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허억!”
순식간에 몸이 붕 뜨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세빈이가 내 허리를 받친 채로 천장에 달린 조명에 매달려 있었고, 한진우 헌터도 행운의 토끼발 위에 엎드린 채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이게 뭔…….’
고개를 내리니 조바심이 세빈이의 그림자 손들에 둘러싸여 꼼짝도 못 하는 것이 보였다.
“바, 방금 뭐였어?!”
“정신계 스킬이야.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랑 한진우 헌터 둘 다 패닉에 빠졌고.”
아까 ‘절망’이라는 스킬이 있던데, 거기에 당했나 보다.
“너라도 안 당해서 다행이다.”
“나야 뭐…….”
세빈이는 뭔가를 말하려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숨기는 게 있나?’
투쾅!!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우리의 발밑에선 여전히 조바심이 세빈이의 그림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조바심은 겨우 그림자를 찢고 나오기가 무섭게 다시 붙잡혔고, 그렇게 둘은 한참을 아웅다웅했다.
“아까 한 번 더 죽였는데 다시 살아나더라. 공략법이 따로 있는 것 같아.”
“아마 본체는 다른 곳에 있을 거야.”
한진우 헌터가 보여 준 괴담에, 새벽에 제1 연습실에서 혼자 춤을 추면 거울 속 귀신이 따라 춘다는 소문이 있다고 했다.
실용음악과 교실에서 튀어나온 스피커 케이블 몬스터, 디자인과 교실이 있는 5층에서 튀어나온 캔버스 몬스터, 그리고 자살한 학생들로 만들어진 보스 몬스터 조바심.
이 던전은 괴담의 내용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 본체가 있는 곳은……?
“4층 제1 연습실.”
“응?”
“제1 연습실 거울에서 귀신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어.”
끼야아아아악!
조바심이 그림자를 물어뜯고 우리를 향해 도약했다.
타앙!
반사적으로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자 조바심의 몸이 아까처럼 터져 나갔다. 파편이 된 몸뚱어리가 다시 꾸물거리며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본체는 거기 있을 거야.”
“일리 있네.”
세빈이가 구겼던 미간을 서서히 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시간 좀 벌어 줘.”
“다치지 말고,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세빈이가 내 허리를 놓아주었다. 강당 바닥에 착지하기 전 세빈의 그림자가 날 받쳐 준 덕분에 무사히 강당 입구까지 다다랐다.
쿵!
강당을 빠져나오자마자 계단을 한 번에 뛰어 내려갔다. 세 사람의 초상과 싸웠던 복도를 지나 4층에 도착해 복도를 쭉 달리며 여기저기를 살폈지만 연습실 팻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하하, 하하! 허어어아아악!!”
“왁 씨, 깜짝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렸다. 계속해서 달려가자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드디어 ‘제1 연습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꾸로 재생되는 것 같은 오르골 소리와 함께 거울 안에 있는 조바심이 나를 반겼다.
거울 앞에는 오르골 박스가 있었는데 발레리나 인형이 가운데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다리로 우아하게 춤을 추던 녀석은 내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두 팔을 들어 올렸다.
타앙!!
새하얀 탄환이 거울 속 조바심의 몸에 정확히 명중했다. 거울이 순식간에 깨지는 것과 동시에 억지로 이어놓은 조바심의 육체가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소름끼치는 오르골 소리도 조바심의 목소리도 아득하게 멀어졌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클리어…한 건가?’
쿵.
그때 갑자기 연습실 구석에 있던 캐비닛이 앞으로 쓰러졌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손이 벌벌 떨렸지만 자아를 들어 캐비닛을 조준했다.
덜컹.
움직였다! 잘못 본 것이길 바랐는데 너무나도 명백하게 움직였다.
‘잠깐, 설마?’
두근.
“윽!”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우웅, 우웅, 우웅.
자아가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고.
덜컹, 덜컹.
캐비닛도 미친 듯이 움직였다. 쓰러진 캐비닛 앞에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밀었다.
키이잉.
캐비닛 입구가 천장을 보자마자 연둣빛 구체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연습실 여기저기를 탱탱볼처럼 튀어다녔다.
구체의 마지막 행선지는 내 손 위였다. 눈이 내려앉듯 빛은 내 손 위로 살포시 올라왔고, 동시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몬스터?”
“어! 아이템인 것 같아요! 여기 이 팔찌!”
한진우 헌터?
아득히 먼 곳에서 한진우 헌터와 세빈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회귀 전의 기억인 것 같다.
“태양을 삼킨 늑대라는데? 일단 가져가 보자.”
이번엔 내 목소리. 지난 시간선에서도 똑같은 멤버였나.
파아앗!
빛이 걷히고 주변 풍경이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빛이 담겼던 손을 바라보자 웬 낡은 실팔찌가 있었다. 붉은 실로 엮어 놓은 팔찌엔 갈색 나무 구슬이 달려 있었고 이따금씩 연둣빛이 감돌았다.
