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급 비명헌터-3화 (3/366)
  • 3화

    “으으…….”

    조심스럽게 눈을 떠 내 몸부터 살폈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바닥이 조금 까진 걸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멀쩡했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분명 열차에서 내렸고 집으로 가고 있었지. 거의 다 왔을 때쯤 갑자기 길바닥에 대리석 문이 생긴 것까지는 기억난다.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돌과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바닥을 굴러다니고, 나무나 건물 하나 없는 폐허의 한가운데였다. 인기척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지나가지 않았다. 가끔 들려오는 바람소리와 내 배 속에서 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 30미터쯤 걷고 나니 머릿속으로 금방 결론이 내려졌다.

    “…던전인 것 같은데.”

    등골이 서늘해졌다. 서둘러 핸드폰을 켜자 ‘서비스 제한 구역’이라는 글자와 함께 긴급 전화 표시만 화면에 떠있었다.

    우우우우.

    핸드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을 즈음 멀리서 동물 같은 것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망했다, 정말로 던전이야.’

    던전은 그 지역의 어느 한순간의 모습, 신화, 혹은 전설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했다.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발생한 던전에서는 고구려의 모습이 보일 수도 있다는 거고, 그리스에서 열린 던전은 그리스 신화의 한 장면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우우.

    그 순간 아까 들렸던 짐승의 울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일단 몸부터 숨기자.’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 뒤에 잽싸게 숨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조금이나마 조용해질까 싶어 숨을 꾹 참으면서 고개만 살짝 빼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힉.”

    용이 있었다. 먹으로 그린 것 같은 커다란 용이 하늘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망할, 신화 던전이네.’

    신화 던전은 주로 상급이다. 지금 내가 떨어진 이곳이 A급 이상의 상급 헌터들이 오는 던전이라는 뜻이다.

    속보. S급 헌터 셀레나 찰스디어, 조지아 A급 던전에서 사망.

    A급 던전의 난이도가 점점 상승하는 것으로 밝혀져. 전문가들 ‘S급 헌터 혼자서 공략할 확률 0에 수렴해’ 헌터계 발칵.

    인터넷 뉴스 제목 몇 개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원초적인 공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쿵.

    그때, 용과 눈이 마주쳤다.

    ‘도대체 헌터들은 왜 안 오는 거야!’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바로 알림 문자 날아오고, 헌터들이 출동하는 거 아니었냐고!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은 심정이지만 난 이 커다란 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용은 아까처럼 울지 않고 조용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바위틈으로 본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후우웅.

    기묘한 대치 상황이 이어지는 와중에 또다시 용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입을 쩍 벌렸다. 검은 연기가 용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이내 하늘에 떠있던 달까지 삼켜졌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용이 날 죽일 거라는 걸.

    쿠과과광!!

    용이 아까 삼켰던 연기를 뱉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커다란 굉음이 귀에 파고들어 한동안 이명이 이어졌다.

    “허억, 허억, 이게… 뭐야.”

    아까까지 내가 서있었던 곳에 검은 액체가 부글부글 끓었고 매캐한 연기 냄새가 피어올랐다. 그것에 대해 감상을 느낄 틈은 없었다. 용이 내 머리 위로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빨리 몸을 숙여 충돌은 피했지만 바람의 힘을 차마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콜록, 큭!”

    우우우.

    연기와 모래가 목으로 들어가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듯했고, 또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용 때문에 바닥에 마냥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땅이 뒤흔들려 다시 주저앉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서서히 금이 가고 있었다.

    “허억, 흑, 크윽!”

    앞만 보고 달렸다. 중간에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지만 그런 사소한 상처는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던전 출구가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거야. 일단 탈출만 하면, 탈출만 하면……!’

    우우우.

    내 위로 검은 그림자가 걸리더니 이내 굉음을 내며 내 바로 앞에 검은 액체가 떨어졌다.

    “아아악!!”

    가까스로 옆으로 피했지만 액체가 종아리 부근에 튀었고, 동시에 날카로운 고통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리를 보니 이미 처참히 녹아 가고 있었다.

    “우욱.”

    적나라한 상처의 흔적에 토가 쏠렸다. 팔로 겨우 기어가며 용과 거리를 벌렸지만, 뭘 해도 용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정말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

    엄마와 아빠 얼굴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눈물로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와중에 병실 침대에 누워 있던 지유의 모습이 떠올랐다.

    ‘죽음을 기다리던 지유의 감정도 이랬을까?’

    새카만 절망이 내 목을 조르며 나를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갔다.

    용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고 또다시 검은 연기들이 그 목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언니는 오래오래 300살까지 살았으면 좋겠어.

    내 생일날 지유가 썼던 편지가 생각났다. 누구보다 생(生)을 갈구하던 우리 지유가, 내게 했던 부탁이었다.

    쿵, 쿵.

    심장이 울린다.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죽음을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다.

    내겐 분명히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다.

    “난 여기서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각성자 신지의]

    [빛 속성 개방]

    [고유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 개방]

    [SS급 공격계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

    [‘호령여산(號令如山)’ : 자신의 목소리로 상대를 공격한다. 시전자가 아군으로 인식한 존재에게는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연계 패시브 스킬 ‘말이 씨가 된다’ 개방]

    [‘말이 씨가 된다’ : 말로 상대방을 동요시켰을 때 상대방에게 강력한 암시를 담은 ‘말의 씨앗’을 심는다.]

