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9화 (9/366)
  • 9화

    【자아】

    ‘드디어 만났네, 지의.’

    무슨 상황이지? 분명 확성기 상태였던 자아가 내 실루엣을 하고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우으음…….”

    아, 일단 방에 들어가야겠다.

    아빠의 잠꼬대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자아를 데리고 방으로 달려갔다.

    자아를 이불 위에 앉히고 나도 그 앞에 앉았다.

    “너, 자아 맞지?”

    ‘뭐야, 왜 갑자기 입 밖으로 소리 내? 그냥 속으로 말하면 되잖아.’

    속으로? 그러니까…….

    ‘이렇게 하라고?’

    ‘응. 늘 그래 왔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텁.

    ‘좀 어려졌나? 나이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우붑.”

    자아가 내 얼굴을 잡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시간은 또 어떻게 돌린 거고?’

    ‘그게 내가…….’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또 누구랑 계약이라도 했어?’

    자아는 제법 수다스럽게 말을 쏟아냈고 의사처럼 눈 밑까지 본 후에야 나와 거리를 뒀다.

    ‘잠깐, 근데 너… 왜 이렇게 낯 가려?’

    ‘그야…….’

    우우웅.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윽!”

    자아가 소리를 꽥 지르자 몸 안이 엄청나게 울렸다.

    ‘어쩐지 이상하더라! 그래서 또 창조자랑 손잡으려고 하고!’

    ‘아니, 그…….’

    ‘뭐!’

    ‘나한테 말할 기회를 좀 주면 안 될까?’

    ‘아.’

    그제야 자아가 조용해졌다.

    머리털 나고 멀미해 본 적 없는데 이런 느낌이구나.

    조용히 입을 다문 자아를 향해 말했다.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는 어쩌다 던전에 떨어져서 각성했어. 세상이 망해서 회귀했다는 사실은 각성하면서 알았고. 그게 다야.’

    ‘그럼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녹두도?’

    ‘그건 또 뭔데…….’

    ‘허어어어어.’

    자아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녹두…….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긴 한데.

    한참 괴로워하던 자아가 이내 정신을 차렸는지 자세를 고쳐 앉곤 비장하게 말을 뱉었다.

    ‘일단 오케이. 핵심부터 말할게.’

    ‘알겠어.’

    자아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창조자가 X새끼야.’

    ‘뭐, 뭐?’

    ‘그 새끼가 종말의 원흉이라고.’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7%]

    자아의 말이 사실인 듯 내 기억과 관련된 사명이 반응했다.

    ‘그럼 역시 내 사명이 제대로 알려 준 게 맞구나.’

    창조자와 손을 잡으려 할 때 ‘세상을 구원하는 자’와 ‘카르마를 밟는 자’가 동시에 반응했다. 내가 창조자의 사도가 되는 행위가 세상을 지키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하마터면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했네.

    ‘종말 세 줄 요약 간다.’

    내 무기라서 그런가, 완전 한국인이네.

    ‘하나, 지의 너가 창조자 새끼랑 사도 계약 맺고 그 새끼 파편을 아주 소~중히 보호해 줌.’

    ‘그리고?’

    ‘둘, 근데 알고 보니 그 파편이 종말의 재료였고 창조자가 그걸 모아서 한 번에 펑! 터트림.’

    등골이 서늘해졌다.

    ‘셋, 지구 전체에 지옥도(地獄道) 열리고 개판됨. 끝!’

    ‘지옥도는 또 뭔데. 던전이랑 다른 거야?’

    ‘그동안 소멸시켰던 모든 던전을 모아 놓은 종합 선물세트.’

    ‘어우.’

    ‘근데 지금 뭔가 중요한 게 빠진 것 같은데…….’

    자아의 말을 조용히 곱씹는데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배신자!’

    ‘뭐?’

    ‘배신자가 있다고 했어. 그거 누군지 알아?’

    자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배신자가 있다고?’

    ‘너도 그건 기억 못 하는 거야?’