[아이템 획득]
[주인을 잃은 늑대/???]
[특이 사항 : 이름을 불러주자.]
“허억, 헉… 허억.”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켰고 내 손안에 얌전히 놓인 실팔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늑대라고 하지 않았나?’
“지의야! 괜찮아?”
“어, 어!”
그때 세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실팔찌를 인벤토리에 던져 놓고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 쪽으로 뛰어나오자 양손 엄지를 추켜올린 한진우 헌터와 은근하게 웃고 있는 세빈이가 나를 맞이했다.
“거기 있던 조바… 아니, 몬스터는 죽었어?”
“응. 엄청 큰 소리 나면서 바로 사라지더라. 아이템도 얻었어.”
“이거예요!”
“으아악?!”
한진우 헌터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건 웬 손이었다. 자세히 보니 진짜 손은 아니었고 겉 표면이 피부로 되어 있는 장갑이었다. 손가락 모양이 다 다르고 손등에는 꿰맨 것 같은 상처도 있어서 쉽게 낄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장갑을 쥐자 아이템 창이 떴다.
[아이템 획득]
[불안 / 장신구 / S급 / 어둠 속성]
몬스터 이름은 ‘조바심’, 아이템 이름은 ‘불안’. 잘 어울리는 조합이네.
“아무도 관심 없으시면 그냥 협회에 팔게요!”
그러면서 한진우 헌터가 다시 인벤토리에 장갑을 넣어 두었다.
다시 강당으로 올라간 우리는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게이트 앞에 섰다.
“문 열게요.”
“네에~”
차가운 철창을 잡고 쭉 당기자 정겨운 컨테이너 박스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왔구나…….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난데없는 공포 체험과 회귀 전의 기억 때문에 기가 쭉 빨려서 얼른 눕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의 이틀 걸렸네.”
“뭐?!”
세빈이의 말에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확인하니 25일 오전 8시 20분이었다.
확실히 B급 던전보다는 오래 걸린 기분이었는데 하루가 꼬박 지났을 줄이야.
“저 혹시 얼굴 많이 부었어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평소랑 똑같아요.”
한진우 헌터는 핸드폰 카메라로 부지런히 얼굴을 살피며 몇 번이고 세빈에게 확인을 받았다.
“왜 갑자기 신경 쓰시는 거예요?”
“그야 기자들이 밖에 있을 테니까요!”
기자들?
바빠 보이는 한진우 헌터를 뒤로하고 세빈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통 S급 던전 클리어 이후에만 기자들이 오는데 이번 건 처음 생긴 던전이라서 기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또 이 던전 유명했잖아요! 분명 엄청 와있을 거예요!”
연예인의 삶은 역시 힘들어 보이네.
자기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한진우 헌터는 다시 핸드폰을 인벤토리 안에 넣고서 사뭇 비장한 얼굴을 한 채로 문고리를 잡았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셔터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한진우 헌터, 이쪽도 한번 봐주시길 바랍니다!”
“강세빈 헌터, 이번 A급 던전은 정말로 귀신이 만든 건가요?!”
질문들과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마이크를 든 드론 하나가 우리 쪽으로 날아와 세빈이의 손 위에 정확히 마이크를 떨어트렸다.
“강원도 원주 A급 던전은 제일 예술고등학교 관련 괴담을 바탕으로 한 곳이었습니다. 기존의 과거, 신화, 동화 던전과는 차이가 있었기에 추후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누가 대본을 써준 것도 아닌데 세빈이의 입에선 청산유수같이 말이 술술 나왔다. 기자들은 열심히 사진을 찍고 내용을 녹음하며 세빈이의 말을 빠짐없이 담았다.
“보스 몬스터의 물리적인 형체와 실질적인 본체가 별개로 존재한다는 특징이 있었고, 신지의 헌터와 한진우 헌터의 지식 덕분에 쉽게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헌터들을 칭찬하는 말까지 빼놓지 않는 저 완벽함! 던전 클리어 인터뷰의 교과서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카메라 렌즈들이 나를 향했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지금 신지의 헌터 어깨에 있는 그 인형이 획득 아이템인가요!”
“…네?”
인형?
고개를 돌려 왼쪽 어깨를 내려다보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발레리나 모형이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었다. 조잡하게 그려 넣은 이목구비가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고 싸구려 레이스로 만든 로맨틱 튀튀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이거 아까 연습실 오르골박스에 있던 그 인형 아냐?’
이게 왜 지금? 아, 아까까지는 없었는데?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죽 흘러내렸다.
끼기긱.
머릿속이 새하얘질 무렵 갑자기 인형의 목이 돌아가더니 그것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내 입에선 심장 대신 본심이 터져 나왔다.
“아, X발. 깜짝이야,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