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8화 (8/366)
  • 8화

    【개막(開幕)】

    쿵.

    “악! 아 씨, 아파 죽겠네.”

    엉덩방아를 제대로 찧었다. 욱신거리는 꼬리뼈를 손으로 만지며 몸을 일으켰고, 주위부터 살폈다. 새파란 바다 위로 하얀 파도가 잔잔하게 치고 그 뒤로는 예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분명 던전인 것 같긴 한데…….’

    처음으로 내가 떨어졌던 그 던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파라솔 몇 개만 있으면 그냥 사이판이나 하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스윽.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자아를 꽉 잡고 바닷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부드러운 모래 위로 내 발자국이 찍혔다.

    쏴아아아.

    지면에 닿아 힘을 잃은 파도가 흰 거품만을 남기며 들어가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흰 거품들이 모래의 경계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보다도 더 크게 형태를 갖추었다.

    “뭐야……?!”

    타앙!

    재빨리 자아로 공격했지만 거품은 내 목소리를 그대로 삼킬 뿐 몸집을 키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커다란 거품 덩어리에서 네 개의 짧은 다리가 나왔고 긴 목과 꼬리가 솟아났다. 그 형체가 도마뱀을 닮았다고 생각하자마자 거품이 눈부신 빛을 뿜어냈다.

    “만나서 반가워.”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뜨자 그 앞에 나타난 건 보랏빛 도마뱀이었다. 아니, 도마뱀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는 보랏빛 도마뱀의 형체였다.

    “어… 누구?”

    “이 세계의 창조자.”

    “창조자?”

    쿵.

    “윽!”

    갑자기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날카로운 고통에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다리에 힘을 줘 쓰러질 뻔한 걸 참았다.

    뭐지? 분명 처음 보는 놈인데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이 익숙함이 굉장히 불쾌하다는 것뿐.

    도마뱀은 노란 눈을 빛내며 나를 보고 있었고 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신이라는 거지?”

    “응. 나는 절대자라고 불러어. 신은 별로 안 멋있잖아!”

    도마뱀, 아니 창조자가 철없는 소리를 하며 까르륵 웃었다.

    “신이면…….”

    “절대자.”

    “아이 씨, 그래. 절대자면 너가 던전이랑 몬스터도 다 만든 거야?”

    창조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이 세상이 생기면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들이야. 절대자들도 손댈 수 없엉~”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세상은 망할 팔자였나 보네.”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아, 말실수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은 적막함에 숨을 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이 망한다고?”

    가로로 죽 찢어진 창조자의 입에서 또박또박 한 글자씩 튀어나와 문장을 만들었다. 아까랑 다를 것 없는 모습인데 본능적인 공포가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이럴 땐 모르는 척하는 게 최고다.’

    난 무심하게 모래사장에 주저앉아 발끝으로 파도를 밟았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각성자 없었으면 몬스터 때문에 세상 망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아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숨 막히는 적막은 창조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깨졌고 일정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나저나 날 여기 왜 데려온 거야?”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어어~”

    창조자가 짧은 다리를 뻗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축축한 발바닥이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약간 간지러울 뿐이었다.

    “우와앙. 진짜 SS급 맞네.”

    “혹시 다른 SS급 본 적 없어?”

    “없어~ 지의 네가 처음이야아.”

    창조자는 내 머리에서 손을 떼고 그대로 똬리를 틀어 내 앞에 엎드려 누웠다.

    “스킬에 대한 이해가 저언혀 없어 보여서어 안쓰러워서 데려왔지이.”

    “내가?”

    “응~”

    ‘이렇게 갑자기 멕인다고?’

    훅 들어오는 묵직한 팩트에 괜스레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냥 목소리로 공격하는 스킬 아니야? 나 비명 지르다가 각성했는데.”

    “목소리로 공격하는 건 맞지~ 근데 몬스터는 네 목소리 듣고 죽는 게 아니야아…….”

    쏴아아.

    모래사장이 이리저리 뭉치며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둥그런 지구가 되었다.

