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5)
  • 이승진과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진시우에게 전화가 와서 짧게 서로 안부만 묻고 전화를 끊다가, 아까 태성이녀석에게 온 문자를 다시 읽어보았다.

    태산이…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그래, 솔직한 이야기가 이제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일에 치이고, 머릿속을 정리한다고, 태산이를 만난 것은 몇 주가 지나서였다.

    태산이는 모자에, 검은색 박스티,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카페 맨 구석에 머리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아도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왜인지 측은해서 손을 뻗어 녀석의 모자 사이에 나와 있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내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움찔 움찔 반응하던 산이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야위었다.

    태성이 말로는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에다가 밖에도 도통 나가지 않는다고…

    개다가 이제 종강도 한 모양이라, 더더욱 집에 박혀 있어서 태성이 역시 태산이가 걱정되어 밖을 나가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이 정도면 걱정할만하다.

    정말 곧 쓰러질 것 같이…

    곧 울어 버릴 것 같이…

    내가 지금껏 이 아이를 만나서,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아니, 아마 없었을 것이다.

    이 아이는 항상 반짝 반짝 빛이 나고, 늘 행복하게 웃고, 늘 씩씩했으니까.

    그리고 순수했으니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까지 순수해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늘 좋았다.

    그래, 정화되는 기분…

    언제고 산이는 나 때문에 이 세상이 달라 보인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그와 반대란다 태산아…

    오히려 내가 너로 인해서 세상을 다르게 보고 있을지도 몰라.

    그나마 내가 썩지 않은 이유지

    하지만, 그 말은 안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너에게 괜한 기대를 심어주면 안되니까.

    “밥…먹었어? 왜 이렇게 야위었어.…?”

    살살 달래면서 내가 먼저 입을 여니 태산이 녀석이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도 입술을 꽉 깨문다.

    “운동 열심히 해서 근육 생겼다고 하더니…근육 다 사라졌겠다.”

    웃자고 한 말이고, 그리고 태산이 녀석이 발끈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지만 녀석은 오히려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오늘따라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

    “산아…”

    “주혁이 형…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먼저 밥부터 먹자. 네가 이런 모습이니까 가슴이 아파, 속상하다고”

    “아니요. 안 먹어도 되요. 하고 싶은 말부터 하세요.…각오…하고 있으니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테이블 밑으로 손을 넣어 주먹을 꽉 쥐었다.

    말을 쉽사리 꺼낼 수가 없다.

    내가 할 이야기 때문에 얼마나 이 아이가 아파할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힘이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질질 끄는 것도 힘들다.

    내가 아니라, 태산이가…

    이 아이를 위해서도…

    “네가…아프고, 밥 안 먹고, 하면 가슴이 아파…속상해, 눈물 날 정도로. 분명 네 형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너를 소중한…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동생…

    그래, 태산이는 나에게 소중한 동생 같은 존재이다.

    나와 한 핏줄인 사촌동생보다 더더욱 소중한 동생…

    현재만 해도, 난 이 아이가 야윈 모습을 보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아프지만,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 아닌, 동생으로서의 연민이었다.

    그 차이는 종이 한 장 같겠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이 아이를 연인으로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각오…했어요.”

    “태산아…”

    “형하고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생각했어요. 형이 단번에 대답하지 못한 것은 나를 그쪽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다는 거라고…그래서 계속…아팠어요. 그래서…그래서…아마 오늘 형에게 그 어떤 소리를 들어도 이번에 아팠던 것만큼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흐윽…아파…아프다구요. 정말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아”

    태산이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목소리를 죽여 가며 나에게 외쳤다.

    “사랑한단 말이야. 왜 난 안 돼? 왜…처음 봤을 때부터 당신만 봐왔는데…흐읍…형만 봐왔는데…”

    “넌…나에게 아까워…”

    “그런 입에 발린 말은 필요 없어!!”

    아니야, 태산아

    아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너는 너무 나에게 아깝다.