    ‘그야…….’

    갑자기 풀이 죽은 자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전투 막판에 부서졌으니까…….’

    ‘아…….’

    ‘…내가 기억 못 하는 걸 보면 내가 파괴된 다음에 정체를 드러냈나 보네.’

    다행히 자아는 금방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뭐, 서로 상황은 대충 파악했고.’

    텁.

    자아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파트너. 이번엔 잘해 보자고.’

    ‘응!’

    나도 손에 힘을 주었다. 나의 내면으로 만든 온전한 내 편, 회귀 전의 기억이 있는 내 편이 생겼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진동이 불안했던 마음을 조금 진정시켰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 파트너를 뜯어 볼까? 상태창 좀 켜줘.’

    ‘너한테 보여?’

    ‘야, 내 이름이 거기 안에 있는데 안 보이겠냐, 그럼.’

    은근 까칠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자아의 잔소리가 늘기 전에 얼른 상태창을 켜주었다.

    ‘SS급? 뭐야, 이거.’

    ‘어? 나 원래 등급 뭐였는데?’

    ‘S급. 고유 스킬은 똑같긴 한데…….’

    파지직.

    자아가 손을 뻗어 상태창 밑에 있던 패시브 스킬을 가리켰다.

    ‘이게 초면이네.’

    [연계 패시브 스킬]

    [‘말이 씨가 된다’ : 말로 상대방을 동요시켰을 때 상대방에게 강력한 암시를 담은 ‘말의 씨앗’을 심는다. 상대방이 시전자에게 ‘감화’되면 ‘말의 씨앗’이 개화하고 시전자의 말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개화한 ‘말의 씨앗’만큼 고유 스킬의 파괴력이 증가한다.]

    ‘아직 써본 적 없어?’

    ‘응.’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다면… 말로 누군가를 움직이고 그 사람이 나한테 흔들리면, 그 사람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유 스킬 파괴력 상승은 덤이고.

    잘 써먹으면 진짜 괜찮은 스킬이긴 한데, 솔직히 좀 무섭다. 내 말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니.

    ‘나중 되면 알겠지. 일단 패스.’

    자아는 시원하게 넘기곤 다시 상태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사명’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또 뭐야.’

    ‘사명. 뭔가 미션 같더라.’

    자아가 사명을 주르륵 펼치더니 하나씩 읽으며 중얼거렸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 카르마를 밟는 자…….’

    ‘가끔 돌발 지령 같은 것도 튀어나와. 보상도 주고.’

    ‘…이것만 보면 꼭 너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회귀한 것 같네.’

    자아의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돌려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달성도 : 1%]

    [보상 : 구원자의 소원]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달성도 : 7%]

    [보상 : ???]

    [살신성인]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지켜라.]

    [*살신성인의 사명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 대신 공격을 받았을 때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달성도 : 74%]

    [보상 : ???]

    [사상 최강의 무기를 다루는 자]

    [무기를 길들여 능력을 해방하라.]

    [달성도 : 0%]

    [보상 : ???]

    [늑대의 동반자]

    [동반자를 성장시켜라.]

    [달성도 : 0%]

    [보상 : ???]

    ‘이 사명 자체도 회귀 때문에 생긴 것 같은데, 세상을 구원하는 자와 카르마를 밟는 자는 특히나 더 지난 시간선과 관계가 있어 보여.’

    ‘응. 카르마를 밟는 자는 내가 익숙함을 느낄 때마다 달성도가 올라가더라고.’

    ‘역시. 저 달성도를 전부 올리면 네 기억을 전부 되찾을 것 같네.’

    자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명도 읽어갔다.

    ‘엥. 살신성인, 얘는 왜 이렇게 달성도가 높아?’

    ‘학교 다닐 때 애들 구해 주던 것 때문에 그런가?’

    ‘그런가 보네. 이번 시간선의 너도 어지간히 설쳤구나.’

    정곡을 찔렸다.

    ‘사상 최강의 무기? 아, 이거 좀 쑥스럽군.’