    “네 스킬은 상대의 균형을 깨트리는 스킬이야앙.”

    “균형?”

    “우응. 갑자기 네 몸의 모든 혈관이 배로 쏠리고, 내장기관들은 발가락에 붙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아?”

    “어우, 토 쏠려. 죽겠지.”

    창조자가 내게 모래 지구를 내밀었다.

    ‘공격해 보라는 건가.’

    자아를 꺼내는 대신 소리를 냅다 질렀고, 새하얀 파동이 모래 지구를 덮쳤다. 지구에 붙어있던 대륙들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더니 그대로 반 토막 났다.

    “균형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생명체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터져서 죽어버려~”

    “너 새삼 아무렇지 않게 무서운 소리 잘한다.”

    “지의 스킬이 무서운 걸 어떡해~”

    창조자는 벌러덩 누운 채 모래사장 위로 몸을 비비더니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트은 내가 너한테 스킬이 어떤지를 알려주는 건 지의한테 부탁이 있어서야아~”

    “무슨 부탁?”

    “지의 네 말대로 이 세상은 이대로 가다간 망하거드은~”

    ‘진짜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아예 쐐기를 박아버리니 약간 복잡한 마음이었다.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창조자가 눈을 끔벅거렸다.

    “안 놀라네에.”

    “마, 망할 팔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데?”

    “내 사도가 되어서 세상의 종말 좀 막아 주라아~”

    ‘또 이렇게 선택의 순간이 오는구나.’

    절대자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황에서 선택을 해야 하다니, 최악이다. 난 일단 대답을 보류하고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사도가 되면 뭘 하는데?”

    “종말을 막는 부적을 보호하는 일~”

    “부적?”

    “우웅.”

    창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다시 일으켰다. 거대한 그림자가 내 위로 걸렸다.

    “그것만 보호하면 종말을 막을 수 있어?”

    “100% 장담은 못해애.”

    느낌은 쎄한데, 정말 말 그대로 느낌일 뿐이라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사도가 되면 내가 좋은 거 줄게에~”

    “좋은 거?”

    “우음…….”

    푸쉬이이.

    “콜록, 콜록!”

    그때 보라색 연기가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톡 쏘는 꽃향기가 코를 찔렀고 덕분에 보기 좋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주위를 둘러보자 창조자는 온데간데없고 ‘권능’이라는 보라색 글자만 선명하게 떠있었다.

    [창조자의 권능]

    [복제품]

    [진리의 눈동자]

    [이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

    권능?

    마지막 설명을 읽기가 무섭게 연기가 걷혔고 다시 깨끗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바다에서는 아까처럼 잔잔한 파도가 쳤고 창조자는 모래사장에 완전히 누운 채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냥 맛보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볼래?”

    엄지와 검지를 붙여 작은 원을 만들고 눈앞에 가져다 대자 창조자의 주변으로 떠다니는 보라색 글자가 보였다.

    [짱~멋진 이세상의 절대자~]

    “…이게 권능이야?”

    “웅~ 그것만 있으면 넌 던전, 몬스터, 다른 헌터들의 스킬까지 볼 수 있다구~”

    “진짜?”

    “근데 어디까지나 그건 복제품이니까 모든 걸 다 뜯어볼 순 없어~”

    이건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다. 복제품이라곤 했지만 이 정도면 정보를 모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때 창조자가 머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지의 네가 사도가 된다면 소원을 들어줄게에. 어때애?”

    “소원?”

    세상을 구하기 전에 지유를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건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 근데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건 안 돼애.”

    “…그렇구나.”

    갑자기 머리가 차게 식었다.

    어떻게든 이 세상을 구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어떡할래~? 난 지의가 꼬옥 사도가 돼줬으면 좋겠어어~”

    사도가 돼서 뽑아먹을 거 다 뽑아먹고,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뒤통수 쳐도 될 것 같긴 하다. 일단 소원도 들어준다고 했으니 기본적으로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고.

    창조자가 나를 향해 그 짤막하고 깜찍한 손을 내밀었다.