    “분명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너를 좋아해주고 그리고 너를 사랑 할 거야. 너는…”

    “그런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뭐해? 나는 형이 좋은데, 흑…나는 형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있는데, 어째서 형은…형은…흑…흐아악”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지 태산이가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다행히 카페에 시끄러운 음악이 나오고 있었고, 우리는 구석에 자리 잡은지라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채고 있었지만, 난 혹여나 누군가가 산이의 이런 모습을 볼까 걱정되어 자리에서 일어나 산이의 옆 자리에 앉아서 녀석의 등을 쓸어주었다.

    “형은 이기적이야. 자기만 알아.”

    “응…”

    “아파…아파요 형…”

    “미안…미안해”

    “사랑해요.”

    “응…”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지주혁…”

    산이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맞닿아왔다.

    녀석의 눈물로 인해 젖어버린 그 입술이 떨려왔고, 그 떨림은 나에게 전해졌다.

    잠시 잠깐의 스침 뒤, 녀석은 내 품에서 벗어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을 닦고, 무언가 결심 한 듯,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연락 안할 거예요.”

    “…산아 그건”

    “형 잊을 때까지 연락 안 해. 형 말대로 나에게 형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연락 안 할 거야.”

    그럼 내가 너무 많이 섭섭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그건 결국 내 욕심이니까 말이야.

    “언젠가는 연락 할 거지?”

    “……내가 형을 언젠가 잊으면 그땐 연락하겠지.”

    “산아”

    “갈게요.”

    이걸로 두 번째구나

    나보다 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 난 것은…

    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내 옷자락을 잡으면서 좀 더 함께 있자고 조르던 녀석이었는데…

    “하아…”

    산이가 앉아있던 옆 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잘 한 건지 못 한 건지 다시 한 번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괜찮아…괜찮아 지주혁

    잘 한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

    카페에서 나오자마자 태성이에게 전화를 하였다.

    아무래도 내 연락을 기다렸는지, 신호음이 한두 번 울리자마자 녀석은 전화를 받았다.

    “태산이…잘 위로해줘”

    […그래…]

    내 한마디에 어떤 상황인지 태성이는 안 듯 전화를 끊었다.

    생각 같아서는 태성이와 술 한 잔 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오늘 내가 상처를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태성이 친동생이었다.

    아마 태성이도 나와 술 마시고 싶지 않을 것이고, 나 역시 태성이를 보면서 계속 태산이를 생각할 것 같기 때문에, 참았다.

    술 한 잔 하고픈데…

    내 인생 인맥이 이것 밖에 안 되는 건지…도통 머릿속에 함께 마음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이 없었다.

    오늘도 혼자 마실까…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하늘에서 소나기가 내렸다.

    갑작스럽게 내린 소나기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분주해졌지만, 나는 한참을 그 비를 맞고 서 있었다.

    “당신!! 미쳤습니까?!”

    나를 화악 잡아끄는 손…

    그는 나를 도와준다고 나를 잡아끌었지만, 그 힘 덕분에 나는 미끄러져서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윽-”

    “헉- 괜…괜찮습니까?!”

    남자는 놀랐는지, 얼른 나를 일으켜 주었지만, 이미 내리는 비에, 그리고 땅에 흐르던 빗물에 내 옷은 축축이 다 젖고 말았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빨리 옷 갈아입어야…”

    어째서 이 남자가 여기 있는 걸까…

    아아, 그러고 보니 여긴 회사 근처였다.

    그런데 내가 이곳으로 장소를 잡았던가.…아니다. 태산이가 그랬다.

    태산이가 장소를 정했다.

    바보 같은 녀석

    끝까지 나를 배려하는 녀석

    나 같은 것이 뭐가 좋다고…

    “지대리님”

    “진시우…”

    녀석에게 손을 뻗으니,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나를 일으켜 준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우산을 내 머리위에 씌워주며 얼굴에 다닥다닥 붙은 내 앞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오늘 내 술 상대 대줘. 잘됐다. 혼자 마시기 싫었는데.”

    “감기 걸립니다. 일단 집에 가죠.”