    [씨앗을 심은 대상이 시전자에게 ‘감화’되면 ‘말의 씨앗’이 개화하고 시전자의 말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

    [개화한 ‘말의 씨앗’만큼 시전자와 씨앗을 심은 대상의 고유 스킬의 파괴력이 증가한다.]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온 세상의 모든 빛이 이곳에 모여 내 온몸을 집어삼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이 서서히 이 풍경에 익어가자 그제야 푸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SS급 공격계 스킬? 이게 대체…….”

    두근, 두근.

    속이 울렁거렸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데.’

    각성자, 고유 스킬, 속성, 나와 전혀 상관없던 글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이 장면이 낯설지 않았다. 누군가의 기억이 덮어씌워지는 것처럼 누군가 내 뇌를 주무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명 해금>

    [세상을 구원하는 자]

    [세상을 종말로부터 지켜내라.]

    [보상 : 구원자의 소원]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보상 : ???]

    [살신성인]

    [자신을 희생해 다른 사람을 지켜라.]

    [*살신성인의 사명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 대신 공격을 받았을 때 사망하지 않는다. 단, 고통은 느껴진다.]

    [보상 : ???]

    ‘카르마를……. 뭐?’

    끝까지 읽기도 전에 새로운 글자가 덮였다.

    [돌발 지령이 도착했습니다.]

    [지령 : SS급으로 각성]

    [보상 : 지난 시간선의 마지막 모습]

    [돌발 지령이 수행되었습니다.]

    [보상 : 지난 시간선의 마지막 모습]

    “아아악!!”

    갑자기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드리자 어떤 영상이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폐허가 된 도시,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그 모든 아수라장의 한복판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는…….

    ‘나’.

    ‘뭐야. 이게 뭐야, 도대체.’

    ‘나’의 몸은 함부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부서져 있었고,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끈적하게 굳어 아스팔트 위에 눌어붙어 있었다. 거부감이 들어 토가 쏠렸다.

    그때, ‘나’가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야, 이번엔 실수하지 말고 이 세상의 종말을 막아. 그리고 배신자는……!”

    “잠깐! 뭐라고?!”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기억을 되찾으며 지난 시간선의 업을 청산하라.]

    [달성도 상승]

    [달성도 : 1%]

    영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온몸의 고통도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바닥을 지탱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나 각성창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각성, 사명, 돌발 지령……. 따지고 싶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일단 몇 가지는 확실했다.

    ‘이 세상은 배신자 때문에 이미 한 번 망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회귀해서 두 번째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근데 가장 큰 문제는 지난 삶의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돌발 지령이 도착했습니다.]

    [비명의 구원자]

    [지령 : ‘호령여산(號令如山)’으로 몬스터 처치]

    [보상 :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소폭 상승]

    일단은 이 지령인지 뭔지 하는 걸 따르는 수밖에.

    ‘상태창.’

    왠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상태창을 열어 내 스킬을 살폈다.

    [SS급 공격계 스킬 ‘호령여산(號令如山)’]

    [‘호령여산(號令如山)’ : 자신의 목소리로 상대를 공격한다. 시전자가 아군으로 인식한 존재에게는 영향이 미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소리를 지르면 저 용을 공격할 수 있다는 거지?

    쿠구궁.

    지축이 울리는 동시에 글씨는 사라졌고 내 주변은 다시 잿빛 폐허로 바뀌었다. 나를 죽이려던 그 용을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걸렸다.

    콰과광!!

    “아오 씨, 진짜!”

    옆으로 굴러 녀석의 검은 액체를 피하고 금방 자세를 고쳐 잡았다.

    ‘뭐가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죽을 순 없어.’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쥔 채 눈으로는 용을 좇았다. 검은 용이 나를 향해 입을 쩍 벌리자마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사라져!!”

    퍼억.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크게 소리를 지르자 새하얀 파동이 용을 향해 벼락처럼 뻗어 나갔다. 파동은 순식간에 용의 몸을 관통했고, 용의 형체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퍼버버벙!!

    이내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몸에서 쏟아져 나온 검은 액체가 땅을 적셔갔다. 액체가 닿은 곳은 염산이 닿은 것처럼 부글부글 끓었고, 작은 돌 하나가 들어가자마자 완전히 녹아버렸다.

    [돌발 지령이 수행되었습니다.]

    [비명의 구원자]

    [보상 :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소폭 상승]

    <사명>

    [카르마를 밟는 자]

    [달성도 상승]

    [달성도 : 2%]

    “허억, 헉, 하아아…….”

    ‘토할 것 같아.’

    극도의 긴장 상태가 풀려서일까, 끔찍한 이명과 함께 의식이 멀어졌고 그대로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 * *

    “방공호, 개방.”

    지의를 집어삼킨 새빨간 불길이 점점 크기를 키우더니 이내 정육면체의 큐브 형태가 되었다. 큐브는 두려울 정도로 활활 타고 있었고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쾅!!

    하늘에서 온몸에 불을 두른 붉은 머리의 여자가 운석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파괴적인 소리에 비해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여자는 몸 주변에 피어오른 불을 손으로 툭툭 쳐내며 큐브 안으로 들어가 기절한 지의 앞에 쪼그려 앉아 몸과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큰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대로 안아 들었다.

    파스스스.

    그가 큐브에서 나오자마자 불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새하얀 연기만 남긴 채 사라졌다.

    “…터.”

    지의의 웅얼거림에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최민 헌…터.”

    “허.”

    여자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눈에 띄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 어린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처음 보는 이 여자가 익숙하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이 여자가……?’

    그는 지의와 자신의 상태창을 번갈아 보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쾅!!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는 걸 뒤로한 채 여자는 공중을 향해 날아가 둥둥 떠있는 대리석 문을 발로 찼고 곧장 밖으로 몸을 날렸다. 폐허의 하늘에는 미처 꺼지지 못한 불꽃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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