    절대자와 손을 잡고 종말의 비밀을 파헤치느냐, 아니면 내 방식대로 가느냐.

    “팔 떨어지겠써어~ 얼른 결정해 줘어~”

    ‘그래, 지금은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쪽과 함께하는 편이 좋겠지.’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린 후 창조자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파아앗.

    <사명>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해당 행위는 사명에 크게 위배됩니다.]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해당 행위는 사명에 크게 위배됩니다.]

    ‘뭐야……?’

    창조자의 손을 잡기 직전 갑자기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지금까지 돌발 지령이나 달성도가 상승했다는 문구만 나왔을 뿐, 이런 식으로 사명에 크게 위배된다고 뜬 적은 없었다.

    ‘설마 창조자가 종말의…….’

    타앙!!

    “어?”

    생각에 잠깐 잠기기 무섭게 익숙한 파열음이 귀를 찢더니 새하얀 빛줄기가 창조자의 손을 반으로 토막 냈다.

    투우우웅.

    엄청난 진동과 함께 공간이 일렁거렸고, 이내 유리창이 깨지듯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보니 빛을 내뿜는 구체 안에 익숙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자, 자아?!”

    귀를 더듬어보니 얌전히 박혀 있어야 할 피어싱이 없었다. 자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 공간이 전부 무너지고 나서야 사그라들었고, 자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내 귀에 착 붙었다.

    쏴아아아.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부드러운 모래사장. 자아가 산산조각 냈던 공간은 다시 원상 복구가 된 상태였다.

    “…뭐지이.”

    창조자는 반으로 토막 난 제 팔목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 제대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건 내 사명과 ‘자아’가 눈앞의 절대자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뿐.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에~”

    창조자는 다시 모래사장에 배를 대고 엎드리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오늘은 돌려보내 줄게에~ 혹시라도 마음이 바뀌면 꼭 나한테 얘기해 줘야 돼애?”

    “그, 그래.”

    떨떠름하게 대화를 끝내자 모래사장 속으로 발이 쑥 들어갔고, 잠에 빠지듯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쿵.

    “아오 씨!”

    진짜로 꼬리뼈에 멍들겠다. 또다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내 방으로 돌아왔다.

    ‘진짜 우리 집 맞겠지?’

    현실감이 전혀 없어 방문을 박차고 나가자 안방에서 엄마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아…….”

    낡은 벽지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끼워 넣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도대체 자아는 아까 왜 그랬던 걸까.’

    우웅.

    자아를 꺼내 손에 쥐고 잠시 눈을 감았다. 손에 착 감기는 촉감이, 꼭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는 것 같은…….

    “어, 어어?!”

    잡고 있는 것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새하얀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고 고개를 들자 나와 똑같은 형체의 새하얀 실루엣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 지의.’

    * * *

    “이러면 장기말이 부족한데에…….”

    창조자가 모래사장에 잘린 팔목을 비비자 팔이 다시 자라났다. 새로 얻은 팔에 적응이라도 하듯 그의 앙증맞은 발가락이 모래사장 위에서 한참을 꼼지락거렸다.

    그는 퍽 당황스러웠다. 어리숙한 SS급을 잘 키워 자신의 말로 쓰려던 계획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창조자는 목을 긁적이며 아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왜 저 애한테는 ‘매듭’이 저렇게나 많은 거지이…….”

    쩌적.

    “꼭 끝을 여러 번 보고 온 사람처러엄~?”

    창조자가 눈을 퍼뜩 뜨자 그의 몸에 금이 갔다. 평화롭던 해변이 순식간에 새카만 어둠으로 물든다. 새하얗게 부서지던 파도도 거세지고, 이내 해일이 되어 모래사장 전체를 집어삼킨다.

    예쁜 단풍빛을 띠던 하늘이 불길처럼 시뻘겋게 물들고 순식간에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참혹한 풍경이 되었다.

    도마뱀의 형체도 해일에 휩쓸렸다. 보라색 연기만이 그 재앙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피어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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