형태를 찾아갈 준비를 했다.
“재생합니다! 조심하세요!”
이상욱 헌터의 말이 귀에 꽂히는 동시에 차도윤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 옆의 하치를 한 번 보더니 턱짓으로 다른 곳을 가리켰다.
‘오케이, 뭔 소린지 이해했다.’
쾅!!
재생한 촉수는 양쪽으로 갈라져 하치와 주인을 동시에 노렸다. 그 타이밍에 맞춰 나는 하치를, 차도윤 헌터는 주인을 데리고 옆으로 피했다.
탕, 탕!
무섭게 달려드는 촉수들에게 탄환을 하나씩 박아 넣고 터트린 후 방아쇠를 계속 눌러 광역 음파를 방출했다. 촉수들의 속도는 더뎌졌지만 그럼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잘리면 잘리는 대로 계속 불어날 것 같은데?’
딱딱하게 굳은 하치를 옆구리에 낀 채 권능으로 검은 해파리를 살폈다.
[S급 몬스터 검은 그림자―군집형]
[어둠 속성]
[꿰뚫기, 옭아매기]
[특이 사항 : 군집형의 검은 그림자는 핵을 부수지 않으면 계속해서 증식한다.]
핵이 있다고?
특이 사항이 말한 대로 검은 구체의 한가운데에 붉은 보석 같은 것이 빛나고 있었다.
맨눈으로는 안 보였는데, 이제 저곳만 집중 공격하면 되겠군.
‘문제는…….’
쉬익.
도저히 쉴 틈을 주지 않는 이 촉수들이었다. 정면을 향해 날아온 촉수를 터트려버리고 하치를 노리는 촉수는 방패로 막았다.
“으읏!”
“이쪽으로 패스~!”
그때 검은 촉수가 차도윤 헌터의 발을 휘감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차도윤 헌터는 그 와중에도 치유 스킬인 ‘하늬바람’을 불게 해 하치 주인의 자잘한 상처들을 치료했다. 지호 언니는 수룡을 통해 주인을 건네받은 후 촉수들을 향해 용을 방출했다.
‘나보다 저쪽이 더 급해 보이네.’
차도윤 헌터의 무기는 활이다 보니까 양손을 다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도 어려워 보이고.
핵만 확실하게 부수면 되는데…….
“지호 언니!”
“엉?”
“한 5초만 시선 좀 끌어줘!”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언니는 이내 수룡과 함께 내 곁으로 왔고, 내가 들고 있던 하치를 건네받은 뒤 다시 거리를 확보했다.
쉬이익―
언니가 하치와 주인을 모두 데리고 가자 모든 촉수들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일제히 언니를 향해 날아갔다.
철컥.
‘하나, 둘.’
타앙!!
내 손을 떠나간 새하얀 탄환이 공기를 진동시키며 검은 원의 중앙을 정확히 꿰뚫었다.
“어, 붉은 게 보입니다!”
끼기기긱.
역시 S급 몬스터는 다르구나.
핵을 보호하는 피부까지는 뚫었지만 핵까지 한 번에 터트리진 못했다. 쐐기를 박기 위해 자아의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쨍그랑!
이번에야말로 붉은 핵을 정확히 파괴했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촉수와 검은 구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리 조각이 되어버린 녀석의 핵은 별 조각처럼 반짝반짝 빛나더니 이내 검붉은 피가 되어 밑으로 줄줄 흘렀고 흙길을 적셨다.
“어우, 팔에 알배는 줄.”
지호 언니가 주인과 하치를 바닥에 던져 놓다시피 하곤 스트레칭을 했다.
“SS급은 역시 다르네요! S급 몬스터를 저렇게 반 토막 내는 건 머리털 나고 처음 봅니다!”
“네? 아, 네……. 하하하.”
“맞아요! S급은 가끔 일반 몬스터도 한 마리 잡는 데 시간 엄청 걸릴 때도 있거든요!”
“괜히 DF랭킹 1위가 아니네.”
차도윤 헌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내 스킬에 한마디씩 얹었고, 몬스터의 잔해와 나를 번갈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초롱초롱한 그들의 눈을 보고 있자니 영 부끄러워 괜히 자아를 옷소매로 벅벅 닦았다.
“신지의 헌터.”
“네?”
“아까 그 촉수 몬스터에게 핵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거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할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차도윤 헌터는 나팔꽃을 고쳐 잡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저게 당연한 반응이다.’
던전 공략법은 헌터들끼리만 공유되는 기밀사항이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봤다’라는 핑계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고, 아까 브리핑 때 들었다고 하기엔 못 들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세빈이한테 들었다고 할까? 아냐, 이 상황에서 벗어나겠다고 절친을 팔아먹고 싶진 않다.
난 차도윤 헌터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최대한 태연하게 굴었고, 그럴수록 차도윤 헌터의 미간은 깊게 패며 입술 끝이 말렸다.
“뭐, 그냥 딱 그렇게 생겼잖아요? 아마추어의 야생적인 감?”
“…….”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자 차도윤 헌터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아, 친해져야 하는데 또 할 말은 해야 하는 이 피곤한 성격 때문에.’
“아니, 분위기가 왜 이래! 어쨌든 그 이상한 촉수를 없앴으니 문제 해결 아니에요? 자, 자, 레츠 고!”
지호 언니는 나와 차도윤 헌터의 등을 동시에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솔직히 조금 통쾌한 건 어쩔 수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