    “아니, 마실래. 마시고 집에 가지 뭐”

    “……”

    “싫어? 그럼 혼자 마시러 가지 뭐”

    “가요. 갑시다. 하지만 제가 가는 곳으로 가죠. 그 곳은 따뜻하니”

    나쁜 녀석

    내가 포장마차로 갈 것을 어떻게 알고…

    마지못해 끄덕거리고 진시우가 가는 곳으로 말없이 따라갔다.

    게이바로 끌고 갈 줄 알았더니, 의외로 평범한 곳이었다.

    아니, 좀 더 은밀한 곳이라고 해야 하나…

    회원제 클럽 같은 곳이었다.

    지하에다가 조용하고, 룸이 배치가 되어있어 서로 다른 사람들 때문에 눈치 보면서 마시지 않아도 되는 곳 같았다.

    진시우가 회원카드를 꺼내자. 곧 점원이 우리를 안내했고, 작지만, 꽤 고급스러운 룸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사 사촌이라더니 정말 돈이 많은 건지…

    나를 자리에 앉히고

    진시우는 잠시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타월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곧 룸 안이 따뜻해졌다.

    아무래도 난방을 켜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뭐 드실래요?”

    “아무거나…술이면 되”

    “식사는…?”

    “…그것보다는 술…”

    “정말 오늘 당신답지 않군요. 알았습니다. 잠시 만요.”

    그가 점원을 불러 메뉴판을 보고 이것저것 시켰지만, 난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냥 네 마음대로 해라는 심정으로 저 화려한 조명만 바라볼 뿐이었다.

    “돈 많은가 보군”

    “가끔 혼자 와서 마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 네게도 그런 면이 있었구나.”

    “무슨 뜻이지?”

    그가 순식간에 입이 튀어나와서는 나를 보고 눈을 째린다.

    전부터 느꼈지만, 진시우는 자신을 어리게 취급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오늘 당신 정말 이상해. 무슨 일 있었어?”

    “다시 반말 모드인가…”

    “뭐? 아…”

    내 말의 뜻을 안 녀석은 피식 피식 웃으면서 ‘그래서 싫어?’ 라고 말을 한다. 보통 같으면 싫다고 당장에 대답했겠지만, 지금은 이 녀석 말 보다는 마시고 싶으니…

    곧 이어서 나온 양주에 한번 기겁했지만, 녀석이 쏘는 것 같으니 그냥 양주 받아 들고 한잔 마셨다.

    “그렇게 빨리 마시면 취합니다.”

    “취하고 싶으니까 마시는 거지…”

    “왜 그래? 진짜. 이상…”

    “나 이상한 거 아니까. 진시우. 좀 조용히 해”

    “같이 마시자고 했잖아.”

    “그래, 같이 마시자고 했지…그랬는데…”

    역시 빈속에 빨리 마셔서인가. 갑자기 술이 핑 도는 느낌에 잠시 테이블 위에서 휘청했다.

    하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고 정신을 차렸다.

    “어이…”

    “하아…그 녀석, 다시는 내 앞에서 그렇게 안 웃겠지…”

    “……?”

    “다시는 내 앞에서 애교도 안 떨 거고, 다시는 형이라고 불러주지 않겠지…어리석은 놈…착한 놈…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복이 타고 났을 거다. 아마도…”

    그리고 난 그 복을 찬 바보 같은 놈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태산아.

    다른 사람들이 너를 왜 찼냐고 나에게 비웃게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되어야지. 그럼…”

    “그만 마셔.”

    “얼마나 마셨다고 그만 마시라는 거야 대체…나 아직 말짱하니까 나 건들지 마. 진시우”

    “한 씨네 형제 중 한 녀석 말하는 것 같은데, 그 녀석이 아까워? 당신 가지기에는?”

    “그렇지. 엄청 아깝지.”

    “그럼 나는?”

    “뭐?”

    “나는 아까워?”

    “아니”

    “…어이…”

    “내가 아깝다.”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니까 안 쪽팔려?”

    “사실이니까.”

    양주병을 잡고 털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내 잔에 부어넣고 다시 들이켰다.

    쓰다. 써

    그리고 속도 아프다.

    아마 나보다 태산이는 더 아프겠지.

    더 울겠지.

    너는 지금…어디서 울고 있니. 한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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