    표정이 보이진 않지만 자아는 키득대며 괜히 제 목을 쓸었다.

    은근 웃긴 애네, 얘.

    ‘늑대의 동반……. 그래! 녹두!’

    ‘녹두?’

    ‘네 소환수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이템이기도 하고.’

    나한테 소환수까지 있었구나.

    사명으로까지 나타난 걸 보면 내게 굉장히 소중한 존재였던 것 같다.

    ‘녹두는 어디 있어?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어?’

    ‘그건 아무도 몰라. 녹두는 자기 주인을 직접 선택하는 존재라서 말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니. 왠지 모르게 입이 썼다.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많은 정보가 들어와 뒤통수가 아려왔지만, 그래도 앞으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대충 그림은 그려졌다.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가 반응하는 대로 행동해서 여기저기 흩어진 내 기억을 모으고, 지난 시간선의 실수를 바로잡으면 된다.

    ‘내가 지난번에 창조자의 사도였다고 했지?’

    ‘응.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사도였어.’

    ‘다른 사도들도 기억하고 있어?’

    ‘이명(異名)이랑 어디에 사는지밖에 몰라. 창조자는 자기 사도들끼리 모이는 걸 극도로 꺼렸거든.’

    배신할까 봐 그런가? 하긴, 내가 지금 사도들을 찾아내서 만나려는 이유도 창조자가 X새끼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니까.

    ‘그래도 일단 알려줘 봐.’

    ‘오케이. 영국의 ■■, 네팔의 ■■■…….’

    삐이이이이.

    “뭐?”

    끔찍한 이명이 자아의 말을 집어삼켰다. 영국, 네팔, 미국… 소름 끼치는 소리 사이로 나라 이름 몇 개만 겨우 들릴 뿐이었다.

    [■■째 ■■■의 ■■, ■의 ■이 해당 ■억을 삭■합니■.]

    “컥!”

    누군가 칼로 찌른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뭐야, 이게! 너 괜찮아?’

    “하아… 으, 응.”

    드디어 자아의 말이 귀에 꽂혔다.

    ‘뭔가가 이 기억을 전달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어.’

    ‘…창조자?’

    ‘아냐, 절대자 놈들한텐 그럴 능력 없어. 그럴 수 있었다면 내가 지금 말하는 것도 막았겠지.’

    자아는 내 눈앞에 깜박이는 글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파사삭.

    글자는 이내 먼지처럼 사라졌고 우리 둘 사이엔 불편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일단 이 부분은 내가 알아볼게. 넌 사명대로 행동하고 전투 감각부터 되찾아.’

    ‘…알았어.’

    ‘너무 낙담하진 말고. 네 기억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툭, 툭.

    자아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지지직.

    ‘응?’

    그때 자아의 몸이 노이즈가 낀 것처럼 흔들렸다.

    ‘아, 무리했네. 사실 형체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니거든.’

    자아는 지직거리는 자신의 손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 잠깐. 뭔가 오는데.’

    ‘뭐가?’

    키이이잉.

    자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상태창이 반응했다.

    <사명 해금>

    [사령탑]

    [‘말의 씨앗’을 개화시켜 동료로 만들어라.]

    [달성도 : 0%]

    [보상 : ???]

    사명이 또 열렸다.

    ‘그치, 동료 중요하지. 지옥도는 혼자서는 죽어도 해결 못 하는 재앙이니까.’

    자아가 거들었다. 배신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동료를 만드는 게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배신자까지 동료로 만들어서 종말의 가능성을 대폭 낮출 수도 있다.

    ‘한번 해볼게.’

    ‘그래. 우리 이번엔 절대 실패하지 말자.’

    파아앗.

    자아는 그 말과 함께 다시 내 귀에 붙었고, 웅웅거리며 나를 응원했다.

    ‘그래, 할 수 있어.’

    이번엔 완벽하게 성공해서 지유를 살려 내겠어.

    내일 있을 기자 회견을 위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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